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동성당 게시판

어느 시각장애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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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건기 [jamesbae] 쪽지 캡슐

2000-10-15 ㅣ No.32

어느 시각 장애자와의 네 시간 대화

 

실명한지 오년 쯤 되는 어느 시각 장애자와 우연히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내가 강의하는 피 교육자였고, 나는 강의가 끝난 다음 그를 안전

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계단에서 안내 길라잡이를 하던 차에 그가

대화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의례적인 대답만 하다 점점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갔고, 그의 말을

그냥 안됐다 싶은 생각으로 들어주는 나를 좀처럼 해방시켜 줄 태세가 아니

어서 그렇게 긴 시간을 대화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때 H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지식이었고, 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흘을 얻어

맞고도 정의를 택한 그의 필력을 꺾을 자도 없던 대단한 기자였던 그가

장애를 딛고 일어선 과정을 한참 얘기했고, 또 그의 말에 대한 나의 의견은

그가 거의 강제적으로 가로 막았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야기만 들어 달라는

그런 사고를 강하게 내비치는 사람이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 내 나름대로의 스케쥴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과는 일찍

헤어져야 내 볼일이 원만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참으로 그를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내 스케쥴을

포기하고 이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하기로 맘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도 나의 진심을 알았던지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 놓았고,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소위 육신의 정상인인 우리들이 정신적 장애를 알지 못하고

육신의 장애자인 그들에게 편견으로 대하는 이야기와, Cane(장애자들의 흰색

지팡이)을 들기 싫어 전철간에서 손잡이를 드듬으면서 성폭력범으로 몰린 일,

빨리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장애를 극복해 나간 이야기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아내의 어떤 사건까지 털어 놓을 때는 참으로 인간대

인간으로서 진솔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한참을 들은 후에 겨우 한 마디로 "용서"라는 말을 해 주었고

자기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겸손과 인내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가운데 서로

인간적인 진지한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고,

대화 상대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돈의 유혹을 물리치고 얻은 정의에 불타던

기자시절의 이야기, 정말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 이야기,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인간적 의리는 무엇이고....., 또 청소년에 대한 불타는 교육적 열망, ....

할 일이 너무 많은 그가 장애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에야 비로소

그는 나를 놓아 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장애를 잊고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만 한 곳의 장애일 뿐인데 마치 전체적으로 장애자인 것처럼 대하는

우리를 질타할 때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어느 교육 과정에서 정상인 2인 1조로

시각 장애자 체험 교육을 받았는데 그 때는 나를 인도해 주던 짝궁에게 단지

고맙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는데 이분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 진정으로 고마와

해야 할 대상은 옆에 있던 짝궁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의 온갖 먹거리와 볼거리와 소유할 거리가 모두 나 아닌 다른 이웃이

불특정 다수 중에 하나인 나를 위해서 자신의 온갖 피와 땀을 흘렸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고,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곳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힘에 의해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런 대화였고 참으로 보람된 하루였다.

 

그분은 정상인이었고, 나는 장애자였다. 모든 지체 부자유자들도 정상인이고,

우리 모두도 지체부자유자들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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