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약현성당 게시판

◎ 순교의 역사 :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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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심 [maria6082] 쪽지 캡슐

2005-01-23 ㅣ No.2906

 

순교의 역사 : 제3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1784년 3월에 이승훈은 북경에서 얻은 서양 과학서와 과학 기구 그리고 종교 서적과 성물을 갖고 귀국하였다. 그는 곧 이벽과 함께 교리서를 읽는 데에 몰두하였다. 특히 이벽은 많은 교리서들을 받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집에서 교리서 탐독과 조용한 묵상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활 속에서 충분한 교리 지식을 체득하고 신앙심을 강화한 후에 이승훈과 함께 선교활동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이벽은 조선 왕국에 천주교를 창설하는 데 있어서 주동적 인물이 된다.

  이 벽은 우선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중인 계급의 친지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아울러 그는 양반 계급의 친족들에게도 복음 전파를 시도하여 성공하였다. 이 벽은 1784년 4월(음력), 자기 누이의 기일에 광주 마현의 양반 학자 집안인 정씨 댁에 들렀다가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 교리가 해명해 주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파하였다. 정씨 형제는 한성에 들어온 후에 이벽의 집을 찾아가 [천주실의]와 [칠극] 등의 교리서를 얻어다가 읽어보았다.

  이 벽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동포들에게 빨리 전파되는 동시에 견고한 기반 위에 천주교의 신앙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적 인사를 영입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선교 정책이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1784년 9월(음력)에 경기도 양근 지방의 명망 높은 가문인 권씨 집안을 방문하여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의 주최자였던 권철신과 그의 동생인 권일신을 만났다.

  이들은 각지에서 온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어 전국에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벽은 이러한 점에서 권씨 형제를 설득하여 천주교의 신봉자와 전파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권철신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고 그 신앙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이벽의 견해에 동의하였으나 천주교를 좀더 자세하게 연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반면에 권일신은 즉시 천주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고 한성으로 올라왔다.

  1784년 겨울에 이승훈은 한성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이벽(요한세자)과 권일신(프란치스꼬 사베리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래서 조선의 천주교회는 세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고, 이들은 복음선포에 자신을 헌신키로 결심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실천하면서 혈연, 학벌, 당색 등으로 연결된 주위 사람들에게 전교하였다. 따라서 정약전, 정약용(요한) 형제와 같은 양반 계급과 최인길(마티아), 김범우(토마스), 최창현(요한)과 같은 중인 계급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다. 특히 전국 방방곡곡에 제자들을 갖고 있던 권일신은 직접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동시에 입교한 제자




들을 통해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천주교의 신앙을 심었다. 충청도의 사도로서 처음으로 호서 지방에 교회

를 세워 교세를 확장한 이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과 전라도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유항검(아우구스띠노)은 모두 권일신의 제자로서 스승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이승훈의 진술에 의하면, 1784년부터 1785년 1년 동안에 신자의 수효가 1천여 명에 달하였고, 교세의 범위도 두루 천 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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