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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1일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시편97(98)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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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7월 21일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교회학자, O.F.M.Cap. Saint Lawrence of Brindisi
라우렌시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마도 그의 탁월한 언어 능력일것이다. 그는 자기 조국 이탈리아에 관한 완벽한 지식과 더불어 라틴어,히브리어,그리스어,독일어,보헤미아어,스페인어 그리고 불어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독해력과 회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1559년 7월 22일에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태어나 1619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줄리어스 시저’ 혹은 ’이탈리아의 시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부모님이 일찍 별세했으므로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베니스의 성마르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6 살에 베로나에서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철학과 신학 그리고 외국어에 급속한 진전을 이루었으며 라우렌시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성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여러 외국어를 연구한 뒤 23세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언어 능력 덕분에 원문으로 된 성서를 연구할 수 있었다.
서품 후 처음에는 국내의 주요 도시, 북 이탈리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수도회의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둥 여러 고위 직책을 맡았으나 유다인 개종을 위해 주로 활동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의뢰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에게 설교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히브리어 실력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유대교의 랍비들도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카푸친 수도회는 1956년 그의 저서 15권의 편찬을 끝냈다. 15권중 11권은 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주로 그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성서 인용문으로 되어 있다.
1598 년 라우렌시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11 명의 동료와 함께 파견되었다. 프라하와 비엔나 그리고 고리지아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여 이 수도원이 후일에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티리아 관구로 발전케 했다. 제국 내에 있는 동안 그는 황제로부터 투르크인들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톨릭 제후들을 조직시키는 임무를 맡아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602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보니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성격의 특징은-어쩌면 그같이 재능 있는 학자에게서는 기대되지 않는 -그가 사람들의 욕구에 민감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31세에 토스카나 대교구의 카푸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명함과 인간애와 의무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 기술 등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동료 카푸친 수사들로부터 1602년에 전수도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총장직에 있으면서 그는 수도원의 지역적 확장과 성장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외교적,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황제 혹은 교황의 특사 및 평화 중재자로 임명되어 큰 공을 세우는 등 이름난 설교가로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설교에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는 중에서도 그는 가톨릭 신앙을 해석하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창세기와 에제키엘서의 주석서이다.
그의 조국 나폴리 왕국의 평화를 위해 스페인 왕을 방문하려고 리스본으로 여행을 하였는데, 그는 리스본에서 1619년 중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1881년 시성되었고, 1959년에 요한 23세는 1960 년 라우렌시오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인간 욕구에 대한 민감함과 성서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통해 그는 20세기 그리스도교인에게 설득력 있는 하나의 생활 양식을 제시해 준다. 라우렌시오는 봉사해 주기를 요구하는 이들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졌고 또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 생활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지상권에 대한 스코더스파 학자의 가르침.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분은 사랑을 공유함으로써 선을 증명하기를 원하고 계시며, 강생은 바로 그분의 선과 사랑과 영광을 증명해 주는 최고의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물 앞에 그리고 그분 자신을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모든 것은 그분에게 속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중에 최초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온 인류는 창조된 세상과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그 근거와 의미를 찾게 된다. 더구나 이것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교회 박사인 라우렌시오의 카푸친 교육에 관한 강연회에서’ 워싱턴 D.C.)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의 강론에서 (Sermo Quadragesimalis 2 Opera omnia 5,1, nn. 48.50.52)
복음 전파는 사도적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과 함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사와 동등한 우리 영적 생명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 생명의 양식으로서 성령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은총과 사랑은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 말씀의 전파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듣는 데서 오고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 육신적 생명을 위해서 씨 뿌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하느님 말씀의 전파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러 나간 사람은 정의의 전파자입니다. 정의의 전파자는 어떤 때 하느님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하느님 친히 정의의 전파자가 되셨다는 것을 성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내려와 정의의 법을 모든 백성에게 공포하셨을 때 그러했습니다. 또 어떤 때 전파자는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통곡의 처소에서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의 법을 깨뜨린 것에 대해 백성들을 꾸짖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찢기어 목소리 드높여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모세도 모압의 벌판에서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전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오셨고 그분은 이전에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이 일을 계속하도록 사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사도의, 천사의, 그리스도의, 그리고 하느님의 직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선으로 너무도 충만하여 마치 온갖 좋은 사물의 보고와도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 희망, 사랑, 모든 덕, 성령의 모든 은혜,복음의 모든 지복 직관, 모든 선업, 이승에서의 모든 공로 그리고 천국의 모든 영광이 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지성의 빛이요 의지의 불로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내적 인간에게 있어 그 말씀은 빵이요 음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밀봉의 꿀보다 더 달콤한 빵이고 우유나 포도주보다 더 나은 음료입니다. 영혼에게 있어 그것은 공로의 영적 보고이며 따라서 황금 또는 보석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은 악으로 인해 완고하게 굳어진 마음을 두드리는 망치이고, 육신과 세상과 마귀에 대항하여 온갖 죄를 죽여 버리는 칼입니다.
