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자료실

2010.4.22 아름다운 쉼터(수염 깎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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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4rang2] 쪽지 캡슐

2010-04-22 ㅣ No.364

수염 깎는 방법(최인호, ‘꽃밭’ 중에서)

어느 날 아침 수염을 깎다 말고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수염을 깎았는지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 적이 있다. 지금껏 나는 항상 수염이 난 방향의 반대쪽으로 깎아 왔었다. 그렇게 되면 억센 수염의 뿌리가 날카로운 면도날에 의해서 잔인하게 베어져 나가는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남몰래 밀도살하는 정육업자가 짐승의 털을 깎는 것과 같은 스릴마저 느끼게 한다. 잔인하게 수염을 깎고 나면 턱 근처엔 항상 칼에 베인 상처가 남게 마련이다. 더구나 일회용 면도기들은 조잡하게 만들어져서 항상 입 근처에 상처를 남긴다. 한바탕의 밀도살이 끝난 뒤 스킨을 바르면 상처로 스며드는 미안수의 강렬한 자극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어제까지 내가 깎아 왔던 면도 방법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생전 처음 면도날을 수염이 난 방향을 따라서 결대로 밀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염은 마치 익숙한 주부들이 사과껍질을 벗기듯 부드럽게 깎여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어제까지의 수염 깎는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육십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방법으로 수염을 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내 입가에는 면도날로 인한 상처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수염을 깎는 매우 사소한 일상사마저도 나는 제대로 된 방법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떠밀리듯 살아왔음이 아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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