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2/06/11 토요일 미사의 영성 7 성찬의 전례 감사기도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5-09 ㅣ No.5048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2/06/11 토요일

미사의 영성 7 성찬의 전례

감사기도

 

 

말씀 대사제의 기도(요한 17,1-2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2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5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6"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이제 이들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9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11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20"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눔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선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이 잘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영적인 분이시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돈을 더 벌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풍요할수록 좋은 것이고 하느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거꾸로 장사가 잘 되면 잘 될수록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바빠질 대로 바빠져 자신의 건강도 버리고, 집안이나 이웃 관계에 신경을 쓰지 못한 채 그 장사에만 매달려야 하는데도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살기는커녕 일과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인데도 그런 상황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기도 하고 당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고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방식은 현실적이다 못해 물질적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며 그러기에 또한 이기적입니다. 다만 장사가 잘 돼, 돈이 잘 벌려야 하느님이 도와주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현실적인 이해관계 안에서 종교를 선택하거나 바꾸기도 하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하느님을 찾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분이고 그런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런 하느님은 결코 하느님이 아니며 오히려 죽어 마땅한 것입이다. 바로 이 모습을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내가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면 하느님이고 주님이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나에게 손해라도 끼칠 양이면 그분은 하느님도 아니오, 아니 내 뜻을 망치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한에 있어서만 내 하느님!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느님이 인간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어느 한 민족이나 인종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 하느님은 그들의 수호신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우상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아닙니다.

 

어떤 신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신을 믿는 이들의 삶이 바뀝니다. 신관, 즉 하느님은 누구시며 자기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이웃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느님을 섬긴다면 그들은 이웃도 이해관계 안에서만 바라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같거나 자기들에게 적어도 피해를 안 끼치는 한에 있어서의 (나와 같은) 너는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반대하거나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너는 있을 수도 없고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부족들 사이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종교와 문화, 그밖의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거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본 것처럼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형제들과 맺는 일치' 는 깊은 함수관계에 있습니다. ,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람들의 행위는 형제들과 일치하고자 하는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십자가의 수직선과 수평선과도 같습니다. 또 한편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는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출발할 때 애증의 번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질 텐데 인간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주인마저 죽이는 동료 인간들과 함께 살다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과 그런 세상의 주인에게 갖는 감정이 다분히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드리기 참 어려울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면 다행스럽겠지만 …….

 

사도 요한은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1요한 4,10)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으로 변화된다면, 우리는 쉽게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명을 달라고 청한 적도 없는데 우리에게 하느님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우리에게 부모와 가족을 주셨고, 또 이웃을 그리고 자연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나인 '''우리'가 맺는 불완전한 관계 때문에 오는 모든 죄악마저 없애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1요한 4,10)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신"(요한 17,2) 것입니다.

 

오늘날 각 민족과 국가들은 경제와 체제상의 국경선을 긋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적대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세상을 분열과 죄악으로 내 모는 일에 가세하면 악의 세력 속에 속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악이 파놓은 함정 속에 빠져 인류 공동체 전체의 안위와 관계없이 자신만 편하고 더 잘살기 위해서 스스로의 인간성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요한 17,14-15) 그래서 우리는 악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죽음으로, 실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만 같은 주님의 희생제사를 다시 우리의 몸으로 바칩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공동번역은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본능을 더욱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고 파멸시키려고 기승을 부리는 악의 유혹을 극복하고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훌훌 벗어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향해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서로 비슷한 마음과, 같은 이해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끼리 더 좋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담합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의 입장과 의견에 동조, 일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신 우리의 주님, 또 그러셨기에 인간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공번된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 주님과 일치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주님의 사도들에 의해 사도들로부터 사도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주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감사드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일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사랑으로, 같은 자세로 일치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고 그 영원한 생명을 이웃 형제들과 나눌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이러한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맺는 형제들과의 일치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또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19-20)

 

그리고 이러한 일치를 통한 사랑을 가져다 주시고 또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3.16) 그래서 성령은 주님이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거룩하게(요한 17,17 참조) 하도록 그리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요한 17,21)어 형제들에게 가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고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악마의 주문(마태 4,1-4 참조)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앞에 모인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요한 6,11)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도록 생명의 권한을 주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행동을 맞춤으로써 아버지와 일치하여 그 권한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1-43)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려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권한과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감사는 같은 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동전,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 됨.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 곧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바치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림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이룬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면에서 감사기도와 성체성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감사기도를 통해 성체성사를 드리고,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한을 모두 주시면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우리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형제들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5-26)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성체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파견된 성체성사.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사랑이란 권한을 받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하느님의 성체성사인 우리 하느님의 자녀!

 

 

성찰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의 감사기도를 통해 성체성사를 영하며, 구체적으로 어느 영혼을 구하고자 하십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9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