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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사랑과 신뢰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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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육 [jangjy] 쪽지 캡슐

2010-07-14 ㅣ No.7177

수품 10년이 된 어느 사제가 이런 고백을 했던 글이 생각나 몇 자 줄여 적어 봅니다.
"사제로 생활하는 동안 주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고해 실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하던 선배 신부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목의 대상이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가면 으레 가장 좋은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론도 쓸데없는 말로 자꾸 길어집니다.
회합 때,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안 해도 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용서 받을 것들이 점차 쌓여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지닌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됩니다.
 
바리사이인 시몬이 주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환대의 표시로 발을 씻을 물도 내놓지 않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드리지도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습니다.
시몬의 초대에는 사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시몬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을 모셨는지에 관심이 더 있어 보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이루시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세 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집은 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실제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주 냉대를 받으십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나러 교회 공동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나오곤 합니다.
 
이런 마음과 달리, 한 여인이 주님을 환대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루카 7,38).
이 여인의 행동은 아주 귀한 손님에 대한 대접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지은 죄의 고통에 갇혀있지만,
용서받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주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보여드립니다.
침묵이 바로 이것을 입증해 줍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말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주님과 이 여인을 함께 비난합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루카 7,39).
 
바리사이의 문제는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자신을 의탁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시몬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적대감으로 과거에 그녀가 지은 죄의 상황 속에 그 여인을 가두어 버립니다.
이 편견과 적대감은 사랑하는 나의 이웃의 십자가를 함께 져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인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판단해
자신은 참회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을 그 여인과는 다른 부류의 범주,
곧 의인의 범주에 넣고 그 여인과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실제 그는
그 여인과 분리됐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도 자신을 분리시킨 것입니다.
 
주님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는 한 여인의 존엄성을 살려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 직분이나 위치를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직 우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마음과 사랑을 향한 의지를 보십니다.
그 죄 많은 여인은 과거의 부끄러운 죄로 인해 줄곧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이제 사랑을 향한 의지와 행위를 통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저지른 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용서를 청하고 사랑을 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용서란 결국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며
거기에서 내면의 평화와 삶의 희망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홍승모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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