그러나 16세기의 이 다재다능한 사람이 선택한 직업은 위의 것과 전혀 다른 성향의 드림팀의 팀원이 되는 것을 수반했는데, 그 대안적인 드림팀은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했던 '카푸친 작은 형제회'라는 '천상대왕의 음유시인들의 악단'이었다. 이 형제회의 단원이자 그 형제들의 섬기는 지도자로서 그는 유럽 대륙 여기저기를 맨발로 돌아다니며, 신성로마제국 도처에 성당들과 수도원들을 설립했다. 그는 사람들을 복음화 시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필요할 땐 그들을 바로잡아주고, 또 언제나 그들에게 영감이 되어주었다. 또 접시를 닦기도 했으며, 미사를 겸손하게 집전했다. 그 외에도 그는 거의 끊임없이 기도하며 형제들과 그에게 도움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요구에 기꺼이 귀기울여주곤 했다. 그는 결국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채 구호 임무 중에 낯선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죽어야 했다.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자 다재다능한 천재인 이 박식한 카푸친 형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한때 총대리였던 바로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이다. 1783년, 비오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그는 188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대축일'에 레오 13세 교황으로부터 시성을 받았다. 그랬다가 그는 1959년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Doctor Apostolicus(사도적교회 학자)'라고들 하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어 있다. 에스파냐 국왕의 칙령에 따라 라우렌시오의 시신은 에스파냐 갈리시아 주의 '비야프랑란카 델 비에르토(Villafranca del Bierzo)'의 '맨발의 프란치스칸 수녀들'의 수도원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가난 부인에 반하여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가 되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말씀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다 교황의 요청에 따라 라우렌시오 형제는 1592년과 1594년에 두 번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에 설교했는데, 이에 유대인들은 그의 열성뿐만 아니라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성경을 유창한 히브리어로 해설하는 그 능력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후년, 선교여행 중에 그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남독일과 체코공화국 영토인 신성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주요한 봉사였고, 최대의 특권이었다. 강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육신적 생명을 위해서 씨 뿌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느님 말씀의 전파가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는 사도의, 천사의, 그리스도의, 그리고 하느님의 직무입니다." 이 작품 외에도, 라우렌시오 형제는 창세기 첫 12장에 대한 해석서와 하느님의 히브리어 이름에 대한 논문도 썼다. 그리고 여러 권의 논쟁집과 기사를 썼지만, 그 중에 마르틴 루터의 모든 가르침을 반박하는 'Lutheranismi hypotyposis (루터교의 박진)'라는 저서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 외 다른 작품들에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들을 위해 쓴 몇몇의 자선전적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강론들은 이탈리아어로 썼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주석들이 첨부된 라틴어 원문들이다.
