평일강론

연중 제15주일(다해) 루카 10,25-37; ’22/07/10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6-17 ㅣ No.5077

연중 제15주일(다해) 루카 10,25-37; ’22/07/10

 

 

 

 

 

 

 

 한때 우리는 어렵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치 못해서 이래저래 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옷은 매일 남의 것을 대물려 입고, 고기도 명절이나 기제일이 되어서나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콩 한 톨도 칼로 잘라 나눠 먹으면서 우애를 키우며 자라났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천주교회 사회복지사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 선조들은 성당을 짓기도 전에 먼저 양노원이나 고아원, 시약소(초기 보건소)를 먼저 지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했고, 가난했지만 그나마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삶으로써 나름 행복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다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싸놓고 있다가 상해서 버리기까지 합니다. 부부가 맛벌이를 해도 남는 돈이 없다고들 하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랴 유학보내랴 엄청난 돈을 퍼부어 넣고, 정작 부모는 휴가 때 어디 가질 못해 성당에 옵니다. 도로는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고 노는 날이면 유원지마다 인산인해입니다. 비행기는 늘 만석이며, 관광지 곳곳의 숙박업소는 꽉꽉 찬다고 합니다.

 

 

현대는 삶의 질의 향상과 소비성향의 다양화와 고급화로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가지로 풍족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풍족해 졌으면서도 덜 행복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기회적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더 먼저, 더 좋은 것을 갖고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함과 박탈감이 우리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율법 교사가 유다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루카 10,28) 라고 으쓱대며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자, 그가 다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몸마저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후 한 사제가 그 곁을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마주치고는 길 반대쪽으로 멀찌감치 지나가 버립니다. 사제는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지, 교리를 가르치러 가야 하는지, 면담을 하러 가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종교 일정에 맞추느라 그런지 몰라도, 마치 강도 만난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에게 해라도 끼칠까 걱정스러운지 멀리 돌아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유다인의 사제 지파라고 하는 레위인 역시 그 곁을 지나가다가 멀리서 그를 보고는 피해갑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그를 보기는 하지만, 선뜻 나서서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마치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처럼, 어느 누구 하나 찾아와 많이 아프냐?’고 걱정스런 말 한마디 내 걸어주지 않고, 누구 하나 어루만져주지도 않은 채, 이러 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인생에 빠져, 어려운 이웃은 돌봐줄 틈 없이 지나쳐가 버립니다.

 

그런데 이 때, 평소에 유다인들과의 관계에서 원수같이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는 그를 바라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몸에 손을 대며 그의 상처와 고통의 정도를 살핍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줍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가 간호해 줍니다. 밤새 그를 돌보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자기,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맡기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자기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까지 호의를 베풀며 자기 길을 떠납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는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 그러자 율법 교사는 부끄러이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3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마냥, 어려운 사람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사람이 등장했을 때, 자기가 아는 대로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가 버립니다. 어쩌면 율법 교사도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르지 않았는가 봅니다. 그가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다음에는 더 이상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으쓱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강조하는 가난은 곧 이웃에게 나눠줌으로써 가난해지는 선택한 가난, 다른 말로 이웃 돕기로 말미암아 없어진 가난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가난해져야 합니까? 교회는 나와 내 가정의 오늘과 내일의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여유를 남겨놓고 나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민족과 사회의 형편에 비추어 각자가 정합니다.

 

이웃 돕기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또 교회 내에 부자가 많아져야 합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기에 더 잘 도와줍니다. 아니 동감하고 동정하기에 누구보다 먼저 나누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 따져보면, 미래를 위한 저축은커녕 오늘 나 살기도 빠듯한데 이웃과 나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누는 것만큼 아니 어떤 때는 물질뿐만 아니라, 나누는 기쁨과 보람까지 합쳐 10배 이상을 다시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믿음을 통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다섯 번째 행복을 자기 성취와 실현 너머의 나눔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눔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나눔입니다. 없던 것이 들어와서 기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자신을 나누는 그 형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또 기쁘고 행복합니다.

 

1848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이 성서 구절을 통해, 교회는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데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가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당대 재산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상태를 미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통해 가난을 찬미하면서,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터이니 지금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고 노동자들을 호도한다는 평가와 그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833년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6명의 동료 대학생들은 이 구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제공해주자고 나섰고, 그로부터 성 바오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설립되어 오늘날 전세계 교회의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을 외면하게 된다면, 또 다시 세상은 교회에게 도전해 올 것이며, 우리가 듣고 나누고 믿는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위선과 방해물이라고 평가하고 단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2의 니체와 제3의 니체가 나타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난은 비단 물질적인 결핍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인간 삶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을 가난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불안정과 외로움, 사회적인 소외와 고립, 제도적으로 제한된 기회와 정보, 물질만능주의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가중시키고자 하는 큰 손들의 횡포, 전통문화와 가치의 몰락과 편중 등등의 어려움에서 헤매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기쁨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를 발견하고, 다음 기회나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향한 측은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어려움을 보듬고 싸매어 돌보는 모습입니다. 누가 가난한 이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그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어려운 이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며, 주님과 나와 어려운 이와의 삼위일체적인 인격적인 관계를 공유하며, 어려운 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자신이 한 조치와 행위가 주님 사랑 안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께서 몸소 함께해주시라고 청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일 어려운 이에 대해 조사하고 심사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일에 그친다면, 우리는 사회복지사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방법론은 먼저 주님께 그 어려운 이를 위해 기도하고 봉헌하며, 그에게 측은한 마음을 간직한채 그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삶과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며 함께함으로써, 주님께서 몸소 그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는 주님의 사도가 취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눈에 어려운 이들의 모습을 띄게 하고, 우리 귀에 어려운 이들의 호소를 들리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려운 이를 맡기시는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발견하고 경험하는 어려운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고 기도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의 나눔을 이어갑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