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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미한 회개/참회[상등통회, perfect contrition]의 성경근거 -루카 7,47 [번역오류] 1032_heart 773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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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권고 [218.55.90.*]

2014-09-21 ㅣ No.1575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5.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게시자 주: 이 글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4항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이상, 게시자 주 끝)

 

질문 1:

다음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발췌된루카 복음서 7,47ㄴ 전문입니다. 아래의 발췌문에서 [ ] 안의 주는,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기 위하여,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i) [1977년 초판 발행]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ㄴ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prindex=3&Keyword=많은 죄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주: 즉, 보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ii) [2000년경 초판 발행] 200주년기념성서 루카 복음서 7,47ㄱ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200new&prindex=3&Keyword=많은 죄를

"그러므로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이 여자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iii) [2005년 초판 발행]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ㄴ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3&Keyword=많은 죄를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이상, 발췌 끝)

 

[질문] 동일한 루카 복음서 7,47의 일부인 위의 세 개의 우리말 번역문들을 언뜻 비교/검토하더라도, 세 번째인 "새 번역 성경"의 번역문의 경우에, 앞의 두 개의 번역문들과는 다르게,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 중 어느 번역문이,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통적 공인 성경대중 라틴말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 본문과 이 절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 박사들, 그리고 교황님들의 전통적 가르침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번역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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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답변:

 

1. 들어가면서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루카 복음서 7,36-50다해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루카 7,36-8,3) 에 포함되고 그리고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입니다.

 

위의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드리기 전에, 이번 항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되는, 여러 지역 언어본 성경[여기에는, Clementine Vulgate 와 Nova Vulgata 등의 대중 라틴말 성경들 포함]들의 루카 복음서 7,47을, 연대순에 있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1-1. 다음은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ㄴ 전문및 이 절에 대한 "주석 성경"주석 전문입니다. [ ] 안의 문장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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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 여자는 ... 드러낸 것이다." 는 지금까지 흔히 "이 여자는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음 문장, 그리고 앞의 비유와(41-43절) 맞지 않는다. [남, 즉,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사랑은 용서의 근거나 이유가 아니라 용서의 결과이며 표징이다(19,8-9 참조).(#)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0일]

(#) 게시자 주: 이 주석에서 루카 복음서 19,8-9를 이 주석의 성경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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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고 다음은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a 전문 및 이 절에 대한 NAB 주석 전문인데, 바로 위의 "주석 성경"의 루카 복음서 7,7ㄴ 및 이 절에 대한 주석보다 더 자세한 내용의 주석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안의 문장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WQ.HTM

(발췌 시작)
"So I tell you,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hence, she has shown great love."*

 

"따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녀는 커다란 사랑(love)을 이미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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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7: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hence, she has shown great love: literally,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seeing that she has loved much." That the woman's sins have been forgiven is attested by the great love she shows toward Jesus. Her love is the consequence of her forgiveness. This is also the meaning demanded by the parable in vv 41-43.

 

* 7,47: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녀는 커다란 사랑(love)을 이미 보였던 것이다:(#) 글자 그대로, "그녀가 많은 사랑을 이미 보였던 것을 볼 때에(seeing that),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다." 이 여자의 죄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은 그녀가 예수님을 향하여 보이는 커다란 사랑(love)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is attested by). [하느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하느님에 의한] 그녀에 대한 용서의 결과이다. 이것은 또한 제41-43절에 있는 비유에 의하여 요구되는 의미이다.

 

(#) 번역자 주: 이 영어본 번역문에서, 루카 복음서 7,47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love)" 이라는 단어를,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글의 게시자 주 4-1-2에 그 출처 제시와 함께 발췌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처럼,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의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하라. 루카 복음서 7,47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문이, 특정 단어 "사랑(love)"의 의미에 대한 전후 문맥 안에서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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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3. 그리고 다음은 1966년에 초판 발행된 개신교측 성경인 Good News Bible 루카 복음서 7,47a 인데, 바로 위의 NAB 루카 복음서 7,47a와 동일한 인과 관계를 밝히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I tell you, then, the great love she has shown proves that her many sins have been forgiven."

 

"따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녀가 이미 보였던 커다란 사랑은 그녀의 많은 죄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을 증명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4. 그러나, 다음은, 1611년에 초판 발행된 영어본 KJV(King James Version)을 현대 영어 어법에 맞게, 1946년에 초판 발행된 RSV(Revised Standard Version) 신약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 전문인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인과(cause and effect)와 비교하면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기 위하여, 번역 용어인 접속사 "for"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1.htm

(발췌 시작)
[47] "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이상, 발췌 끝)

 

1-5. 다음은 1611년에 개신교인 영국 성공회용으로 초판 발행된 KJV(King James Version) 루카 복음서 7,47인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인과(cause and effect)와 비교하면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기 위하여, 번역 용어인 접속사 "for"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Luke+7&version=KJV

(발췌 시작)
Wherefore I say unto thee,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so much: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이상, 발췌 끝)

 

1-6. 다음은 바로 위의 제1-5항의 KJV가 개신교인 영국 성공회용으로 마련될 때에 많이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인 Clementine Vulgate 를 영어로 번역하여 1582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측의 Douay-Rheims Bible 신약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인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인과(cause and effect)와 비교하면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알아차리기 위하여, 번역 용어인 접속사 "because" 가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71.html

(발췌 시작)
47 Wherefore I say to thee: Many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hath loved much. But to whom less is forgiven, he loveth less.