지역 필요에 맞추어진 다양한 복음화 접근법 권력의 회랑과의 협상 헝가리 '쉐케스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의 교전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도교 군대의 야전 지휘관들은 후퇴할 것을 충고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 형제는 그 충고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승리를 향하여 계속 나아가기를 재촉했으며, 불을 뿜는 듯한 열변으로 맥 빠진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결국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린 채, 말을 타고 치열한 전투 속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진격하라! 진격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라며 연거푸 외쳐댔고, 마침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 그리스도교 군대는 터키군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루터교 군인들마저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터키대군을 패배로 몬 라우렌시오 형제의 그 사기고취의 노력은 막판의 중대한 승리를 거두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외교관이자 신앙의 옹호자
그 시절 카푸친들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촉진하는 중대한 영적 개혁을 신장시키기 위해 온 교회에 대한 봉사에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1575년, 라우렌시오는 수도 서약을 함으로써 카푸친 형제가 되었고, 1582년에는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 학업에 매진하던 시절, 그분은 타고난 걸출한 지적 능력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희랍어, 히브리어와 시리아어 같은 고대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독일어 같은 현대어도 쉽게 터득했습니다. 그분은 위의 언어들에 이탈리아어와 일찍이 모든 교회성직자들과 교양인들이라면 유창하게 말하곤 한 라티인어에 대한 지식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언어에 대한 능숙함 덕분에, 라우렌시오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강렬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서 그분은 성경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문헌에도 철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랍비들조차도 그것에 놀라워하며 감탄했고, 그분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성경과 교부학에 전통한 신학자로서, 그분은 또한 종교개혁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독일에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모범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하고 차분한 설명으로 그분은 마르틴 루터가 문제 삼았던 모든 신앙조항에 대한 성경학적, 교부학적 근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의 수위권, 주교직의 신적 기원, 사람의 내적 변모로 (이루어지는) 의화, 구원을 위한 선행의 필요성이 이에 포함됩니다. 라우렌시오가 누린 성공은 우리가 오늘날 그토록 큰 희망으로, 교회의 성전(聖傳)에 따라 읽힌 거룩한 성경과의 대면은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포기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은 ‘Verbum Domini(즉 주님의 말씀)’ 교황 권고 (No 46)에서 내가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생활과 자신들이 고백한 신앙 사이의 일관성에로 되돌아올 것을 상기시키려 연설했던, 라우렌시오의 설득력 있는 말씀에서는 대단한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가장 순진한 그 신자들조차도 유익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점은 16세기와 17세기에, 자신들의 삶의 증거와 가르침으로 사회에 깊이 침투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의 개신에 이바지했던 카푸친들과 또 다른 수도회들의 큰 공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새 복음화에는 잘 준비된 열정적이며 용감한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빛과 그 아름다움이 윤리적 상대주의와 종교 무관심의 문화적 성향에 우세를 차지하게 하여, 온갖 사고방식과 행동방식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에로 변모될 것입니다.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가 큰 책임을 수반하는 부담스러운 다른 직무들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과 또한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존경받고 지칠 줄 모르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신학교수였고 수련장이었으며, 여러 번 관구봉사자와 총의결회원이었다가, 결국 1602년부터 1605년까지 총봉사자였습니다. 그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라우렌시오는 특출하게 열렬한 영성생활을 함양했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에 동화되고 감화되곤 하여, 자주 수 시간이 걸렸던 그 거룩한 미사에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최근 ‘사제의 해’ 동안에 자주 강조되었듯이, 각 사제는 성인들의 그 학교에서 자신의 내적 삶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활동주의의 위험성, 즉 직무의 깊은 동기를 잊은 채 활동하기의 그 위험성을 피할 수 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출생 도시인 브린디시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들과 신학생들에게 말했을 때에, 나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기도의 순간은 사제 생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보다 커다란 효과로 행사하여 사제의 직무에 열매가 맺게 해줍니다. 기도는 공동체에 해줘야 할 첫째가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기도의 순간들은 우리 생활에서 참된 우선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참 최우선이십니다. 