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성당 게시판

떡볶이에서 피자로...초코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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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신 [jjong1029] 쪽지 캡슐

2000-12-15 ㅣ No.5630

이글은 한국 기독교 음악 음반 기획자인 서우석님의 칼럼을 가져온

글입니다.

 

기독교의 문제점을 꼬집어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우리 천주교에서도

문제점으로 보고 있는것 같아서 올리며 특히 교사단에서 많은 공감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떡복이에서 피자...쵸코파이

 

 

  6.25 전쟁은 남과 북이 갈려 이산가족의 아픔 외에도 한국문화의 근본적인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일제시대와 다르게 기독교 문화도 선교사들의 활발한 활동에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우리네의 근본적인 음식문화도 짧은 시간 내에 급한 한국사람들 성격을 더 급하게 바뀌어 놓았다. 왜냐하면 피난시절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빨리 먹고 빨리 움직여야 하고 양식이 많지가 않아 먹을 때 한꺼번에 많이 먹어야 한다는 긴장과 부담감을 평소에 갖게 되었다. 이런 기본적 생존권에 긴장을 갖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 교회에서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때 떡도 주고 빵도 주고 연필도 주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축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특히 한국교회에는 서로 나누어주고 받는 문화보다는 일방적으로 받는 "공짜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교회에서는 단체친교문화가 아직도 상당히 강하다. 단체친교라 함은 빵, 과자, 과일, 음료수등을 둥그렇게 쌓아놓고 먹는 것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1980년 중반부터인가 학생들의 각각 달라진 개성으로 인한 탓인지 단체친교문화는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각각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개별적인 만남을 갖기 시작하면서 빵집과 탁구의 다음 대안으로 선생님들과 전도사님이 주축이 되어 학생들과 삼삼오오 섞여서 떡복이를 먹는 것은 하나의 상식으로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명식 1집의 ’승리’라는 곡의 처음 시작 부분의 멘트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떡복이 먹으러 가자’라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만큼 떡복이는 향수의 매개체가 되기에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떡복이는 그 당시의 나이가 있는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양보였을 것이다. 외식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집밖에서 밥 외에 다른 음식을 먹고 배를 불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납득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양보는 그 당시의 십대들과 원활한 대화를 위한 하나의 노력일 것이다. 주로 이때 선생님들과의 친교 분위기는 학생들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과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모임들이 많아 나름대로의 예의가 있었다.

 

 

  이젠 떡복이를 먹고 자란 세대들이 이제는 어엿한 선생님과 목회자가 되었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음식문화 속에 또 다른 막강한 적이 나타났다. 그것은 피자와 스파게티이다. 떡복이와는 가격에서부터 차별이 되는 패스트푸드이다. 입맛과 시간이 변한 만큼 십대들의 성향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가지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십대들의 감성을 음식으로 붙잡기는 이제는 역부족임을 느낀다. 또 다른 음식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로운 대안이 아닌 100원짜리의 쵸코파이의 情일 것이다.

 

 

  성가대 연습과 간식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연습이 끝난 다음 요구르트와 먹는 쵸코파이의 맛.... 떡복이와 피자는 계속 건재하겠지만, 물가가 올라도 200원으로 올리지 못하는 오리온 쵸코파이의 아픔은 가격을 포기하고 情이라는 카피로 항상 우리 곁에 남아 있듯이.... 아직까지도 대중이 원하는 것은 100원짜리 情이 담긴 쵸코렛 묻은 추억이 한입에 쏘옥 들어가는 쵸코파이 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군대 내에서는 쵸코파이가 "간식의 황제"자리에 굳건히 情이라는 이름으로....우뚝 서있다. 군대에서 쵸코파이는 PX에서 판매는 되지만, 쵸코파이의 유일한 보급 통로는 교회일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 각각 군대에서의 쵸쿄파이맛은 언제나 먹는 그 감회는 다른 맛이 느껴진다. 봄에는 부푼 가슴으로 더 푸르게 ...여름에는 더위에 입맛이 없을때....가을에는 둥근달을 보며 가족의 정을 생각하고... 겨울에는 위문품과 교회에서 받는 쵸코파이의 차갑지만 그 안에 파이가 흐르듯 따뜻한 情이 흐른다. 라고 나는 믿는다.

 

 

  정작 어려웠던 50-60년대를 살아간 우리네의 어른들보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조그마한 간식과 배려에 진정 감사를 아는 아이들이 많이 줄어 든 것 같다. 간식이라는 정확한 속뜻과 의미는 정확히는 밥 사이에 먹는 다른 음식물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교회에서 주는 간식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누신 교제가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7년 전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 성가대를 맡아 나름대로 나누고 베풀고 싶은 마음에서 분식점에 떡복이를 먹으러 갔다. 하지만, 아이들은 위아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원하는 메뉴만 시키고 (가격?과는 상관없이) 선생님이 사준다는 이 한가지 사실에 집중한 나머지 자기의 음식이 나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음식을 먹고 뿔뿔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같이 간식을 매개체로 얘기를 나누자는 것이 나의 속뜻이었는데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원했나! 그후로 성가대에는 단체회식의 대의 명분으로... 분식점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이후 군제까지 약 6년의 시절동안 아이들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슬슬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이제는 아이들의 시각과 기준에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그 동안 숫자적인 성장과 간식비에 집착과 투자를 한 조그마한 역사의 단면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간식을 사주지 않아도 더 소중한 것에 관심과 사랑이라는 코드 즉 나눔과 사랑의 코드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면 간식비용이 추가가 되지 않아도 더 많은 실질적 교육비가 투자가 되고, 선생님들과 목회자들에게는 생명의 코드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연습을 독려 할 뿐이다. 그 연습에 대한 방법은 고민 할 필요가 없고, 성령님께서는 차근히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항상 우리를 인격적으로 바라보시고 기다리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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