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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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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규 [marco1998] 쪽지 캡슐

2013-02-04 ㅣ No.7649

듣는 지혜  

쉬는 신자들에게 왜 냉담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미사 중 강론이나 설교를 듣고 나서,

그 말씀이 듣기 거북해 냉담하고 있다고 답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강론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자기 위주로 듣다보니 그 강론 말씀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고,

나를 힐책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래서 도무지 역겨워서

더 이상 성당에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하거나,

설교자가 정치와 사회정의를 논하는 것이 역겨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냉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전달 방식,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를 떠나고, 하느님나라와 영원한 생명까지 포기했다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말씀은 쌍날칼과 같아서

그 말씀이 나를 힐책하여 뜨끔하게 만들기도 하고,

내 마음이 무디어져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내 가슴을 꿰뚫기도 하며, 정의로운 사회,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사회,

청렴하고 성덕을 갖춘 정치인과 사회 지도자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나에게 고깝게 들리고, 거북살스럽게 만들었다면,

나는 그 쌍날칼과도 같은 주님의 말씀에 찔리거나 베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에 찔리고 베였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는 잠시 아프겠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태여서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 받은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덕스럽고 의롭게 살아

이 시대를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로 바꿀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잠깐 아프고 화가 난다고 하여,

그 말씀이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 하느님을 외면하고 도망간다면,

어린 아이가 주사 맞기 싫어서, 무조건 병원가기 싫다고 울고,

보채고 떼를 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며, 예언자입니다.

설교자는 청중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말씀도 전해야 하지만,

늘 그럴 수는 없는 없습니다.

때로는 말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그 말씀이 청중들의 귀를 거슬려 비난과 모함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며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판단된다면

어쩔 수 없이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

나 자신이 오직 입에 달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듣고 싶어 한다면,

나는 하느님을 자기 생각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설교자를 은근히 억압하고 조종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치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라고 자처하는 자들까지도

자기 귀에 거슬리는 말씀과, 거북스러운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백성들이 죽거나 말거나

무조건 입에 달고, 귀를 만족시키는 말만 지껄여 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들에게 맞아 죽더라도 가서 옳은 말을 하라고,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마침내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지가 찢겨지고, 머리가 부서지고,

혀가 뽑히는 끔찍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라고,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갇혀있는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하여 왔노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설교를 듣고 있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귀를 거슬려,

그들이 분노하여 주님을 벼랑에 떨어뜨려 죽이려 했다고 루카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재미까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늘 성령 충만한 감동과 위로가 이어지는 강론이 듣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강론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 세계를 바라보고,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며, 때로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는 불의한 자들을

고발하는 내용일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설교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묶인 자들의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기득권 계층과 권력자들에게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고 귀에 거슬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육신에 달콤하지 않습니다.

때론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주님의 말씀도 입에 쓰고,

귀에 거슬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나의 영혼을 일깨우고, 육신을 건강하게 치유하며,

비뚤어진 내 마음을 고쳐주는 약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입에 쓰더라도 우리는 그 약을 먹어야 하고 귀로 들어야 합니다.

참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은 꿀보다 달고 부드럽지만,

영혼이 병들고, 자기 자신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기 힘과 주먹만 믿고 사는 이들에게는 익모초보다 쓰고,

고통을 주는 매서운 칼날처럼 느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의 병을 치유하고,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쓴 약을 먹어야 하고,

날카로운 주님의 말씀에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주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생명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고 말씀을 먹고,

말씀을 마시며, 말씀에 흠뻑 젖어 살아갑니다.

주님의 말씀이야 말로 우리가 사는 목적이며, 기쁨이며,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쓰더라도 받아먹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쓴 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말씀이 내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고 나면,

어느새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음식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먹고 살기에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수원교구 밤밭 김봉기 마태오 신부님의
<듣는 지혜> 주제의 말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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