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못생긴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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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0-10 ㅣ No.5426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장이 있습니다.

"어머, 또 그 도장이에요?"

"도장 하나 새로 파시라니까요. 체면이 있지."

"어, 허허허."

진단서나 각종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마다 의사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다들 성화를 댈 만큼 초라한 목도장.

하지만 나는 20년 손때 묻은 도장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입니다.

선생님의 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입학원서를 써야 한다며 도장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교육자 가정에서 7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느라 도장 하나 새겨 주기도 힘들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던 그 때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당신의 헌 도장을 꺼내 깎아 버리고는 조각칼로 내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에이. 몰라...."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엔 아버지가 밤새 깎은 도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손때 묻어 거무튀튀한 막도장. 삐뚤빼뚤 서툰 글씨.

친구들은 모도 잘생긴 새 도장으로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는데 왜 나만 항상 남보다 못한 걸 쓰는지...

그 보잘것없는 도장을 꺼내 누가 볼 새라 살짝 찍으면서 또 얼마나 서럽고 부끄러웠는지.

내가 그 못생긴 도장에서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된 건 의대를 졸업한 뒤였습니다.

진단서에 찍을 도장을 찾다가 서랍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목도장.

그 우연한 기회에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릴 때 보았던 보잘것없는 도장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쿠. 아야.. 아야."

아버지가 조각칼로 벤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는 동안 그때 그 방안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2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급 도장도 있지만 그날 이후 나는 도장을 쓸 일이 있으면 오로지 그 못생긴 도장만을 써 왔습니다.

아버지의 숨결, 아버지의 체온으로 쓰면 쓸수록 도장이 따뜻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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