(이상, 발췌 끝)

 

1-7. 다음은, Douay-Rheims Bible 의 번역 대본인, 그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인, Clementine Vulgate루카 복음서 7,47인데,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와 비교하면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bible/luk007.htm

(발췌 시작)
47 Propter quod dico tibi: remittuntur ei peccata multa, quoniam(*) dilexit multum. Cui autem minus dimittitur, minus dilig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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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라틴어 사전들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quoniam" 은 "because, since, seeing that" 을 의미한다:
http://www.archives.nd.edu/cgi-bin/words.exe?quoniam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quoniam&fromdoc=
Perseus%3Atext%3A1999.04.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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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7: (중간 결론 1 및 질문 1에 대한 답변)
(i)
 다음은 1979년에 개정 출판된,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리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인, 새 대중 라틴말 성경 Nova Vulgata 루카 복음서 7,47인데, 바로 위의 제1-7항에 발췌된 이전의 Clementine Vulgate 루카 복음서 7,47과 동일한 인과 관계(cause and effect)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개신교측의 일부 성서 학자들이 처음 제시한 것으로 파악되는 위의 제1-3항제1-2항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 내용에 결코 동의하지 않고, 루카 복음서 7,47에 있어 새 대중 라틴말 성경 Nova Vulgata 그동안의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 박사들, 그리고 교황님들의 전통적 해석을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
/nova-vulgata_nt_evang-lucam_lt.html#7

(발췌 시작)

47 Propter quod dico tibi: Remissa sunt peccata eius multa, quoniam dilexit multum; cui autem minus dimittitur, minus diligit ”.

(이상, 발췌 끝)

 

(ii) 따라서,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은 그동안의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 박사들, 그리고 교황님들의 전통적 해석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을 알 수 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30일]

1-8.

1-8-1. 다음은 "주석 성경"의 주석들의 번역 대본인 프랑스어본 공동 번역 성경 "TOB"의 루카 복음서 7,47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루카 복음서7,47 에 대한 프랑스어본 공동 번역 성경 TOB 주석 전문:

7,47 One a souvent traduit: ses péchés... ont été pardonnés parce qu’elle a beaucoup aimé. Mais cette interprétation semble exclue par la fin du v., comme par la parabole qui précède (v. 41-43). L’amour est conséquence et signe du pardon (voir 19,8-9). 

 

(영어 졸번역문)

7,47 One has often translated: her sins have been forgiven because she has loved so much. But this interpretation seems excluded by the end of v., as by the parable which precedes (v. 41-43). Love is consequence and sign of forgiveness (see 19,8-9).

 

(우리말 졸번역문)

7,47 자주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왔다: 그녀의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이미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앞서는 비유(제41-43절)에 의하여서처럼, 이 절의 끝부분에 의하여 배제되는 것 같다(seems). 사랑은 용서의 결과이며 그리하여 용서의 표징이다(19,8-9를 보라).

(이상, 발췌와 영여 번역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1-8-1: "주석 성경"의 주석들의 번역 대본인 프랑스어본 공동 번역 성경 "TOB"에 대한 안내의 글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01.htm

(이상, 게시자 주 끝)

 

1-8-2. 영어본 성경들의 루카 복음서 7,47에서 영어로 "love" 로 번역되는 단어에 대응하는 프랑스어 단어가 TOB루카 복음서 7,47에서 "amour" 로 번역되었는데, 그러나 이 프랑스어 단어는, 위의 제1-7항과 이어지는 제1-9항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원후 4세기부터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대중 라틴말 성경(즉, Vulgate, Nova Vulgata)들루카 복음서 7,47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번역 용어인 라틴어 단어 "diligo" 에 대응하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 "agape(아가페)" 와 동일한 의미 대신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지적한 바는, 예를 들어, 다음의 글의 게시자 주 3-2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43항의 라틴어본, 프랑스어본, 그리고 영어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면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프랑스어 단어 "amour" 에 대응하는 라틴어 단어는, "diligo"아니고형제적 사랑(brotherly love)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 philos에 대응하는 "amor" 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http://biblehub.com/lexicon/john/21-15.htm  

 

1-8-3. 다른 한편으로, 바로 위의 제1-8-2항에 발췌된 프랑스어본 공동 번역 성경 TOB 루카 복음서 7,47의 주석과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의 주석과 또한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십시오. TOB 의 주석의 경우에는 "semble" 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 한 것 같다"추측을 하고 있으나, 그러나 "새 번역 성경"의 경우에는 이러한 추측성 언급 대신에, 그리고 강력하게 주장할 만한 신뢰할 수 있고 또 설득력 있는 근거의 제시도 전혀 없이, "맞지 않는다" 라는 단정(斷定: 딱 잘라서 판단하고 결정함)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석해 오지 않은 , 특히 고해성사를 훼손시킬 수도 있는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였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1-8-4. 그리고, 바로 위의 TOB 루카 복음서 7,47에 대한 주석에 의하면, TOB 루카 복음서 7,47가,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에서처럼,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공인 성경인 대중 라틴말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해석과 번역에 상반되는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프랑스어 번역문을 가지고 있을 것임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1-9.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그리스어본 루카 복음서 7,47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1: http://en.katabiblon.com/us/index.php?text=GNT&book=Lk&ch=7&interlin=on

출처 2: http://www.scripture4all.org/OnlineInterlinear/NTpdf/luk7.pdf

 

그런데 이들을 정밀하게 들여다 보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i) 영어로 "because, since, seeing that" 혹은 "that" 으로 번역되는 접속사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접속사 "hoti"의 의미는 "because"" 혹은 "that" 입니다.(#)

 

(ii) 루카 복음서 7,47에서 "사랑하다(to love)" 로 번역되는 단어에 대응하는 라틴어 단어는, 마치 자녀를 양육 중인 여성이 자신의 젖먹이 아기를 자나깨나 항상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 돌보듯이,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혹은 주의 깊은 배려와 함께, 돌보고, 시중드는 것" 을 나타내는 "care for"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diligo" 이고,(##) 그리고 이 라틴어 단어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원어의 원형은 "agape(아가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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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해당 그리스어 접속사 "hoti"의 사용 용례에 대한 분석은 다음에 있는데, 특히 II. a 에서, 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의미는 "because"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http://biblehub.com/greek/3754.htm

 

(##) 게시자 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글의 제3항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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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을 서술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 10,27(diliges)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 22,37(diliges); 22,39(diliges)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하다(to love)" 라는 동사의 그리스어 원어의 원형도 또한 동일한 "agape(아가페, 사랑)" 임은 다음의 출처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1: http://biblehub.com/interlinear/luke/10-27.htm

