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게시판
[하늘/협의회]찻주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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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나는 찻주전자였지요. 긴 주둥이와 넓은 손잡이가 아주 우아했답니다. 아무 맛 없는 찻잎을 따뜻한 물 속에 우려내 향기 좋은 차로 만드는 나의 재주를 모두들 부러워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주인이 실수로 그만 나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뚜껑이 깨져 쓸모 없어진 나를 주인은 뒷마당에 버렸답니다. 난 모든 희망을 잃었지요.
그때 키 작은 한 소녀가 쓸쓸하게 뒹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어요. 소녀는 한동안 나를 들여다보더니 내 몸에 흙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처음엔 나를 묻어 버리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소녀는 까만 씨앗을 흙 속에 함께 넣어 주었어요.
얼마 뒤 내 몸 안에는 작고 싱싱한 뿌리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마치 맥박이 고동치는 것 같았지요. 그 뿌리가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더니 예쁜 꽃망울을 터트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새 주인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어요. "미안하다. 이 꽃을 더 크고 좋은 화분에 옮겨 심어야겠구나." 나는 또다시 마당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지요.
하지만 이젠 슬프지 않아요. 이것이 또 다른 멋진 삶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란걸 잘 알기 때문이죠. 처음에 나는 흙이었고, 찻주전자였고, 화분이었고...다음엔 또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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