우리들이 우리 주님과 기도의 친교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필요한 시간을 따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게다가, 라우렌시오는 오해의 여지가 없는 그분만의 열정으로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기도 생활을 함양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또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다음과 외칩니다.“오! 우리가 이 사실을 심사숙고했더라면!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말할 때에 진정으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현존해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과 정신만으로 기도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정말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또 현존하시고 들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사실 우리의 간청들을 기꺼이 최대의 기쁨으로 응해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성 프란치스코의 이 아들의 대업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평화를 위한 그분의 활동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 위협을 받고 있던 유럽 국가들 간의 논란을 불식시키고 화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교황 성하들과 가톨릭 제후들은 라우렌시오에게 중요한 외교 사명들을 빈번히 맡겼습니다. 그분이 누렸던 도덕적 권위는 그분을 찾고 듣고자 하는 인물들의 고문이 되게 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의 시절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세상은 평화가 필요하고, 평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남녀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늘 평화의 원천이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라우렌시오는 지방 정부 당국의 압제를 받는 나폴리 신민들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필립보 3세 에스파냐 국왕을 만나러 리스보아에 갔었고, 바로 이 외교적 사명 중에 그분은 1619년, 거기에서 지상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1881년에 그분은 시성되었고, 그분의 탄생 4백주년이었던 1959년, 그분의 활기차고 열렬한 활동과 폭넓고 조화로운 학식 때문에 'Doctor Apostolicus', 즉 '사도적 교회학자'라는 명칭을 복자 요한 23세 교황께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에게 이 인정이 허락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분이 성경주해와 신학과 설교에 관한 수많은 저작물의 작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글들에서 그분은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표명인, 육화의 신비에 집중된 구원사에 대한 유기적인 설명을 내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되는 마리아론 신학자요, 'Mariale(즉 ‘마리아론’ 또는 ‘마리알레’)라고 제목이 붙여진 성모님에 대한 강론집의 작가로서, 그분은 동정 마리아만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성모님에 관하여 당신의 무염시태와 그리스도 구속 사업과의 협조가 사실임을 분명히 단언합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는 세련된 신학적 감성으로 ‘믿는 이’의 삶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가리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셋째 위께서 복음의 메시지를 기꺼이 살아가려 하는 우리의 헌신을 당신의 은혜로 비추어 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라우렌시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우리가 대단히 쉽게 그리고 즐겁게 하느님의 계명들을 준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하느님 율법의 멍에를 부드럽게 해주시고 그 율법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모든 활동이, 몸소 광범위하게 암기했던 거룩한 성경에 대한 엄청난 사랑에,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수용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주는 내적 변모를 이룬다는 자신의 확신에 고취된 것임을 강조하며,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 짧은 설명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지능에 빛이 되고 의지에는 불이 됩니다. 그 말씀은 주님 영의 은총의 삶을 사는 내적인 사람에게는 꿀보다 달콤한 빵이요, 포도주보다, 또 우유보다 더 나은 물이 됩니다.. 그 말씀은 고집스러운 악습으로 인해 굳혀진 마음을 거슬리는 망치입니다. 또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 육과 세상과 마귀를 거스르는 칼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모든 활동이 주님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는 거룩한 성경을 사랑하고 매일의 기도로써 주님과의 우정을 기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증거가 빛을 발하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샘에서 물을 떠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 "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던 작은 형제회의 최후의 개혁으로서
형제애 - 카푸친들은 형제들이다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수도회로서 우리 카푸친들은 사실 우리 형제회를 하나로 묶어 주시는 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시다. 참 형제로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형제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형제애는 우리 자신들에게만 제한되있지 않으며
관상 -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제들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는,
“하느님께 드릴 기도는 사랑의 호흡으로서, 성령의 활동에서부터 비롯하여
우리 카푸친들의 관상기도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 성체에 중심이 되는 우리 카푸친들의 기도도 이런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긴밀히 체험하며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게시판676번.1403번.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축일: 9월17일. 게시판 644번.1369번