출처 2: http://biblehub.com/interlinear/matthew/22-37.htm

출처 3: http://biblehub.com/interlinear/matthew/22-39.htm

 

(iv)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새 계명이 기록된 요한 복음서 13,34(diligatis; dilexi; diligatis)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하다(to love)" 라는 동사의 그리스어 원어의 원형도 또한 동일한 "agape(아가페, 사랑)" 임은 다음의 출처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biblehub.com/interlinear/john/13-34.htm

 

(v) 또 다른 한편으로, 대중 라틴말 성경의 요한 복음서 21,15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Diligis me?" 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Amo te." 라고 답변하였는데, 이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동사들은 agapaphilo 임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biblehub.com/lexicon/john/21-15.htm

 

그리고 대중 라틴말 성경의 요한 복음서 21,15에서 라틴어 단어 amor 로 번역되고 있는 그리스어 단어 philos 가, 그리스어 요한 복음서 21,15에서 그리스어 단어 agape가 나타내는 의미와 결코 동일하지 않은형제적 사랑(brotherly love)이라는, 피조물들인 사람들 사이의 어떤 관계를 나타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vi) (중간 결론 2) 그러므로, 바로 위의 제(ii)항, 제(iii)항제(iv)항, 그리고 제(v)항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루카 복음서 7,36-50에서 죄인인 여자가 행하였던 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 둘 다에서의 바로 그 사랑, 즉, 아가페(agape)하느님을 향한 실천,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실천, 즉,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our love)실천이었다고 복음사가 루카가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음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내용추가 일자: 2016년 6월 14일]

1-9.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 측의 여러 성경들루카 복음서 7,47을 읽을 수 있는데, "새 번역 성경"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번역 오류와는 달리, 이 글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동일하게, 올바르게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bskorea.or.kr/infobank/korSearch/korbibReadpage.aspx?version=
GAE&readInfo=%uB205%207%3A47&cVersion=
SAE^SAENEW^&fontString=12px&fontSize=1#focus

[이상, 2016년 6월14일자 내용추가 끝]  

 

2.

이번 항에서는,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1567-1637년) 에 주어진 루카 복음서 7,47-48에 대한 해설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7luke.htm

(발췌 시작)

     Ver. 47.Wherefore I say unto thee,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Greek, α?φ?ωνται, have been forgiven. At what time, we may ask, were her sins forgiven?

 

     제47절. - 따라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많은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α?φ?ωνται, 은 이미 용서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시점에서 그녀의 죄들이 용서받았는지요? 라고우리는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1. Francis Lucas thinks at the time when the Lord said unto her, “Thy sins ate forgiven,” v. 48.

 

     1. Francis Lucas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너의 죄들은 용서 받았다", (제48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2. Others are of opinion that her sins were forgiven when our Lord in this present verse declared unto Simon the fact of her pardon.

 

     2. 다른 이들은 우리의 주님께서 바로 이 절에서 시몬(Simon)에게 그녀의 사면에 대한 사실을 선언하셨을 때 그녀의 죄들이 용서받았다는 견해를 가집니다.

 

     3. But it seems more probable that her sins were forgiven at some time antecedent, i.e. when she felt true contrition for her offences. Because when by the grace of God she had been led to see the heinousness of her sin, so deep was her contrition and sorrow, that she thereby regained the divine favour, and so her love for God and her sorrow for her sins impelled her to show openly the reality of her repentance, and therefore before Christ could say unto her, “Thy sins are forgiven,” she had obtained forgiveness by reason of her complete penitence.

 

     3. 그러나 더 앞서는 어느 시점에, 즉, 그녀가 자신의 침범(offences)들에 대한 참된 참회(contrition)를 느꼈을 때에, 그녀의 죄들이 용서받았음이 더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자신의 죄의 가증스러움을 보도록 이미 인도되었을 때에, 그녀의 참회와 슬픔(sorrow)이 너무도 깊어 그 결과 그녀는 그 때문에 하느님의 우의적 도움(the divine favor)[즉, 하느님의 은총]를 다시 획득하였고(regained),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느님을 위한 그녀의 사랑(her love for God) 및 자신의 죄들에 대한 그녀의 슬픔은 자신의 회개(repentance)의 실재(reality)를 공개적으로 나타내도록 그녀를 재촉하였으며(impelled), 그래서(and therefore)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너의 죄들은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완전한 뉘우침(complete penitence) 때문에 용서를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입니다.

 

     We may, however, take the words “her sins are forgiven” as spoken in the same sense in which the priest pronounces absolution over a penitent, who is already reconciled to God by his perfect repentance. The priest absolves him who is already absolved, and this absolution is so effectual as to do away with any sin which might still attach itself to the penitent. Further, a sin often repeated may be often forgiven, if the penitent confesses his fault as often as he commits it, and seeks absolution at the hands of the Church. Hence Christ for the third time forgives the sins of the Magdalene. Wherefore He freed her not only from the guilt but from the punishment of sin, and granted her free release.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죄들이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이 사제가, 자신의 완미한 회개[perfect repentance, 상등통회(上等痛悔), 게시자 주: 어래의 제5-2-4항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52항과 제1492항 참조]에 의하여 하느님께 이미 화해하게 된, 한 명의 뉘우치는 자에게 사죄(赦罪, absolution, 죄의 용서)을 선언하는, 바로 그 동일한 의미로서 말해졌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사제는 이미 사죄(赦罪, absolution)를 받은 자를 사죄(赦罪, absolution)하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죄(赦罪, absolution)는 뉘우치는 자에게 그 자체가 여전히 달라붙어 있을 수도 있는 임의의 죄(any sin)를 없애는 데에 있어 대단히 효과가 있습니다. 더욱이, 자주 반복되는 어떤 죄는, 만약에 뉘우치는 자가 자신이 이 죄를 범하는 만큼 자주 자신의 과실(fault)을 고백하고, 그리고 교회의 손들에 의해 사면을 얻으려고 하면, 자주 용서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의 죄들을 세 번째로(for the third time) 용서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당신께서는 죄로부터뿐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벌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녀에게 자유로운 방면(free release)을 허락하셨습니다.

