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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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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진 [jioseph] 쪽지 캡슐

2000-03-06 ㅣ No.731

 

@ 이 본문은 고해성사에 대해 강의용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버지 안에 한 형제로서 우정을 나누며......

 

 

#  이해를 돕기 위해 : 간단히 말해스어, 고해성사는 죄로 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우리가 죄에 억눌려 지내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화해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용서으 은총을 체험할 것이고 점점 더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

 

 

고해성사

 

 

                                                              최 석진 요셉 Sc.

 

고해성사는 분명히 성서 안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으고(마태 18, 18...) 교회 전승 안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고해성사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가 오늘날 맞고 있는 고해성사의 실질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예수님게서 화해의 경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잃어비린 아들의비유를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과연 그분의 사람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죄의 용서에 대한 매일 매일의 경험이며, 용서받은 사람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인간의 경험에 의한 신적 계시의 표현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이하)에서 아주 며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들 역시 화해-선물이며 동시에 과제로서-의 성사적 예절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경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의역

사라는 맥락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성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모두의 평화이시며 화해이신 그리스도와 밀착된 경험을 제공해 준다.

고해성사에 대한 좀 더 개방된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교회는 이 고해성사를 죄인들을 위한 화해의 표지로 삼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임무로서 성사화 시킴으로써 고해성사에 대한 외적인 조건들이나 표현들에 대한 하나의 주목할만한 다양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여러분이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여러분이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입니다"(마태18,18). 이 본문에서 말하는 "풀다", "매다"라는 말에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형제적 충고의 시도가 역시 포함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각자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입니다."(마태 18,25).

미사의 첫부분에 시작되는 참회예절, 양심성찰, 그리고 참회에로 초대하는 기도들, 또한 하느님의 성성에 대한 경외심과 신뢰에로의 초대등은 죄인들의 용서를 위한 성체성사의 목적을 부각시킨다. 또한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니는 정화시키는 힘에 대한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른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여러분은 깨끗합니다"(요한 15,3). 따라서 사제가 행하는 강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특별히 동방교회에서의 성체성사 거행은 회개가 가능하고 또 절박하다는 기쁨의 선포를 위한 주요 무대였으며 주교와 사제, 그리고 그 백성에게 주어지는 육화의 예절은 대단히 감동을 주는 하나의 표징이었다. 주교는 끊임없는 회개의 필요성을 의식

하는 가운데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이는 전적으로 어떤 개인적 예배의 차원

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7세기 동안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은 소죄와 대죄의 구별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침을 주고 있었다. 또한 고해성사에 관한 법 규정은 모든 각각의 대죄들은 개별 고백에 의해서만 사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하였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말할 때, 무엇보다도 개인의 회개와 동시에 사회의 회개라는 차원에서 고찰하여야만 하며, 이는 단순히 개별 고백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고해성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위험한 세심증을 야기시키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한 반발 내지는 반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법적인 압력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외적 법정으로부터 강요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

들의 제거는 분명히 교리교육과 고해성사의 실천으로부터 아주 잘 드러나게 되는 은총의 법에 의해서 심사숙고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거룩함과 신앙이 보호되기 위한 어떠한 제재의 규정도 필요하며, 게다가 각기 다른 문화배경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고해성사가 매력적인 것이 되게끔 정성을다햐여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 고해성사 안에서 흔히 경험 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해성사가 자기 생활의 점검 안에서, 혹은 공동체적 생활의 점검 안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고백자를 더 자유롭게,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가지 확실한 것은 공동고백을 통해서 일괄사죄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만일 후에 개별 고백을 할 의지가 부족하다면 그사람은 분명히 냉담에 빠지거나 표면적인 신앙상태에 머무르고 말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고백의 종류도 사실 무척 다양하기 때문에 사죄 역시 그러한 다양성에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요즈음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으로서 고백자와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는 기능도 아주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고 다양성이 없는 형태는 화해의 성사를 위해서는 어떤 때는 독약의 위험까지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성사를 통해서 선포되는 자유와 해방의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우리 인간들이 더욱 더 자유로울 수 있고, 전체 세계에 널리 확장되어 있는 하느님의 해방과 진리에대한 계획, 그리고 하느님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의식케 해준다. 그러기에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새로이 베푸시는 은총에 응답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고통과 커다란 신뢰로써 하느님의 해방과 자유 안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암흑과 자유의 그릇된 개념 속에서 헤매게 하거나 우리를 서로 떼어 놓으려는 죄의 유혹을 피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고해성사를 위해 사용되는 모든 것들 - 형식, 양식, 대화, 그리고 교육등 -은 절대로 인위적인 조작의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고백을 듣는 사람은 고백자가 비록 어떤 때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신실한 양심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고백자가 고백하는 것을 존경심을 가지고, 그리고 신속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고백자가 내면적인 문제들을 잘 설명하지 못할 때는 절대로 추측하여 알아 들어서는 안된다. 드물지 않게 고백을 듣는 사람이 고백자에게 일종의 정신 분열증적인 의식을 갖게끔 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고백을 듣는 사제는 형제들 사이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어야만 하며, 치유자인신 그리스도의 한 모상이 되어야 한다.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여러분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사실 종은 자기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친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5,15).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적 사명 안에서 치유와 죄의 용서 사에에 하나의 놀랄만한 일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또한 동시에 화해와 용서의 임무를 지닌 사람에게 사람을 치유할 사명을 맡기셨다. 사실 과거 20-30년 사이의 심리 치료는 구원, 화해, 그리고 치유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발견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인정한다. Karl Menninger, Eeich Fromm, Victor Frankl과 같은

위대한 심리학자들은 인간생활의 건전한 궤도 안에서 인간의 건강을 정의 하였었다. 인격을 갖춘 존재로서의 인간은 하느님, 자기 자신, 이웃, 그리고 우주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움을 찾을 때 비로소 근본적으로 치유가 되는 것이다. 화해의 성사는 가장 첫 번째

목표로서 바로 이러한 우리-너-나-하느님이라는 본질적인 관계들을 회복하느데 있는 것이다.

성사들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고, 또 받아 들여진다는 것을 아주 깊은 차원에서 경험할 수가 있다. 화해의 성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방탕한 아들에게 누구보다 먼저 그를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시며, 또한 엄청나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아주 위험한 지경에까지 몰고간 인간을 당신에게로 초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인간이 있기를 원하는 그곳에 있는

인간을 받아들이신다. 이러한 시각에서 성사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치유를 위한 힘이다.

성사들 안에서 인간이 친교를 이루는만큼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이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끔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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