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게시판

가열찬 도전 제 2 막

인쇄

섬김 [prayer111] 쪽지 캡슐

2003-12-20 ㅣ No.578

†찬미 예수님

 

창을 전체 확대해서 읽어보세요

자기의 능력 100% 이상을 요구하는 일은 항상 자기자신을 고달프게 만드는 법입니다. 하지만, 자기 능력의 70~80%만 요구하는 일이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겠져.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전자 혹은 후자를 선택하여 살게 되겠는데, 그러고보니 이 글을 올리는 저는 후자 쪽이네요^^

나이 먹으면서 그렇게 바뀌어져 갔네요. 여태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반성은 쪼끔 해야겠네염. 이 분은 자기능력의 200%는 발휘하신 분이네요^^( 왠 능력론을 펼칠깡??)

 

가열찬 도전 제 2 막은 생계때문에 정규학력 제대로 못 받은 이가 이후에 생활해나가면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고시든 무엇이든지간에 목표를 설정해두고 하나씩 하나씩 목표에 다가서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저와 신림동성당 청년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올려봅니다.

 

 

동사무소 직원에서 판사까지

 

이승채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4번째의 공무원 공채를 거쳐 사범시험까지 합격한 그는 전남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빈농 이장열씨의 7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면학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 해를 쉬고 무작정 광주로 나와 조대부고에 입학, 3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러나 고3때인 ’73년 10월 광주지방 중학교 입학이 평준화되면서 가정교사 자리를 잃게되어

 

2개월간 선배 자취방에 얹혀 기거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그는 ’74년 조선대 법대에

 

입학한 직후 5급(현 9급 서기보) 지방공무원 공채에 합격, 광주시 충금동 동사무소 직원으로

 

자립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후 4년 동안 주경야독의 고된 생활을 이기고 대학 4년 시절인 ’78년

 

10월 법원 주사보 시험에 합격, 춘천지법 직원으로 재출발했다."

 

 

 

내가 2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해인 ’85년 10월14일 중앙지에 소개된 기사의 일부이다.

 

태어난 고향부터 졸업한 학교의 이름과 경유한 대부분의 직장이 소개된 화제의 인물란은 결국

 

"이승채-가난한 농부의 아들" 혼자 힘으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해야 했기에 학교 보충수업마저도

 

빠져야 했고 낮에는 동사무소 직원으로 관내를 돌며 각종공과금을 걷고, 야간학교를 다니는

 

법대생이 공부하는 것을 시기하고 책보는 것을 노골적으로 꾸중하는 상사들 앞에서 공부하는

 

티도 내지 못했던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판사와 변호사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기사화하면서 집념으로 이룬 인간 승리라고 표현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룬 일이 작은 인간 승리라면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승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조금씩이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승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어름이 되어서

 

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질 만크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는 어른이 되어서 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루를 배고프지 않게 지나가는 것, 눈치를 보면서라도 친구집이나 아니면 무등산 자락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변호사가 되리라는 꿈을 그때 설령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로서는 내 주제에 그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아마도 나를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꿈꾸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어려운 현실때문에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장을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에서 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나는 변호사나 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그것만

 

보고 나의 현실을 무시했다면 결코 동사무소 직원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너무 큰 꿈 때문에 지금쯤 나의 인생은 판사의 꿈을 좇았던 패배자가

 

되어 가슴 속의 한이나 다스리고 있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처럼 빽없고 연줄없는 사람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오직 시험을 통해서만 승진이 가능한 법원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첫 기회가 되었다. 사실 이미 시험을 다 끝내버리고 결과를 알고난 후에 그시험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자칫 자랑이 되기 쉽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거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전부 거친

 

나의 고백은 그 시험이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시험이든 판사가 되는 시험이었든 그 시험을 앞에 둔

 

순간만큼은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했었고 몇번의 사법시험 실패에서는 죽을 때까지라도 하겠다고

 

버텼던 기억뿐이다. 죽을때까지 하겠다는 각오와 끝까지 파고드는 노력 덕분에 나는 동사무소 직원에서

 

판사를 거쳐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것은 나의 좌우명이다. 노력없이 얻어지

 

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반드시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지 노력이 헛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세상에는 공짜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공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죽도록 노력했는데 운이 나빠서 시험에 실패했다’는 말을 들을때가 있다. 물론 나도 그런 불평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정말 뼈빠지게 노력했는가? 정말 죽도록 공부했는가"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외치는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겠다. 그렇지만 나의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 혹시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의 못사는 것을 불평하고 시험에 떨어진 것을 불평하고 시험에 떨어진 것을 운명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반성해야 한다. 나 역시 어렸을때는 아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더 고생하고

 

살았다고 생각되는 20년간 내 자신이 많이 변했고 내 생각도 많이 변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보내

 

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키려고 10살에 초등학교를 입학시켰던 부모님의 예상을 깨고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고 박사과정 이수중에 있다 시골에서 꼴망태 매고 코 질질 흘리면서 소먹이러 다니던 촌놈이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를 거쳐 변호사를 하고 있다. 물론, 집도있고 차도있다. 만약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판사도 하고 집도 한채 사고 자동차도 가지고 있을까?

