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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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원 [redwood] 쪽지 캡슐

2002-12-21 ㅣ No.2820

지난 12.16일 저는 40년간 모시고 살던 아버님을 여의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그토록 위하시던 어머님과 사랑하시던 가족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도 마지막 인사도 없이 당신 혼자서 병원의 침대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동생의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때에는 마치 주무시는 것 같이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무리 불러 보아도 아버님은 영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살아 계신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그 前週 12월 13일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 오전 아버님은 병원에 재 입원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출근하면서 두 주일째 불면증으로 밤을 밝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않아 계신 아버님을

 

안아 드리며 "저 출근해요 아버지. 병원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크게

 

끄떡이시면서 "응" 하셨던 것이 이 세상에서 아버님과 저의 마지막 대화였으며, 따뜻한

 

아버님의 몸을 만져본 마지막 기억이 되버렸습니다.

 

그 뒤 토요일, 일요일은 누나들과 동생이 병원으로 아버님 병 문안을 다녀와서는 "상태가

 

좋아지고 있으니 다리가 불편한 저까지 갈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월요일 오후 퇴근

 

후에 가서 뵐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월요일 오후 2시 좀 넘어서 아버님은

 

혼자서, 가족 아무도 없는 가운데 훌훌 떠나 버리셨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1924년 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51년 1·4후퇴

 

무렵 공산당의 학살을 피해서 단신으로 남쪽으로 내려 오셨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고향을

 

떠난 날이 1951년 1월 5일 경이라고 합니다. 그 뒤 가족과 생활 기반을 모두 잃은 초라한

 

피난민 청년인 아버님이 겪어야 했던 피란지 부산에서의 신산스런 날들은 육이오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 묘사한 부분과 같습니다.

 

언젠가 피란지 부산의 기후가 온화하여 겨울에도 포플러 잎이 모두 지지 않는 다는 제 말에

 

아버님은 "응, 부산은 겨울에도 큰 추위가 없어 아마 부산이 추운 지방이었다면 육이오때

 

피난민들 많이 얼어 죽었을거야" 라는 말씀에서 전 추위에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부산

 

토굴움막 시절의 절박한 아버님 기억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하느님께서는 가족과 형제들과 생이별 한 뒤 외롭게 지내시는 아버님께 형제가 많은

 

어머니를 평생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운 아버님은 생전에 이모님들과 외삼촌들을

 

무척 좋아 하셨습니다.

 

그 뒤 저희 4남매를 기르시고 그 중에서도 특히 장남인 저에게 다른 형제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가 장애가 있어 다른 부모님 들이 할 필요 없는 고생도 무척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나온 곳에는 다 아버님과 관련된 기억의 편린들이 있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 직장... 등등  이제 제가 그곳을 가게 된다면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또

 

많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같이 걸었던 길 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저를

 

볼 오셨던 기억들...비 오는 날 노원역에 우산을 들고 서 계시던 모습들 ...제 개인사 어느

 

한 구석에도 아버님과 연관된 기억이 없는 부분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막상 상을 당하고 나니 정말 막막했습니다. 실감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 그 흐렸던

 

겨울날 월요일 오후의 일들이 한 바탕 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슬픔에 빈소 엎드려 울고 있는데 연도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느새...교우들께서 연도를 오셨던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아주 고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교우님들이 찾아 오셔서

 

연도를 바쳐 주셨습니다. 둘째 날인 12.17에는 일곱 번이나 연도를 바쳤습니다. 분명 신자

 

분들의 연도가 하늘에 닿았을 겁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처음 보는 교우들이 그렇게 많이

 

오셔서 연도를 해 주신데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그 분들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연령회 회장님과 보나 이정애 자매님은 큰 일을 처음 당해서 망연하기만 한 저희

 

가족들에게 일일이 세밀하고 자상하게 지적해 주시고 지도 해 주셨습니다.

 

연령회장님께서는 새벽같이 오셔서 장지에 대한 일을 보아 주셨고 모든 절차를 이끌어

 

주셨으며 장지까지 오셔서 모든 일들을 법도에 맞게 너무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각별한 보나 자매님은 문상객 대접을 위한 준비부터 삼우기도까지 돌보아

 

주셨습니다.

 

남들은 다 피하고 싶어하는 궂은 일 인데 저토록 열성을 보이시는 연령회장님과

 

보나자매님을 보면서 저는 그분 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 보았습니다.

 

18일 오전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신 김성권 신부님과 전 연령회장이시며 아버님과 같이

 

레지오 활동을 하신 이베드로 회장님께도 머리 숙여 각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전

 

회장님께서는 아버님 보다 고령이시고 감기로 고생하시면서도 연도를 바쳐 주셨고

 

장지에까지 같이 오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루시아 할머님과

 

장례미사에서 수고해 주신 제 대부님과 성함과 본명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어르신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제가 처음 뵙는 분들이고 경황이 없어서 아둔하게도 일일이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아버님의 상사에 도움을 주신분들과 장례미사에 참례하여 주신 모든 교형

 

자매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제가 사랑하는 아버님은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지난 5년간 미사때 아버님과 어머니 그리고 제가 늘 나란히 않아서 미사를 봉헌하던

 

자리에는 어머님과 저만 남을 것입니다.

 

저는 장례미사때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이제는 아버님이

못합니다.

앉을 수 없는---우리 3식구가 늘 앉던 신자석과 환한 촛불 사이에 누워 계신 아버님을

 

번갈아 보며..., 불과 20일 전에는 당신이 걸어서 미사를 봉헌하러 오셨던 성당에 누운

 

채로 가족의 오열 속에서 당신을 위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시는 아버님의 영구를 보면서

 

산다는 것과 죽는 다는 것 그리고 이별한다는 것 등 제 머리로 정리가 안 되는  여러

 

개념들이 뒤범벅되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전 아버님의 부재를 실감하지

 

 

 

주님께서 거져 주신 것이니까 언제든지 주님께서 도로 거두어 가실 수 있는 것이지만

 

아직도 잘 해드리지 못한 회한과 눈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는지 어쩌면 날이 갈수록 아버님이 더욱 더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판단도 안 서는 지금은 그저 하느님께서 제 아버지 김광묵 요셉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제가 고마움에 사무쳐 기도 드리는 분들에게는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영육간의 건강과 평화를 주시기를 애절히 간구 합니다.

 

다시 한번 이번 저희 아버님 장례에 영적으로, 행동으로 물적으로 도움울 주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리며,일일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온당치 않은 방법이지만

 

저와 저의 가족들의 감사의 마음을 몇

 

줄의 글로 표현하는 결례를 너그러히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2.12.20

 

김대원 루가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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