*카푸친수도회성인들Capuchin Franciscans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시편97(98)편
San Lorenzo da Brindisi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21 luglio - Memoria Facoltativa Brindisi, 22 luglio 1559 - Lisbona, 22 luglio 1619 Giulio Cesare Russo (questo era il suo vero nome) nacque a Brindisi - sul luogo in cui egli stesso volle che sorgesse la chiesa intitolata a Santa Maria degli Angeli - il 22 luglio 1559, da Guglielmo Russo ed Elisabetta Masella. Perse il padre da bambino e la madre ch'era appena adolescente. A 14 anni fu costretto a trasferirsi a Venezia da uno zio sacerdote, dove proseguì gli studi e maturò la vocazione all'Ordine dei Minori Cappuccini. Assunse il nome di Lorenzo e il 18 dicembre 1582 divenne sacerdote. Nel 1602 fu eletto Vicario generale. Nel 1618, sentendosi prossimo alla fine, voleva tornare a Brindisi, ma i nobili napoletani lo convinsero a recarsi dal re di Spagna Filippo III, per esporre le malversazioni di cui erano vittime per colpa del viceré spagnolo Pietro Giron, duca di Osuna. Il 22 luglio 1619 padre Lorenzo morì a Lisbona, forse avvelenato. Fu beatificato nel 1783 da Pio VI; canonizzato nel 1881 da Leone XIII; proclamato dottore della Chiesa, col titolo di doctor apostolicus, nel 1959 da Giovanni XXIII. (Avvenire)
Etimologia: Lorenzo = nativo di Laurento, dal latino
Martirologio Romano: San Lorenzo da Brindisi,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entrato n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svolse instancabilmente nelle regioni d’Europa il ministero della predicazione; esercitò ogni compito in semplicità e umiltà nel difendere la Chiesa contro gli infedeli, nel riconciliare tra loro i potenti in guerra, nel curare il governo del suo Ordine. Il 22 luglio morì a Lisbona in Portogallo.
(22 luglio: A Lisbona in Portogallo, anniversario della morte di san Lorenzo da Brindisi, la cui memoria si celebra il giorno precedente a questo). Ascolta da RadioVaticana:
Ascolta da RadioRai: Ascolta da RadioMaria: Giulio Cesare Russo nacque da Guglielmo Russo ed Elisabetta Masella il 22 luglio 1559. Allorché intraprese gli studi nelle scuole esterne dei Francescani Conventuali di San Paolo Eremita in Brindisi, era già orfano del padre, scomparso dopo il 1561 e prima del 1565. Tra il 1565 e il 1567 prese l'abito dei conventuali e passò dalla scuola esterna a quella per oblati e candidati alla vita religiosa. In questo periodo tradizioni variamente riportate collocano le prime sortite pubbliche del futuro santo; il riferimento è all'uso dei Conventuali di far predicare i fanciulli in determinate solennità.
Il futuro santo, orfano ora anche di madre, è in notevoli difficoltà economiche. I parenti, fra questi Giorgio Mezosa suo insegnante presso i Conventuali, non pare se ne prendessero molta cura; è forse per questo che Giulio Cesare, quattordicenne, si trasferisce in Venezia presso uno zio sacerdote che dirigeva una scuola privata e aveva cura dei chierici di San Marco. La scelta, infatti, gli consente di proseguire i suoi studi e maturare la vocazione all'ordine dei Minori Cappuccini. Il 18 febbraio 1575 gli è concesso l'abito francescano e gli è imposto dal vicario provinciale, padre Lorenzo da Bergamo, il suo stesso nome: da quel momento sarà padre Lorenzo da Brindisi. Mandato a Padova a seguire i corsi di logica e filosofia e a Venezia quello di teologia, il 18 dicembre 1582 diviene sacerdote. La sua ascesa nell'ordine è rapida; nel 1589 è vicario generale di Toscana; nel 1594 provinciale di Venezia; nel 1596 secondo Definitore Generale; nel 1598 vicario provinciale di Svizzera; nel 1599 ancora Definitore Generale. In questo stesso anno è posto a capo della schiera di missionari che i cappuccini, su sollecitazione del pontefice, inviano in Germania. Qui, a divulgare e ad accrescere la sua fama di santità contribuì un episodio avvenuto nell'ottobre del 1601; il brindisino volle essere uno dei quattro cappellani necessari per assistere spiritualmente le truppe cattoliche nella campagna in atto contro i turchi ed il 