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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고통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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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11.200.214.*]

2005-08-26 ㅣ No.3665

우리는 하느님이 이런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선하시고,

정의로우시고,

무엇보다도 사랑 자체이시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사랑이신 분이 어떻게 세상에 만연한 고통이라는 악을 그냥 그대로 두고 보실 수 있는가?

 

선하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어찌하여 고통의 존재를 허용하시는 가?

 

하느님은 사실 전능하지 않으신게 아닌가?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고통과 악을 없애버리지 못한다 말인가?

 

전능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입니다.

 

설사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악을 저지르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선을 행하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있다면 별달리 문제될 것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대개 거꾸로 되어 있죠. 악한 사람은 잘 살고 오히려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상황을 도데체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죠? 이러고도 하느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으로 발생하는 고통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은 도데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은 우리가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여기는 것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심각한 모순으로 보입니다.

 

어떤 이가 이런 이유로 하느님은 존재할 수 없고 그래서 무신론자가 되었다라고 해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 스스로도 이에 대한 온전한 답을 알지 못하는 데 말입니다.

 

사실 친구분이 제기한 의문은 굉장히 답하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이를 "고통의 신비"라고 합니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뵈옵기 전에는 결코 온전하게 깨달을 수 없을 겁니다.

 

구약성서의 욥기는 선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룹니다. 심지어 하느님이 그런 고통을 직접적으로 사주하시는 듯한 모습으로까지 그려집니다.

 

욥은 하느님께 울부짖습니다. 왜 당신을 극진히 섬기고 착하게 살아온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친구들이 비참한 처지에 빠진 욥을 위로 한답시고는 나타나서 다들 네가 뭔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나쁜 짓을 한게 있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고 그러니 숨기지 말고 솔직히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는 식으로 조언을 합니다.

 

하지만 욥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고통을 당하다니 너무도 억울하다고 반박합니다. 이렇게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반박이 오가고 욥은 마침내 하느님의 직접적인 답을 호소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직접 답을 주시지만 전혀 우리가 기대하던 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답이 궁금하시면 욥기를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어렴풋이나마 고통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지금이라도 바로 세상에서 완전히 고통과 악을 사라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인류도 같이 사라져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멸망과 악의 멸망을 분명하게 분리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겁니다.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도 있는 얘기이죠. 가라지를 없애려다 밀을 다치면 안되기 때문에요.

 

사실 사람은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고, 다들 두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고통을 내몰라라 하시며 위에서 내려다 보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몸소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생로병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다 받아 들이시고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사랑말고는 무엇으로 이런 놀라운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행여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면 대신 죽어줄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악한 이를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칠 이가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몸소 하셨지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아들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만 확인하시고 이삭을 살려주시지만, 정작 자신의 아드님인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한 제물로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상징인 십자가는 본래 고통의 상징이지만 구원의 상징이 되었죠.

 

복음의 기쁜 소식은 결국 인간이 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굳건히 믿고

고통이 사라지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예수님이 그랬듯이 사랑으로 인간이 짊어진 고통을 감내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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