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동성당 게시판

나와 이웃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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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현 [sandel] 쪽지 캡슐

2002-04-20 ㅣ No.5971

 

만  남                            

                              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관계가 있다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우호적이냐 적대적이냐 아니면, 가까운 관계냐 먼 관계냐 등 차이는 있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생성소멸과 변화를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한번도 조건 없이 그리고 관계없이 존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계된 것과의 만남이 인간 삶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운명이 만남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를 만나느냐? 또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을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즉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바로 나를 보는 그 눈으로 남 또한 보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를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는 너는 늘 내가 보는 대로 보이는 존재일 뿐이기에 또 다른 나, 아니 나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너에 대한 이해도 내가 나를 보는 태도에 의해 달라진다면 진정한 문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늘상 남들에 대해 좋지 않은 관계나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될 때 문제 해결을 위해 자기 자신을 보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남들을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달리 본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 질 것이며, 다른 사람 또한 내게 달리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태도를 보면 텅 비어 있는 내 안에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안에 어떤 양식(틀)을 만들어 그 틀에 맞게 담으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로운 사람, 해로운 사람",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의인, 악인", "잘 난 사람, 못난 사람", "존경하는 사람, 멸시하는 사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으로 구별해 내고 그 판단에 의존해 차별하는 마음을 갖게 되므로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견해나 태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혹은 악하다는 등의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 역시 인간을 통합적으로, 본래의 모습대로 보지 못하는 데서 파생되는 또 다른 어리석음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 본래의 모습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선과 악을 알지도 못하므로 선악으로 갈라지지 않은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과 악을 알고 구별하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이지 창조된 본래의 인간은 선과 악을 모릅니다.

 

선과 악을 알고 모든 것을 그 기준으로 구별하게 됨으로써 거기서 차별이 생기고 또한 거기서 분열과 갈등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고통과 죽음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인간은 마치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인 냥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나와 남을 구별하고, 내 기준이나 율법 규정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죄인으로 여겨 멸시합니다.

 

이렇게 갈라놓은 인간을 다시금 통합하여 하나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법을 배워야하며 그분이 사람을 대하듯이 대해야 하며, 그분이 가르친 바를 따라야 비로소 속지 않고 참된 자기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실의 두려움, 소외의 두려움, 거부의 두려움 등을 불러와 행복이 아닌 불행을 초래하게 하며 결국 원망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삶의 의미는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참된 사람이 되고 싶고, 참 삶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태 22, 37-40)는 것이 율법과 예언자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우리가 먼저 사랑 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고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이다.

 

우리는 내가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오직 하나뿐인 존재이며,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곧 성령을 보내주셨고,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인간이 갈라지지 않은 본래의 인간이요, 그것이 참된 사람이 된 모습입니다.

 

나무에 비유한다면 한 줄기에서 갈라져 있는 가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나무일뿐이니 예수님은 그 전체를 보시기에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자녀로 한 몸임을 거듭 깨우쳐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갈라져 있는 가지만 보기에 나와 남을 구별하여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남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몸을 대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타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기 위해 예수님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였습니까?

 

첫째, 제자들의 부르심을 통해 드러난 사랑.

 

충만한 삶을 통해 참된 행복을 살도록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제일 먼저 선택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 엄청난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도들은 분명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랑 받을 만큼, 선택될 만큼 어떤 남다른 조건을 지니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는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어부나 세리, 혁명 당원 등, 그 사회 속에서 하층 계급에 속하고 천대받는 가난한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그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사랑 받는 인간의 조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멈추지 않는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 사랑.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할 때 상대방의 자세나 반응을 조건으로 삼든지, 능력이나 자격을 조건으로 삼게 되기 쉽고, 그렇게 시작한 사람이라도 상대방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이라는 조건을 내걸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해도 계속해서 낡은 비전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따르도록 교육하십니다. 그래서 성서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이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가르침의 핵심은 늘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랑으로 섬기는 것,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만이 실체적인 힘이며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노력은 결국 수난 전날 제자들과 만찬을 함께 하실 때 행하신 세족례, 즉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모습에서 극대화됩니다.

 

이 상황을 묘사하는 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들을 못내 사랑하시었으니 …"라고 시작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요한 13,1). 그리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주셨다"(요한 13, 4-5).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요한 13, 12-15).

셋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배신과 거짓 증언, 비굴함과 도피를 택했고, 자기 중심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없이 분별과 분열을 일삼는 고통과 죽음, 악의 실체 앞에서 모든 것을 통함시키심으로써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고자 하신 예수님은 사랑으로 죽음과 악을 끌어안으시지만 제자들은 두려워 도망을 쳤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통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으니 배신한 제자들에게 충만한 삶을 가능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넷째, 부활을 통해 드러난 제자들에게 대한 사랑.

