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가을단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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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주 [pjohn] 쪽지 캡슐

2002-09-04 ㅣ No.4920

진짜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작년에 "가을단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는데 벌써 1년이 지나 2002년 가을에 네번째 글을 올리게 됩니다.

 

오늘 낮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상담을 원하는 전화였습니다.  

저녁미사를 끝내고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낮에 전화한 사람이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교리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자신이 요 몇년 사이에 마음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3년 전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가졌습니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을 고등학교까지 잘 키우며 남 부럽지 않는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와 아들이 뺑소니에 치어 저 세상으로 먼저 갔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면서 지내는 나날이었습니다. 수 많은 방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그분에게 그나마 좋은 친구가 있어 옆에서 지켜주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잡고 그 친구가 음식점을 내는데 함께 돈을 대었습니다.

 

하지만 철썩같이 믿고 있던 그 친구는 얼마 되지 않아 돈을 모두 거두어 외국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투자한 돈 뿐아니라 집을 담보로 은행돈까지 대출하여 떠버렸습니다.

두번째로 세상에 실망하고 사회에 좌절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친구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은행에서 빚독촉이 왔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압박과 함께...그분은 급한김에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은행빚을 갚았습니다. 하지만 사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사채업자들에게 잡혀가 구타도 많이 당했습니다.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아이엠에프때 그래도 자신이 많이 도와 준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번째로 세상에 실망을 했고 좌절을 했습니다. 배신감은 극에 달 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을 살아나갈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집에 있던 살충제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질긴 것이었습니다. 몸만 망가지고,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성당을 다닌다고 했습니다.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을 보며 찡그리는 사람대신

그분은 대소변을 받아주었습니다. 부인되시는 분은 속을 씻어내는 데는 인삼이 좋다고 인삼다린 물을 끓여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좋은 말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침묵의 하느님. 지금 나의 고통에 침묵하시지만 그 침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나를 위로하신다는 말씀.

그분이 퇴원하시던 날 자신에게 묵주를 하나 쥐어주셨습니다. 신부님께 상담을 해보라고, 신부님께 이것을 보여 드리면 무엇을 해 주실것이라고,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눈물을 글썽이시며 두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이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잘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그분 생각이 납니다.

 

용기를 내서 퇴원 후 성당에 왔습니다. 두 시간 동안 대성당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삶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해꼬지하지 않고 그래도 정직하게 잘 살려고 했는데 하느님이라는 분은 도대체 무엇하는 분이신지 세상이 이런데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 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그래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밤 기차로 남해에 있는 친구집에 요양차 가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가진 돈도 없고 해서 염치 없는 부탁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을 좀 얻어 갔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신앙을 가지지는 못해도 병원에서 그분이 믿고 있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진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한다고 못내 미안해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주섬주섬 골라 싸 드렸습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더군요.

그분이 당하신 삶의 고통을 제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하시면서 눈물 짓는 그분을 보며 저의 눈도 젖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보살펴 주셨던 신자분. 세상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배신감을 느꼈던 그분께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참다운 이웃이 되어주신 분이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지금쯤 세상의 어둠과 빛을 두 어깨 한껏 매고, 기차에 몸을 실으셨을 그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하실 거예요.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그분의 손을 잡으세요.

 

가을의 초입에 삶과 신앙을 깊이 있게 성찰케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박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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