 

 

 

’조상을 잘못 만났다고 불평하는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와 나는 똑같은 부모를 모시고

 

태어나 똑같은 집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너와 내가 차이가 나는 것은 네가 아가씨 손을 잡고

 

바닷가에서 젊음을 즐길때 나는 춥고 어두운 골방에서 라면 끓여 먹으며 피땀 흘리고 공부한 차이다.

 

청소년기에 아가씨 손을 잡고 바닷가에서 젊음을 즐긴 사람과 춥고 어두운 골방에서 라면을 긇여 먹어

 

가면서 공부한 사람이 커서 똑같은 조건으로 산다고 하면 정말 불공평한 세상일 것이다. 그 두사람 사이

 

에는 반드시 차이가 나야 공평한 세상이다. 나는 조상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데 너는 왜 조상을

 

원망하느냐?" 공짜로 그 많은 돈을 얻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또한 뼈를 깎는 노력이 못이룰 일은 없다.

 

 

 

한번 두번 고시에 떨어질 때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말고 계속 노력해봐라’라고 위로도 해주

 

더니 세번째 그것도 1차 시험에 연속 떨어지자 직장 동료들이 ’미친짓’이라고 숙덕이기 시작했고 같이 공

 

부하던 일류대학 출신들은 "조선대학 출신이 사법시험은 무슨 사법시험이냐 사무관 시험도 감지덕지지"

 

라고 비웃었으며 모시고 있는 부장판사님은 "이 사무관 그렇게 공부하여 고시가 된단가? 아무나 고시합격

 

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시면서 자기가 고시공부했을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면서 역부족이라는 충고도

 

해주었고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아내마저도 지칠대로 지쳤는지 불평을 하였다. 사실 나도

 

더이상 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소치라 합격할 수 있겠느냐는 압박감

 

을 이길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야기는 참을만 했는데 막상 아내의 실망어린 말을 듣고보니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해졌다. 무엇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했는지 후회스럽기도 했다.

 

 

 

집을 나와 일주일을 방황했다. ’포기할까? 안되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볼까?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은 초라하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술에 만취해 드어가 아내에게

 

호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점잖게 먼저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아온 데 대한 감사를 표하고 "당신 지금부터

 

내말 잘들으시오. 나는 끝까지 하겠소 50살이 되어도 좋고 60살이 되어도 좋소. 합격할 때까지 할것이오.

 

그것이 못마땅하면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시오. 내가 고시공부를 하다가 죽으면 내 비석에 ’이 사람은

 

평생 고시공부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애석하게 죽었다."고 써주고 내 자식들에게도 분명 그와

 

같이 말해주시오." 라고 말한 후에 아내의 대답도 듣지 아니한 채 책보따리를 싸들고 법원앞에 있는

 

독서실에 독방을 하나 얻어 틀어박혔다.낮에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자면서 집과

 

아내와 가족을 포기했다그때부터 1년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밥도 독서실에서 먹고 세수도 독서실에서

 

하고 잠도 독서실에서 잤다. 아무생각없이 근무시간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2평 정도 크기의 골방에

 

틀어박혀 오직 사법시험만 생각했다. 때로는 아내와 같이 자고 싶기도 하고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리

 

기도 했지만 내 인생을 건 도박판에서 헛눈을 팔 수가 없었다.

 

 

 

먼저 1차 시험에 3번씩이나 떨어진 원인분석에 들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외국어였다. 기왕에 망하는 것

 

외국어를 바꾸기로 독심을 먹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지만 나에게는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추우면 이불을 덮고 더우면 옷을 벗었을 뿐 난방 시설도 되어있지 않은

 

독서실에서 겨울 보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잠잘 곳이 없어서 그런것도 아니고 가족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따뜻한 집과 가족들을 두고서도 내 스스로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밤 열두시가

 

넘으면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생겨 미칠 것만 같았다. 법원 구내를 열두바퀴 돌아도보고 옥상에

 

올라가 아버님께 기도하기도 하였지만 외로움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1차 시험을 보러 가는 일요일

 

아내와 친형보다 더 잘해주시는 이재강 과장님이 독서실로 차를 가지고 왔다. 1분의 시간이 아까워

 

아내에게 가방을 챙기게 하고 나는 책만 보고있었는데 두 분이 방 청소를 하였다.

 

 

 

나중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날 아침 아내가 물컵을 치우다가 거울에 떨어뜨려 ’와장창’하면서 거울

 

과 컵이 한꺼번에 깨져버렸다는 것이다. 시험보러 가는 날 아침에 거울이 껴져버렸으니 아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재강 형님은 매우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내가 눈치 챌까봐 얼른 형님이 몸으로

 

가리면서 나에게 말도걸고 아내는 조심조심 청소를 했는데 2평짜리 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나는 모르고 공부만 하더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그 날 시험은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지도 몰랐고 그 해 나는 1차와 2차를 동시에 합격하는 행운을 안았다. 감히 말하건데

 

그 해 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였다.



2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