 

부활은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죽음에 이르도록 사랑한 것이라면 부활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에 잘 참여하지 못하고 배신하고, 도망가고, 두려워하며 문을 닫아걸고 있어도 예수님은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평화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조건 없는 사랑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승리를 보여주시고 꾸짖음 대신 "샬롬"하고 평화를 주시며 그들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자 그들 앞에서 생선을 먹어 보이시고, 믿기 어려워하자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 깊은 사랑의 행위에 감동하여 비로소 마음 속에 있는 불신과 두려움의 장벽을 헐어 버리게 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저버리셨지만 예수님은 사도들을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음도 가로막지 못하는 사랑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국한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마치 물이 흘러가듯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 생명을 움틔워 냈으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든 충만한 삶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안에서 자신도 남도 보지 못하는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해 내셨고, 그것을 깨닫고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존재 가치를 발견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여 내 안의 선과 재능을 발견해 내기가지는 자신도 자기 안에 있는 선과 재능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본래 인간의 눈이 자기를 보게 되어 있지 않고 남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장단점이 내 눈에 더 잘 띠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의 약점이나 단점들은 잘 보는데 비해 장점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빛을 가리고 잇는 내 그림자가 상대편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어둠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남의 모습을 보면서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끌을 빼내기 전에 먼저 자기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꺼내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수 많은 병자들의 치유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세리나 창녀 등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예를 들자면 우리는 자케오의 이야기나 막달라 마리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신 막달라 마리아는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에서 베풀어진 잔치에 초대된 예수님을 찾아가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칼로 닦아 드렸던 여인인데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조소와 비난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결국 최초의 부활 목격 증인이 됩니다.

 

또 자케오는 예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의 집에 머무시는 사랑을 통해 재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예수님께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케오 안에 숨겨져 있던 선과 재능이 예수님의 손길과 사랑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전해 새로운 차원의 삶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를 통해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개념 속에는 자비와 용서, 이해와 존중,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과 아낌없이, 조건 없이 내어줌 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소유나 집착, 의존 등과 명백히 구별됩니다.

 

또 이 사랑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듯이 편애가 아니며 멀고 가깝고, 잘해주고 못해주고, 친하고 아니고, 선하고 악하고를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원수에 대한 사랑에까지 이르니 너희에게 잘 해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도둑놈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비추는 빛과 같고 성인이나 죄인에게 똑같이 내리는 비와 같습니다. 장미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모두 자기의 향기를 주듯이, 또 나무가 모두에게 그늘을 주듯이 사랑은 차별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선물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을 보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바로 이러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사람답게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진실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이를 가능하게 해 주시는 성령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오셨고, 사랑을 살고 보여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을 살 수 있도록 당신 성령을 약속하고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관계가 갈등과 다툼, 분열과 대립에서 화해와 용서, 일치와 이해의 관계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어떤 관계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이해와 사랑뿐"입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말하고, 행하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통합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이웃이 하느님과 절대로 다르지 않은 존재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나에게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을 행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때문에 대접하는 의도적인 행위가 되지 않도록, 자기가 한 일이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인지 모르고 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들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는 것을 보고 저희가 ……"라고 말합니다. 주님인지도 모르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차별 없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

 

노자는 도덕경에서 "본래의 모습을 씻고 닦아 흠이 없어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는 깨달음입니다. 거기에서 나와 너가 다르지 않으며, 나와 하느님, 너와 하느님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알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며 하느님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이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결국 나와 이간의 문제는 하느님과 관계 속에서라야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의 얼굴에서 당신을

 

주님, 우리들의 눈이

형제 자매의 얼굴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들의 귀가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절규를 알아듣게 하소서

굶주림과 한, 공포와 억압에 괴로운 사람의 탄원을.

 

주님,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이 우리들을 사랑하신 그 같은 사랑으로.

 

주님, 당신의 영을

오늘도 우리들에게 한결같이 주소서.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풍기게 하소서.

우리들이 하나의 마음,

하나의 영혼이 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사랑하지 않으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랑의 행위만이 인간 서로 간의 관계를 심화시켜 주는 것이니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는 인간이 서로 다른 존재요 他者일 뿐입니다.

 

관계에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만나므로 행복해지거나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서로가 관계는 있되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그야 말로 그 관계는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달리 말해서 단지 함께 산다든지, 아니면 서로가 부부 관계나 부모 자녀 관계, 형제 친척 관계라는 사실만으로 삶이 축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기쁨의 축제로 바꾸어 주는 것, 서로의 만남을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관계로 가꾸어 가는 것은 바로 서로의 관계 속에 사랑이 자라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배론성지 배은하 신부님 강론중에서   http://www.baer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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