 

     This is what the angel said to a certain Bishop of the Church: “Penitence and confession restore the penitent to the number of the elect.” Again, “The tears of a penitent may well bear the name of a baptism.” Barlaam. And Palladius tells us, that a certain virgin who had fallen into sin “was more pleasing to God in her penitence, than in her former purity.” See also S. Jerome (De pœnitentia Fabiolæ); and Climacus (De pœnitentia.)

 

     다음은 천사가 교회의 한 명의 특정한 주교에게 말하였던 바입니다: "뉘우침과 고백은 뉘우치는 자를 선택된 자(the elect)들로 이루어진 다수로 복구시킵니다." 또다시, "한 명의 뉘우치는 자의 눈물들은 한 개의 세례의 이름을 또한 가질 수도 있습니다." Barlaam. 그리고 Palladius는, 죄로 이미 떨어졌던 한 명의 특정한 동정녀가 "그녀의 이전의 순수 때문에 보다도 그녀의 뉘우침 때문에 하느님께 더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또한 성 예로니모(St. Jereome, 347-420년) (De pœnitentia Fabiolæ), 그리고 Climacus (De pœnitentia.)을 보라.

 

     For she loved much. Toletus and some others think that the word “for” signifies not the cause but rather affords the proof of her forgiveness. “Thou mightest have known, 0 Simon, that her sins were forgiven, for these open signs of love are bestowed on Me in gratitude for my forgiveness of her sins.”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Toletus와 일부 다른 이들은 "for" 가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용서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오 시몬, 그대가, 그녀의 죄들에 대한 나의 용서에 [그녀가] 감사하여 사랑(love, 아가페)에 대한 이들 공개된 표징(signs)들이 [그녀에 의하여] 예수님(Me)께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죄들이 용서되었다고 알았을 지도 모릅니다."

 

     But this explanation is faulty, because the Magdalene knew not that she had been forgiven, until she heard Christ pronounce the pardon of her sins. And Christ does not say, Learn from her acts of love that her sins have been forgiven, but on the contrary, Her sins are forgiven because of her love.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결함이 있는데(faulty), 왜냐하면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는 자신이 이미 용서를 받았음을, 그녀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들에 대한 사면을 선언하심을 들었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의 사랑(love, 아가페)의 행위들로부터 그녀의 죄들이 이미 용서받았음을 배우라" 가 아니라,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에 있어] 그와는 반대로(on the contrary), "그녀의 죄들은, 그녀의 사랑(love, 아가페) 때문에(because), 용서받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Hence the cause of the Magdalene’s forgiveness was her great love for God, which led her to hate and abhor her former sins. For love is the death of sin, and the life of righteousness.  S. Augustine (De laudibus charitatis.) Hence all theologians hold with him, that the act of perfect contrition which includes the entire surrender of the heart to God, precedes, but at once brings with it justification and forgiveness of sin as its final result, in the same way as a certain amount of heat (calor ut octo) applied to wood, as a result produces actual fire in that wood.

 

     따라서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 대한 용서의 원인(cause)은, 그녀를 자신의 이전의 죄들을 싫어하고(hate) 그리고 혐오하도록(abhor) 인도하였던, 하느님을 위한 그녀의 커다란 사랑(아가페)(her great love for God)이었습니다. 이는 사랑(love, 아가페)은 죄의 죽음, 그리고 의로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 (De laudibus charitatis). 따라서 신학자들 모두는 그와 함께, 하느님께 심장(heart)의 전체 항복(entire surrender)을 포함하는 완미한 참회[perfect contrition, 상등통회(上等痛悔)]는 앞서며(precedes), 그러나 즉시 이 참회는, 열(heat)의 어떤 특정한 양이 나무(wood)에 가해짐이, 한 결과로서, 바로 이 나무에 현실태적 불(actual fire)을 산출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의 최종 결과로서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와 죄의 용서를 초래함을, 견지합니다(hold).

 

     So the Council of Trent (Sess. xiv. cap.iv.), distinguishig between the attrition caused by fear of punishment and the contrition which follows on the love of God, decides that the latter, in conjunction with the sacrament of penance, reconciles the sinner with God, which the former is in no wise able to do; for “a broken and a contrite heart, 0 God, thou wilt not despise,” Ps. li. 17. Hence S. Gregory (Hom. 33) explains,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i.e. she burnt off the corruptions of sin, because she was inflamed with the fire of love. For the more the heart of the sinner burns with the love of God the more is he purified from the lust and corruption of sin.”

 

     그래서, 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야기되는 불완미한 참회[attrition, 하등통회(下等痛悔)]와 하느님에 대한 사랑(love, 아가페)을 잇따라 뒤따르는 완미한 참회[contrition, 상등통회(上等痛悔)]를 구분하는, 트리엔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년) (Sess. xiv. cap.iv.)는 후자가, 고해성사(the sacrament of penance)와 결합 안에서(in conjunction with), 전자(the former)가 결코 행할 수 없는, 죄인을 하느님과 화해시킨다고 결의하는데, 이는 "한 개의 부서진(broken) 그리고 참회하는(contrite) 심장(heart)을, 오 하느님, 당신께서 장차 업신여기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51,17 [주: 새 번역 성경의 경우는 시편 51,19]). 따라서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St. Gregory, 540-604년)은(Hom. 33)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녀의 많은 죄들은 용서받는데,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는 죄에 기인하는 타락(corruptions of sin)들을 불살라 버렸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사랑(love, 아가페)이라는 불로 불타오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인의 심장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으로써 더 많이 불탈수록 그는 욕정(lust)과 죄에 기인하는 타락으로부터 더 많이 정화되기 때문입니다."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This refers to the Pharisee, because he obtained no forgiveness, inasmuch as he showed no signs of penitence or of love for God. Our Lord, under reserve, saith little or “less,” as the Vulgate renders it, is forgiven, though he might have said “nothing” is forgiven. But by the words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we may understand: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말씀은 이 바리사이에 대한 언급인데, 왜냐하면, 그가 뉘우침에 대한 혹은 하느님을 위한 사랑(아가페)(the love for God)에 대한 어떠한 표징(sign)도 나타내지 않았던 정도에까지, 그가 아무런 용서도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비록 당신께서 "아무 것(nothing)"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보 아래에서Iunder reserve), 적게 혹은,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이 그것을 옮기듯이, "더 적게" 용서받는다 라고, 발씀하십니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That,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n which God forgives sins, “one mortal sin, even though it be the least, cannot be forgiven without its accompanying sins being forgiven also, and whensoever one is forgiven, the others are forgiven as far as the guilt is concerned, but more or less of punishment is meted out, according to the degree of love which fills the heart of the penitent.”