9 ottobre giunse ad Albareale, l'attuale Székeshefer vár in Ungheria, ove era accampato l'esercito imperiale. Padre Lorenzo, quando il nemico sferrò l'attacco, fu d'esempio sia con la parola che coi comportamenti. I turchi lo ritennero un negromante e un mago, i cristiani un santo. Il 24 maggio 1602, quasi all'unanimità, padre Lorenzo viene eletto vicario generale dell'ordine; con l'alta carica gli è affidato il compito di visitare tutte le province oltre le Alpi. Nel triennio del generalato, il 1604, può tornare a Brindisi ove decide la costruzione di una chiesa sotto il titolo di Santa Maria degli Angeli con annesso monastero per le claustrali. Finanziatori dell'opera, che doveva svilupparsi sul luogo stesso in cui era la casa natale del santo, saranno il duca di Baviera, la principessa di Caserta e altre personalità che il cappuccino aveva avuto modo d'incontrare durante le sue missioni in Europa. Più volte, dopo il 1604, pensa di tornare a Brindisi e nel 1618 vi è ormai diretto quando è costretto a mutare itinerario e fermarsi a Napoli. Qui è convinto dal patriziato napoletano a recarsi in Spagna per esporre al re Filippo III le malversazioni del viceré don Pietro Giron duca di Ossuna. Il 25 maggio 1619, evitati sicari e ostacoli d'ogni genere, padre Lorenzo raggiunge il re a Lisbona; ricevuto il giorno seguente, a conferma delle sue parole soggiunse che era sicuro di ciò che riferiva quanto del fatto che presto sarebbe morto e che il re, se non avesse provveduto al bene dei propri sudditi, lo sarebbe stato entro due anni. Il 22 luglio del 1619, forse avvelenato, il brindisino moriva; il 31 marzo 1621, giusto l'ammonimento, si spegneva Filippo III che aveva continuato a favorire di fatto l'Ossuna. Padre Lorenzo sarà beatificato nel 1783 da Pio VI, canonizzato nel 1881 da Leone XIII, proclamato dottore della chiesa, col titolo di doctor apostolicus, nel 1959 da Giovanni XXIII. -------------------------------------------------------------------------------- Frate Lorenzo Russo è a Piacenza malato; grave, ma ancora vivo. Anzi, guarirà. Ma intanto il duca Ranuccio I di Parma si fa già promettere dai Cappuccini la consegna della salma, da tenere come reliquia. Questo accade nel 1616. Nel 1619 il frate muore a Lisbona, in casa di don Pedro di Toledo (già governatore spagnolo di Milano), e questi vuole il suo corpo per mandarlo a un monastero della Galizia fondato da sua figlia. D’altra parte già nel 1601, alla battaglia di Albareale (poi Székesfehérvàr, in Ungheria) contro i Turchi, molti soldati imperiali lo credevano un essere soprannaturale, vedendolo passare disarmato e illeso tra frecce, pallottole e scimitarre, per soccorrere feriti e confortare morenti. Questo frate Lorenzo Russo da Brindisi è principalmente uno studioso, ma le vicende del tempo fanno della sua vita un’avventura continua. Orfano dei genitori a 14 anni, è accolto da uno zio a Venezia. Studia a Verona e a Padova, poi ancora a Venezia. Si è fatto cappuccino, nel 1582 è ordinato prete, nel 1586 è maestro dei novizi, e poi avrà sempre cariche nell’Ordine, fino a quella di Generale. Lui è uomo da libri, conoscitore eccezionale della Bibbia (che può citare a memoria anche in ebraico), e diviene famoso come predicatore, appunto per la vasta cultura, aiutata poi dalla bella voce e dalla figura imponente. Lo mandano sulle prime linee più difficili: in Boemia, per esempio, dove in gran parte la popolazione si è staccata dalla Chiesa cattolica. Accolto ostilmente, si dedica a un’intensa predicazione, sostiene controversie, guida l’opera dei Cappuccini. L'evidente coerenza tra le sue parole e la sua vita lo fa rispettare anche da autorevoli avversari. Quando celebra la messa, poi, lo si vede davvero “rivivere” il sacrificio della Croce rinnovato sull’altare: si può respingere la sua fede, ma non si resta indifferenti di fronte al suo modo appassionato di sentirla e di manifestarla. I papi e vari prìncipi europei gli affidano continue missioni diplomatiche. Per tre anni frate Lorenzo rappresenta la Santa Sede in Baviera. E i napoletani, che non ne possono più del duca di Osuna (viceré spagnolo), vogliono lui come loro ambasciatore presso Filippo III di Spagna. Appunto nel corso di questa missione lo coglie la morte; e immediata si divulga la voce della sua santità. La causa canonica, però, viene bloccata dai decreti di papa Urbano VIII (1623-1644) che modificano i procedimenti per i santi. Riprenderà nel XVIII secolo, concludendosi con la canonizzazione ad opera di Leone XIII nel 1881. I suoi scritti rimangono inediti fino all’edizione integrale negli anni 1925-1956, in seguito alla quale Giovanni XXIII proclamerà san Lorenzo da Brindisi Dottore della Chiesa, con la qualifica di doctor apostolicus. Autore: Domenico Agasso
