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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시성 청원자 8 [이도기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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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나 [sanghoo] 쪽지 캡슐

2003-11-20 ㅣ No.4021

 

 

 

8. 이도기 바오로

 

(청양 정산 1798년 7월 24일 56세) 장하치명

 

 

이도기 바오로는 1797년 정사박해로 순교한 분이다.

 

원래 그는 글을 몰라 아는 것이 없었으나 천주 신앙을 받아드린 뒤부터,

 

성령의 학교에서 사랑과 실천을 배워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 시키는데 사용했다.

 

 

청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여러 신자들이 체포된적이 있었다.

 

정조가 천주교 신자로 지목 받고 있던 정약용을 금정(청양군 대치면 금정리)

 

찰방으로 보내 신자들을 회유하도록 했고, 최양업 신부의 할아버지 최인주도

 

그 무렵 청양 다락골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도기는 청양 뿐 아니라 홍주, 은진, 공주 등지까지 복음을 전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칠갑산을 넘어 정산 땅으로 숨어들어 옹기점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자들의 연락처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데

 

온힘을 기울여 마을사람 전체가 입교하게 되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한사람이

 

"천주교 신자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 하고 위협하자 이도기는 아내가

 

피신 하라고 권고하자 하느님의 뜻을 어기려고 하지 않았다.  

 

 

또 자신을 신임하고 있던 신자들의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한 뒤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감추고 포졸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혹독한 문초를 받다가 세 번째 문초에서 현감은 "네가 배교한다면 쌀을

 

주고 상처를 치료해준 뒤에 풍헌(風憲)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겠다." 고 하였다.

 

 

이 말에

 

"나에게 정산 고을을 전부 준다해도 저는 결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포졸들이 자주 그를 보러왔으나 감시가 아주 소홀하여 도망가라고 권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망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장의 명으로 옥에 갇혔으니 그의

 

명령이 없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라고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까지

 

환해졌다.

 

 

포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문을 당하지 않으면 얼굴이 창백해져 풀이

 

죽어있고 형벌을 당하면 생기가 도는 것 같으니 참 이상하다."

 

 

결국 이도기는 1798년 7월 24일(음력6/12) 포졸들이 현감의 명령대로 그의 몸을

 

짓이겨 버렸지만 그럼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 하나가 가슴에 칼을 대고

 

그 위에 올라가자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가 콸콸 쏟아지며 운명하였다.

 

 

이튿날 현감의 명령대로 그의 시신을 매장했다.

 

7, 8일 후 정산에서 10리쯤 떨어져 사는 신자들이 비밀리에 이도기의 시신을

 

찾아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옥사장이 미망인을 찾아와 위로하기를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가 순교하던 날 밤에 큰 광채가 당신 남편의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오." 하였다.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400)

 

(순교는믿음의씨앗이되고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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