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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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웅 [mathias] 쪽지 캡슐

2003-12-28 ㅣ No.2812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최고의 사랑의 공동체-가정

 

+ 찬미 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아주 특별한 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아주 특별한 날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평상이 좋으십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런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특별한 날이 아니게 하소서. 이는 바로 평상 안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삶 안에 참 진리가 서려 있다고 프란치스코 성인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도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사랑은 이미 우리와 함께,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것. 마치 평상과도 같이. 그것은 우리의 의미이며 우리의 일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별로 느낌이 없을 것만 같은 이 일상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남으로써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특별해 지고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매일 기쁜 일상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 안에서 아무런 특별함도, 아무런 설레임도, 아무런 환호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삶 또한 의미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체험의 시작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처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장소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학교입니까? 이 성당입니까? 아니면 친구 사이입니까?

 

물론 그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았고 그분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공동체는 바로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바로 우리 가족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성가정의 모델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잃고 삼일 밤낮을 헤맸습니다. 삼일. 삼일 동안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숨도 쉴 수 없는 급박함. 초조함.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수한 역경을 힘들게 이겨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또 어느 순간 헤로데가 예수를 죽이려 했듯이 악의 무리가 덤벼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리고 예루살렘을 샅샅이 뒤져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죽음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아들 예수의 죽음.

 

마리아와 요셉은 아마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자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아들만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희망했을 것입니다. 이 모습 안에서 우리는 부모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예수를 구하고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하고 수도 없이 마리아와 요셉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죄스러운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사죄하러 아니면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러 성전에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일이나 지나서.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렇게 간절히 찾던 예수가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처음 성전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의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극도의 안도감과 함께 서러운 마음 그리고 화까지 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말합니다.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그런데 그 꾸중의 말에 예수님의 말씀은 과관입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너무나도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씀입니다.

 

약간의 농담을 섞는다면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모님의 말씀에 말대꾸를 하고 계신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예수님처럼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반은 어떻게 되었겠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 성모님과 요셉은 우리의 부모님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신뢰입니다. 그렇게 속 썩히고 그렇게 고달프게 했지만 그리고 이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충분한 이유가 있었겠구나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더 이상의 꾸중을 하지 않고 예수를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13살이 되는 해에 어린이들은 벌써 성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미 그 사회에서는 어른으로 대우를 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이가 12살이었다면 성인으로서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는 충분한 나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릇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부모님을 결코 나무라지도 마다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인간 부모님의 말씀에 곧 순종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진정한 가정 공동체의 사랑이란 자신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어린 자식이지만 그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주려는 부모님의 마음과 또한 아무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만 인간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아들 예수님의 서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부모님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만의 의견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까?

 

가정 안에서 자신의 것만을 주장한다면 그 안에서는 하나됨이 없고 오직 분열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열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써 가정 공동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가정 공동체 개개인이 나의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으로서 자식을.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만약 가정 공동체 안에 그런 신뢰의 장이 마련된다면 가족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느낄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단순한 일상의 삶 안에서 특별함과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최고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최고의 쉼의 공동체입니다. 가정 공동체는 완전히 하나됨의 공동체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의 하나됨의 가정 공동체를 이루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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