Fo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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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1-02-01 Saint Lawrence of Brindisi Also known as Brother Lorenzo Julius Caesar Rossi Laurence of Brindisi Lorenzo da Brindisi Memorial 21 July formerly 6 July formerly 23 July Profile
Son of Guglielmo de Rossi and Elisabetta Masella. He felt an early call to religious life, and was educated by the Friars Minor Conventuals of Brindisi, Italy. His father died when the boy was twelve. Studied in Venice. Joined the Capuchin Friars in 1575 at age 16, taking the name Brother Lorenzo. Studied theology, the Bible, French, German, Greek, Spanish, Syriac, and Hebrew at the University of Padua; he was a brilliant student, known for his facility with languages. Priest. Taught theology. Served as linguist and military chaplain. Famous, effective and forceful preacher in any of his several languages. Founded convents of Vienna and Graz in Austria, and in Prague, Czech Republic. Wrote catechisms. Chaplain of the army of the Holy Roman Empire in 1601. Rallied the German princes to fight a superior Turkish force, and was asked to lead the army into battle at Stuhlweissenburg (modern Székesfehérvár, Hungary) carrying no weapon but a crucifix; the Turks were completely defeated. Master general of his order from 1602 to 1605; he was the choice for another term, but turned it down. Carried out important and successful diplomatic peace missions to Munich, Germany and Madrid, Spain. Assigned in 1605 to evangelize in Germany, where he had great success. Convinced Philip III of Spain to join the German Catholic League. Commissary general of his order for the provinces of Tyrol and Bavaria in Germany. Spiritual director of the Bavarian army. Tended to fall into ecstasies when celebrating Mass.
In 1956, the Capuchin Order compiled fifteen volumes of his sermons, letters and writings. Proclaimed Apostolic Doctor of the Church by Pope John XXIII in 1959.
Born 22 July 1559 at Brindisi, Italy as Julius Caesar Rossi Died 22 July 1619 at Lisbon, Portugal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cemetery of the Poor Clares on Villafranca, Spain Beatified 1 June 1783 by Pope Pius VI Canonized 8 December 1881 by Pope Leo XIII Patronage Brindisi, Italy Representation
leading the Christian army against the Turks receiving the embrace of the Child Jesus Addtional Information
Be A Friar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ncyclopedia, by F Candide Catholic Online Doctors of the Church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Litany of Saint Lawrence of Brindisi New Catholic Dictionary On the Immaculate Conception, by Saint Lawrence of Brindisi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Wikipedia Women for Faith and Family Readings
God is love, and all his operations proceed from love. Once he wills to manifest that goodness by sharing his love outside himself, then the Incarnation becomes the supreme manifestation of his goodness and love and glory. So, Christ was intended before all other creatures and for his own sake. For him all things were created and to him all things must be subject, and God loves all creatures in and because of Christ. Christ is the first-born of every creature, and the whole of humanity as well as the created world finds its foundation and meaning in him. Moreover, this would have been the case even if Adam had not sinned. - Saint Lawrence of Brindisi MLA Citation
“Saint Lawrence of Brindisi”. Saints.SQPN.com. 6 March 2010. Web. {today’s d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