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모습

공세리성지 성당 (09/1/31~2/1 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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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주 [hwangbongju] 쪽지 캡슐

2009-02-03 ㅣ No.1607

 

 

 

공세리성지 성당 (09/1/31~2/1 피정)

 

 


공세리성당은 오래 전부터 영화, 드라마, CF 등에 단골로 등장해 온 장소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비롯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맘마> 등에서 그 모습을 봤던 이들은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멋진 곳이 있던가!' 감탄했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을 게다. 또 어떤 이들은 가수 안치환의 뮤직비디오 ‘가을 은행나무 아래서’에서나, god의 뮤직비디오에서 나온 그 모습을 기억하리라.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인주면 공세리 언덕 위에 서 있는 공세리성당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빨간 벽돌의 고딕풍 성당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한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성당 주변을 에워싼, 수령 몇 백 년을 넘긴 고목들의 모습도 이 곳이 예사롭지 않은 세월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경내에는 본당과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32위 순교자 현양비와 현양탑, 박 씨 3형제의 묘소도 있다. 박 씨 3형제의 묘는 성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서 발굴해 1988년 성당 구내로 모셨다. 이들은 공세리성당 출신의 박의서(사바), 원서(마르코), 익서(세례명 미상)이며 1867년 정묘년에 순교했다. 세 사람의 묘 옆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가 있고, 성당 건물 주위에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묵상과 기도를 돕는다. 1990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수마음 피정의 집’을 완공해 성지 순례객들이 피정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최근 자전거 성지순례를 위해 자전거 50대를 비치하고 있다. 공세리성지에서 솔뫼에 이르는 22km의 길은 아산방조제의 바다를 바라보며 삽교천을 지나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이어진다. 편도 2시간에 이르는 그 길은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수 십리를 걸었던 그 길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아 보자. 몸과 마음에 쌓여 있는 찌든 기운들이 훌훌 떨쳐져 나감을 느낄 수 있다.  

 

박물관.
 이 같이 세곡을 임시 보관하던 자리가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기지로 바뀌었다.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드비즈 성 신부가 이 곳에 와서 성당을 세운 것이다. 1895년 당시에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으나 1897년 창고를 헐고 구 성당 건물(구 사제관)과 구 사제관 건물(현 회합실, 창고)을 지었다. 초대 본당 신부이던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해 1922년 10월8일 현 성당을 완공했다.



 그는 종교활동 외에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했으며 뒷날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해지는 이명래(요한)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했다. 



 얼마 전 개관한 공세리성지·성당 내 박물관에는 당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교우촌 생활모습, 신유-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직자들의 활동모습을 보여준다.

 공세리성당은 1890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이자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118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충남 지정문화재 144호로 보호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이 곳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해시대에는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였다. 현재 성당이 자리한 9,5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창고가 있던 공세곶 창고지로도 유명하다. 조선조 성종 9년(1478년)에 이 곳에 세곡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중종 18년(1523년)에 80칸의 창고를 짓고, 영조 38년(1762년)에 폐창이 될 때까지 15척의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삼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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