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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5.9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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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4rang2] 쪽지 캡슐

2010-05-09 ㅣ No.375

<부활 제6주일>(2010. 5. 9.)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하느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

좋지 않다는 것은 선(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善)이 아니라면 그것은 악(惡)입니다.

혼자 있는 것이 악(惡)이라는 것은 죄와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고통을 크게 겪은 인물인 욥도 외로움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내 형제들은 내게서 멀어지고 내 친구들은 남이 되어 버렸다네.

친척과 친지들은 떨어져 나가고 집안 식객들은 나를 잊었으며(욥 19,13-14).”

“내게 가까운 동아리도 모두 나를 역겨워하고,

내가 사랑하던 자들도 내게 등을 돌리는구려(욥 19,19).”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은 고통보다도,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 그 외로움의 고통이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이 뭔가를 잘못하면 징벌방에 집어넣습니다.

징벌방은 곧 독방입니다.

그런데 독방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징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접촉과 대화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징벌입니다.

그게 징벌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징역살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결혼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단체에 가입하고...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근본적인 외로움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엔 사람들 때문에 더 외로워질 때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외로움은 배우자로도 친구로도 취미활동으로도 오락으로도 없애지 못합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외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사랑이 식었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친구들이 있는데도 외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께서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느님 안에서 하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행복은 사라지고 고통만 남았습니다.

하와는 옆에 있었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담은 하와를 만나기 전보다 더 외로웠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외로움이 바로 “근본적인 외로움”입니다.

그것은 배우자도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어떻게 도와줄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탈출구이고, 해결책이고, 정답입니다.

인간들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

그래서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말을 공감하지도 못하고 실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생생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소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이 독방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과 차단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재소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그렇게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24시간 대침묵을 지키면서 평생을 사는 관상수도회 수도자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며칠 지내면서 그 생활을 조금 맛본 적이 있는데,

그분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기도와 성가와 웃음소리뿐이었습니다.

외출, 외박, 면회, 휴가, 편지, 전화, 티브이, 라디오, 신문, 각종 서적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만일에 강제로 들어간 것이라면 교도소보다 더 지독한 교도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스스로 그런 삶을 자청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웃음소리를 다른 데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 수도원도 마찬가지겠지만,

신학교에서는 저녁 7시40분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대침묵을 지킵니다.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일체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십 명이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대침묵 시간 동안엔 혼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침묵은 좀 더 하느님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라는 뜻과 함께

외로움을 극복하는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그 생활에 적응 못하면 외로워서 미치는 것이고, 적응하면 또 그런대로 잘 살게 됩니다.

 

예수님도 무척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그 외로움이 십자가의 중요한 일부였을 것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그러나 예수님은 외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밤에는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혼자 지내신 그 시간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주일 제2독서에 묵시록 끝부분이 나오는데,

묵시록에서 묘사하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도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입니다.

 

그 삶을 미리 앞당겨서 오늘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왜 미사 때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에는 외로움도 서러움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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