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성당 게시판

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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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anttonio] 쪽지 캡슐

2000-09-01 ㅣ No.4135

 

 

    죽은 이는 신화가 된다.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 리버 피닉스가 그렇고, 3J로 얘기되는 짐모리슨, 제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가 그렇고, 커트 코베인이, 제프 버클리가 리치 에드워즈(여전히 실종 중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가 그렇다.

 

    유재하가 그렇고, 김광석이 그렇고… 김현식도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현식은 1958년 1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 집안은 충남의 유지였으며, 그의 외가 역시 풍요로운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된다.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던 그 때부터 그는 고립과 소외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았았지만… 자연 속에서 그의 표현대로라면 ’파아란 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의 추억을 얻었다. 이는 이후 그의 음악 생활에 큰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잦은 전학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했던 시절을 보내고… 우등생이었던 중학교 시절, 그는 기타 연주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지게 된 그는, 당시 명문 고등학교이던 경기고에 떨어졌고, 밴드부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들어간 명지고에서조차 결국 자퇴를 하고 만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 다방 등을 다니면서 통기타 가수들과 어울리곤 했던 김현식은 검정고시 학원생활을 하면서 드디어 "가수"의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그 후 "쉘부르", "썸씽" 등의 유명한 음악 다방에서 노래를 불러오던 그는 특유의 가창력으로 다운타운가에서 조금씩 인지도를 얻어갔다.

 

    1978년,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데뷔 앨범을 내기로 했던 김현식은 당시 대마초 사건 등의 파장 때문에 2년이란 시간을 기다려 1980년 그의 첫 앨범을 대중 앞에 내놓게 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떠나가 버렸네>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그러나, 대중의 반응을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1984년 서울음반에서 낸 2집에 수록된 <사랑했어요>란 곡이 다운타운가에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 김현식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후…

1985년은 개인 김현식에게 시련의 나날들이었다.

성공이 눈앞에 온 것과는 별개로 1982년 결혼한 부인과의 별거, 가족들의 이민... 고립감과 외로움은 극에 달했다.

물론, 음악적인면에서는 한층 성숙한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고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박성식, 장기호 등과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해 안정적인 구도의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방송 보다 라이브 무대에서 주된 활동을 했었다. 그의 가창력과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의 탄탄한 연주력은 김현식 음악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낳았다.

 

    "얼굴 없는 가수"로 불리우던 그의 전성기는, <비처럼 음악처럼>이 수록된 3집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비처럼 음악처럼> 말고도 <빗속의 연가>, 고 유재하의 곡인 <가리워진 길>, <쓸쓸한 오후> 등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특유의 블루스 소울 창법이 두드러진 3집의 매력은 대중성과 음악성이 적절히 고려되어 있는 곡 자체에도 있지만, 안정적인 호흡으로 일관하고 있는 김현식의 목소리에도 크게 기대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마초 파동…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삭발을 하고 대중들과 다시 만났다. 가슴 시리게 부르는 그의 노래는 팬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고,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1988년 나온 4집은 <언제나 그대 내곁에>가 수록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 노래를 불렀던지…)

4집은 예전에 비해 더 애절하고 끈끈해진 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는 노래들로 차 있었다.

 

    김현식은 이 시기에 자신의 정규 앨범 이외에도 신촌블루스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고, 강인원 주도의 옴니버스 앨범 [비오는 날 수채화]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배반하며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었고, 늘 손에서 떼지 못하던 술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워가고 있었다.

 

    1990년,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한창 퍼질 무렵… 그는 자전적인 얘기를 담은 앨범 [넋두리]를 내놓았고, 이후 바로 들어간 6집 앨범 녹음 중에 사망한다.

1990년 11월 1일… 서른 둘의 나이였다.

 

    김현식의 음악을 듣고 그가 천재라거나, 음악성이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을 하기는 어렵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작곡 능력이 뛰어나다고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노래할 때의 그의 음성만은 다른 어떤 누구와도 차별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는 단순히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혼신을 다해서 열정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노래에 들어있는 것은, 서양의 블루스와 닮았지만 또다른, 어떤 한이며 열정이며, 광기다. 끈적끈적한 한숨과도 같은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덧없는 인생이 떠오른다…

 

… 사라진 모든 것들은 왜 늘 더크게 가슴에 얹히는 것일까.

 

현식이형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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