 

     1. 그것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시는 원리들에 따라서, "하나의 대죄는, 심지어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수반하는 죄들이 또한 용서받음 없이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리고 한 개가 용서받을 때마다, 그 죄가 있음(guilt)이 관련된 한 다른 것들이 용서받으나, 그러나 벌(punishment)의 더함과 덜함은, 뉘우치는 자의 심장(heart)을 채우는 사랑(love, 아가페)의 정도에 따라, 할당된다.

 

     2. That he who has no love for God, or only that natural love which well nigh all men possess, loves God less than one whose love is divinely inspired. Hence to the one many, i.e. all his sins, are pardoned; to the other less, i.e. nothing, is forgiven. All was forgiven the Magdalene because she was truly contrite, and sought forgiveness by every means in her power; but the Pharisee received no forgiveness, because he felt no sorrow for sin, and had not even given the feast with any desire of obtaining mercy from Christ.

 

     2. 하느님을 위한 어떠한 사랑(love,아가페)도 가지지 않은 자, 혹은 오로지 상당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바로 그 자연적 사랑(natural love)만을 가진 자는, 그의 사랑이 하느님에 의하여 자극을 받은 자보다 하느님을 적게 사랑한다. 따라서 한 사람(the one)에게는 많은, 즉, 그의 죄들 모두가 사면되나, 그러나 다른 사람(the other)에게는, 더 적게, 즉, 아무 것도, 용서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게 용서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참되게 참회하였고(truly contrite), 그리고 그녀의 힘/능력(power)에 있는 모든 수단으로써 용서를 추구하였으나, 그러나 이 바리사이는 아무런 용서도 받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죄에 대한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였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로부터 자비를 획득하고자 하는 어떠한 욕망과 함께 이 식사(the feast)를 제공하였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For Christ designed the parable to apply to S. Mary Magdalene and also to the Pharisee, and willed from it to show why the one was forgiven but the other not.  S. Augustine adds, “The parable was spoken because the Pharisee thought he had few, if any sins, not because he had no love, for he showed some love in that he invited our Lord.” And again, “0 Pharisee, thou lovest little, not because little is forgiven thee, but because thou thoughtest that there was little which needed forgiveness.” Toletus remarks, “Little was forgiven Simon, because by the grace of God he had been preserved from committing sin, for he had entertained Christ, and not persecuted him as the other Pharisees. Hence it is very probable that afterwards this Pharisee became a true follower of Christ.” See further Suarez, Parte iii., de Gratia, lib. viii. cap. x.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 마리아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게 그리고 또한 이 바리사이에게 적용되는 비유를 설계하셨으며, 그리고 이 비유로부터 왜 한 사람은 용서받았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였는지를 보여주시고자 의도하셨기 때문입니(willed).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다음과 같이 부언합니다: "이 비유는 말해졌는데 왜냐하면 이 바리사이는, 그가 아무런 사랑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주님을 초대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다소의 사랑(some love)을 보였기에, 그가, 어떤 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게 가졌다고 생각하였기 떄문이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다음과 같이 부언합니다: "오 바리사이여, 그대는, 그대에게 적게 용서되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것이 적게 있었다고 그대가 생각하기 때문에, 적게 사랑한다." Toletus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시몬에게 적게 용서되었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그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보호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이미 대접하였던 것이지, 다른 바리사이들처럼 당신을 박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 이 바리사이가 그리스도의 참된 추종자가 되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Suarez, Parte iii., de Gratia, lib. viii. cap. x 을 보라.

 

     Ver. 48.—And He said unto her, Thy sins are forgiven. Francis Lucas thinks that the Magdalene’s sins were at this time and by these words forgiven. See preceding verse. Christ now turns to the Magdalene, and repeats that which He had said just before to Simon, in order to comfort her grief, to confirm her pardon, and show that He had power and authority to forgive sins, and that He therefore was the Messiah, and God. Euthymius.

 

     제48절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Francis Lucas 는 막달레나[주: 죄인인 이 여자를 이 해설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음]의 죄들은 바로 이 시점에서 그리고 이들 말씀들에 의하여 용서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 있는 절들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막달레나 쪽을 향하시며,  그리고, 그녀의 큰 슬픔을 위로하시고자, 그녀에 대한 사면을 확언하시고자,  바로 앞에서 시몬에게 당신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반복하시며, 그리하여 당신께서 죄들을 용서하는 힘/능력과 권한을 가지셨음을,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께서 메시아이시고, 그리고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Euthymius.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위의 제2항에 주어진 해설을 읽고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에 의한 다음의 근본 설정을 먼저 이해하고 성경 본문의 배경으로서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3-1. 아담과 하와가 원죄(original sin)(1)를 범하기 이전의 피조물인 그들의, 따라서 그 크기가 유한한(finite), 심장(heart)(2)은, 하느님께 [은총(grace)(3)의 통로를 통하여] 항상 연결되어 있었기에[즉, 은총의 지위(the state of grace)에 머물러 있었기에], 오로지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love)(즉, 아가페, charity, caritas)(4)으로 지속적으로 완미(完美)하게(perfectly, 즉, 완전하고 또 결함이 없게)(5) 채워져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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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원죄(original sin)"의 정의(definition)[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76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04항, 제419항]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2.htm

 

(2) 게시자 주: "심장(heart)"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2.htm

 

(3) 게시자 주: "은총(grace)"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4) 게시자 주: "인간의사랑/자연적 사랑(human love/natural love)"의 정의(definition)[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65항]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들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0.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6.htm

 

(5) 게시자 주:"완미(完美)"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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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러나 원죄의 결과, 인간들은 은총의 지위를 상실당하여[즉,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의 심장(heart)에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infused) 은총의 통로(channel)가 끊어져]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되었으며[즉, 육체적 및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피조물인 인간의 심장(heart)은, 원죄 이전의 상태에서처럼,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인 은총(grace)을 하느님으로부터 항상 충만하게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피조물인 인간들의, 따라서 그 크기가 유한한(finite), 심장(heart) 안에서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아가페, charity, caritas, 애덕)결여/부재(absence, 즉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는 상태)가 발생하게 되어, 그 결과로, 피조물인 인간들의 심장(heart)은 크게,

 

(i)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아가페, charity, caritas, 애덕), 그리고

(ii) 제(i)항의 사랑의 결여/부재(absence)로 정의되는(is defined),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지 않는 사랑, 즉 피조물들, 즉, 세상(이사야 13,11)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

 

이들 둘로, 논리적으로 서로 배타적으로(logically mutually exclusively)채워지게 된다 (1 요한 2,15; 야고보 4,4).

 

3-3. 따라서, 원죄 이후부터 지금까지, 피조물인 인간들의 장(heart)을 채우는 인간의 사랑(love)은, 그 대상에 따라,

 

(i)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아가페, charity, caritas),

(ii) 피조물들, 즉, 세상(이사야 13,11)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

 

이렇게, 논리적으로 서로 배타적인(logically mutually exclusive) 사랑(loves)들, 둘 뿐이다. 

 

3-4. 모든 죄의 우두머리인 칠죄종(the seven capital sins)들을 포함하는, 피조물들, 즉, 세상(이사야 13,11)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모든 윤리적 악(moral evil)[즉, 죄(sin)]의 뿌리이다(1 티모테오 6,10).(*)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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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원문 및 영어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84, a1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악(evil)"은, 소위 말하는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를 말하므로, 여기에서의 표현과 아래의 해당 표현을 오늘 날짜로 바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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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3-4: 지금까지 제3-2항에서 제3-4항까지 요약하여 말씀드린 바는, 다음의 글에 더 자세하게 안내되어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 필독 권고

 

3-5. 그러므로, 인간의 심장(heart)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로, 은총의 통로가 충만하게 회복되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 인간의 심장(heart)에 지속적으로 주입될 수 있도록[즉, 은총의 지위가 회복되고 또 회복된 상태가 완미(完美)하게(perfectly, 즉, 완전하고 또 결함이 없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인데, 이러한 은총의 지위의 회복과 완미(完美)한 유지는 오로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제3항에서 여기까지의 설정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자신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의 본문 중에서 신학자로 부르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에 의하여 마련되었으며,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개념들 중의 하나입니다.

 

4. 

4-1. 우선적으로 위의 제3항에 서술된 바를 읽고 이해한 후에, 위의 제2항에 주어진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1567-1637년)에 주어진 루카 복음서 7,47-48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 이 해설이 마련될 당시인 16세기 말경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에 의하여 마련된, 성경 본문의 이해를 위한 근본 배경들을, 즉,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을 이해한 상태에서 읽게 되므로, 훨씬 더 잘 이해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4-2. 이번 항에서의 설정과 이에 따른 연역적 추론은, 위의 제3항의 내용에 근거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마련한 것이며, 이 글이 그 원 출처(original source)입니다.

 

게시자 주 4-2: 이 글의 제4항에서 말씀드리는 바에 적용되고 있는 개념은, "애덕에 의한 질투(envy)의 소멸 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수 년 전에 인지하였으며, 그리고 다음의 글들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필자의 설명 방식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2.htm [(10) 번역자 주, (v), (vi), (vii)]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5.htm [게시자 주 3]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0.htm [게시자 주 2-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2.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26.htm

 

4-2-1. 죄인이,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되어, 즉, 회심(回心, conversion)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아가페, 즉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자신의 유한한(finite) 한정된 크기의 심장(heart) 안에 받아들이게 되고, 그리하여, 위의 제3항(3) 게시자 주에 제시된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하느님의 사랑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tidy, cupidity)과 직접적으로 춛돌하면서 이 충돌의 결과로서, 하느님의 사랑이, 마치 불이 나무를 태워 소멸시키듯이, 유한한 한정된 크기의 심장(heart) 안에 있기 때문에 유한한 크기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tidy, cupidity)을, 최대한 자신의 크기만큼 소멸시키는 과정이 이 죄인의 심장(heart)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will)에 의하여,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당사자인 인간의 유한한(finite) 크기의 심장(heart)으로부터, 이 소멸의 부산물로서, 어떤 종류의 연기(煙氣), 즉, "자신의 양심(conscience)에 기인하는 아픔", 즉, "뉘우침/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가 당사자의 외면으로 방출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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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i) 제42항에서 "내면적 참회懺悔)(inner contri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ii) 제45항에서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의 행위(an act of perfect contrition), 즉, 상등통회(上等痛悔)]의 행위"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회칙 [제목: Dominum et Vivificanteem]의 해당 항들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jp-ii_enc_18051986_d-et-v_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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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그러므로 지금 말씀드린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의 결과로서 도출합니다:

 

죄인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회개한다.(*)

즉,

회개하는 죄인들 중에서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즉,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되어, 즉, 회심(回心, conversion)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피조물인 인간의 심장(heart)의 크기가 유한하고(finite)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한 이 사랑의 드러냄더 많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의 방출/표현과 함께,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의 뿌리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tidy, cupidity)은 더 많이 소멸되고, 따라서,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as, cupidity)에 포함된, 죄들의 우두머리인 칠죄종(the seven capital sins)들 또한 자동적으로 더 많이 소멸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느님께서는 죄들을 더 많이 용서하실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한 개의 따름 정리(Corollaries)로서 도출합니다:

 

죄인이 하느님을 많이 사랑할수록, 많은 회개를 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많은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다.(**)

 

4-2-2. 다른 한편으로, 죄인이면서 적게 용서받은 자의 유한한 크기의 한정된 심장(heart) 안에 있는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tidy, cupidity)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크므로, 그 결과, 동일한 유한한 한정된 크기의 심장(heart) 안에 있는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아가페, 하느님의 사랑)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작게 머물러 있게 되어, 따라서 그러한 죄인은 많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즉, 적게 사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지금 말씀드린 바로부터 다음을 한 개의 따름 정리(Corollary)로서 도출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적게[많이] 용서받은 자는 적게[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은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의 마지막 문장을 포함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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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106, a2, on the contrary 에서도 지금 말씀드린 바가 또한 언급되고 있다. 특히 라틴어본 및 영어본 둘 다의 대응하는 단락들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Ib-101-113.htm#q106a2sc

http://www.newadvent.org/summa/3106.htm#article2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__PAJ.HTM

 

(2) 이 글의 제4항, 그리고 제5항은, 바로 위의 제(1)항의 근거를 제공하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심장(heart)"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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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4-2-3. 그러므로, 지금까지 제4항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회개를 [많이] 하게 되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 회개의 진정성을 인정하시면 하느님의 용서를 [많이] 받게 된다(****)

 

4-2-4.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아래 출처의 글의 제4-1-2항에서 이미 고찰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세례 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용서를 [많이] 받는 자는 피조물인 타인을 [많이] 용서하며,

그리고 그 역은

회개(悔改)/참회(懺悔)를 요구한다(*****).

즉,

세례 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필요조건은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이고

그리고 그 역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를 요구한다. 

 (마태오 복음서 4,17[회개]; 6,12[회개].14-15;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

 

즉,

 

세례 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한 개의 필요조건(a necessary condition)은 

인간의 용서(human forgiveness)이고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divine forgiveness)의 한 개의 충분건(a sufficient condition)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이다.

 (마태오 복음서 4,17[회개]; 6,12[회개].14-15;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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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3세기 중반에 마련된 아래의 신학 대전 IIIa, Supp. q99, a5에서 말하는 "회개(repentance)"는,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 상등통회(上等痛悔)]를 포함한다:
http://www.newadvent.org/summa/5099.htm#articl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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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번 항에서는, 위의 제4항에서 고찰한 바에 근거하여, 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의 내용이, 그 전후 문맥 안에서, 무엇이었는지를 정밀하게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5-1. 우선적으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다" 라는 소제목이 붙은 루카 복음서 7,36-50은 신약 성경의 다른 복음서들에 병행하는 단락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5-2. 그리고 루카 복음서 7,36-50에서, 예수님 이외의 주된 등장 인물들은 죄인인 여자(A)와 당신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바리사이(B), 이렇게 두 명입니다.

 

따라서, 삼자간의 대화, 즉 삼각 관계에 있어서의 대화의 형식으로 마련된 루카 복음서 7,36-50에서, 죄인인 여자로 대표되는 피조물인 인간들의 한 집단(A)과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피조물인 인간들의 한 집단(B) 둘 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한 바는 위의 제4-2-1항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다음과 같습니다:

 

죄인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회개한다.(*)

즉,

회개하는 죄인들 중에서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즉,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인, (*)가 표시된, 바로 위의 이들 세 개의 문장들에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B 이고, "회개하는 죄인"은 A 이며, 그리고 이들 둘 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가르침이 바로 (*) 이므로, 특히 (*)(#)에서 말하는 "회개하는 죄인"은 또한 A 임을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차리도록 등장 인물들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5-2-1. 다른 한편으로, 위의 제4-2-1항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랑의 외면적 드러냄이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임을 우리는 이미 고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역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에는, 일반적으로, 완미한 회개[perfect repentance/contrition, 상등통회(上等痛悔)]불완미한 회개[imperfect repentance/contrition, attrition, 하등통회(下等痛悔)]가 있기 때문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52항과 제1492항).

 

5-2-2.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무런 추가 설명없이, 루카 복음서 7,47의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을 말씀하셨는데,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

 

"그러나" 로 시작하는 이 말씀은, 위의 제4-2-2항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바로 아래의 문장이 의미하는 바에 논리적으로(logically) 포함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하느님으로부터 적게[많이] 용서받은 자는 적게[많이] 사랑한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바로 위의 (%) 문장으로부터 바로 위의 (***) 문장을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을 거쳐 도출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아무런 오류없이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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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106, a2, on the contrary 에서도 지금 말씀드린 바가 또한 언급되고 있다. 특히 라틴어본 및 영어본 둘 다의 대응하는 단락들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Ib-101-113.htm#q106a2sc

http://www.newadvent.org/summa/3106.htm#article2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__PAJ.HTM

 

(2) 이 글의 제4항, 그리고 제5항은, 바로 위의 제(1)항의 근거를 제공하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심장(heart)"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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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따라서, 이 동일한 그리고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의 말씀 (***)루카 복음서 7,47에서의 '바로 직전의 문장'에서 예수님께서, "적게" 대신에 "많이"를 사용하면서, 굳이 반복하여 말씀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현재의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7,47에서처럼,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와 함께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바로 직전의 문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어지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문장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동일한 내용일 필요가 결코 없습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5-2-3. 그런데, 루카 복음서 4,38에서 "죄인인 여자"가 많이 회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 7,47에서 "죄인인 여자"가 큰 사랑을 드러내었음을 예수님께서 직접 인정하셨습니다. 즉, 루카 복음서 4,38에서 죄인인 여자가 하였던 많은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하느님을 위한 사랑(아가페, agape)을 많이 드러낸 것임을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서 7,47에서 직접 인정하셨습니다.

 

게시자 주 5-2-3: 위의 제1항에서 고찰하였던 루카 복음서 7,47에의 그리스어 번역 대본, 라틴어본, 영어본들, 그리고 우리말본들에서, 그리스어 접속사 "hoti" 를 포함하는 문장에서, 이 접속사의 바로 전후의 문장들 중의 한 개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위에 말씀드린 바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독자들께서는, 이 접속사의 두 개의 의미들 어느 것에도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지금 말씀드린 바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서 7,36-50의 문맥안에서, "죄인인 여자"가 하였던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는 곧 하느님을 위한 사랑논리적으로 동치입니다(logically equivalent).

 

5-2-4.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서 7,50에서 죄인인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이 죄인인 여자의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가, 소위 말하는, 완미한 회개[perfect repentance/contrition, 상등통회(上等痛悔)]임을 확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의 제4-2-3항(****)에서, 루카 복음서 7,36-50에 등장하는 죄인인 여자는, 하느님의 은총(grace) 덕택으로, 회심(回心, conversion)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느님을 위한 사랑(아가페)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즉, 완미한 회개[perfect repentance/contrition, 상등통회(上等痛悔)]를 하였기 때문에, 이 회개를 인정하시어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를 루카 복음서 7,47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74.htm

(발췌 시작)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18일]

게시자 주 4-1-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2014년의 경우에 오늘인 9월 18일에 해당하는) 가해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루카 복음서 7,36-50이고, 그리고 이 복음 말씀은 다해 연중 제11주일 복음 말씀(루카 7,36-8,3)에 포함되는데, 특히 제47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위의 제4-1-2항에서 말씀드린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한 개의 충분조건(a sufficient condition)인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를 다음과 같은 문맥 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 ] 안의 표현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가 삽입한 것입니다: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4_thu.htm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1.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47 Man cannot merit forgiveness for his sins because, since God is the offended party, they are of infinite gravity. We need the sacrament of Penance, in which God forgives us by virtue of the infinite merits of Jesus Christ; there is only one indispensable condition for winning God's forgiveness--our love, our repentance. (이하 생략)

 

47.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공로로 얻을 수(merit) 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가해(加害)를 당한 분이시기에, 그의 죄들이 무한한 무거움을 가지고 있기(are of infinite gravity)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merits)들에 의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는, 고해 성사[의화(justification) 되기 위한 적법한 절차로서] 필요로 하며,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단지 한 개의 본질적인 조건(only one indispensable condition)[즉, 충분 조건]이 있는데,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즉, 애덕)(our love)우리의 회개(悔改)/참회(懺悔)(our repentance)[즉, 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니다.(*) (이하 생략)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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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52항과 제1492항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love)"은 하느님을 위한 [초자연적 은총인] "애덕"이라는 사랑(love of charity for God)을 말한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4I.HTM

(발췌 시작)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0일]

1452 When it arises from a love by which God is loved above all else, contrition is called "perfect" (contrition of charity). Such contrition remits venial sins; it also obtains forgiveness of mortal sins if it includes the firm resolution to have recourse to sacramental confession as soon as possible.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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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Cf. Council of Trent (1551): DS 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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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 통회(contrition)는, 그것이 그 이외의(else) 무엇보다도 먼저 바로 그것에 의하여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한 개의 사랑(a love)에 의하여 일어날 때에, "완미(完美)하다(perfect)" 라고 불립니다[애덕에 기인하는 통회(contrition of charity)]. 그러한 통회는 소죄(venial sins)들을 사면하며(remits), 그리고 또한 이 통회는, 만약에 그것이 가능한 한 빨리 도움을 위한 성사적 고백 쪽으로 돌아서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을 포함한다면, 대죄(mortal sins)들의 용서를 획득합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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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트리엔트 공의회 (1551); DS 167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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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1492 Repentance (also called contrition) must be inspired by motives that arise from faith. If repentance arises from love of charity for God, it is called "perfect" contrition; if it is founded on other motives, it is called "imperfect".

 

[또한 통회(痛悔, contrition)이라고 불리는] 회개(悔改)/참회(懺悔)(repentance)는 신덕(faith, 믿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동기들에 의하여 반드시 고무(鼓舞)되어야 합니다(must). 만약에 회개/참회가 하느님을 위한 [초자연적 은총인] 애덕이라는 사랑(love of charity for God)으로부터 일어나면, 그것은 "완미하다(perfect)" 라고 불리며,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다른 동기들 위에 근거를 두게 되면, 그것은 "불완미하다(imperfect)" 라고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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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52항과 제1492항에서 정의되고 있는 이들 용어들은 또한 다음과 같이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는 또한 "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 라고 불리고, 그리고 "불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imperfect repentance)" 는 또한 "하등통회(下等痛悔, imperfect contrition)" 라고 불린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중국 가톨릭용 天主敎英漢袖珍辭典 에 주어진 설명을 보라:
http://www.peterpoon.idv.hk/Resource/Dictionary/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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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면, "사랑(love)"은, (i) "바로 그것에 의하여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한 개의 사랑"애덕(charity, caritas)(ii) 애덕(charity, caritas)의 결여로 정의되는(defined) 사랑(love), 즉, 애덕(charity, caritas)이 아닌 사랑(love), 즉,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love)"인 cupiditas(cupitidy), 이렇게, 비 이원론적으로(non-dualistically), 논리적으로 크게 둘로 구분되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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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2-4: (번역 오류/미숙)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있어, 루카 7,47"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성경 근거라는 구체적인 서술은 다음의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conttrition" 에 대한 설명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 번역 성경" 의 현재의 루카 복음서 7,47 우리말 번역문은, 가톨릭 교회의 이 절에 대한 전통적 과 완전히 달리,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이유로번역 오류/미숙입니다. 아래의 발췌문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글자들을 굵게하고 또 색칠을 하였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4337a.htm

(발췌 시작)

Perfect contrition, with the desire of receiving the Sacrament of Penance, restores the sinner to grace at once. This is certainly the teaching of the Scholastic doctors (Peter Lombard in P.L., CXCII, 885; St. Thomas, In Lib. Sent. IV, ibid.; St. Bonaventure, In Lib. Sent. IV, ibid.). This doctrine they derived from Holy Writ. Scripture certainly ascribes to charity and the love of God the power to take away sin: "He that loveth me shall be loved by My Father"; [요한 복음서 14,21]"Many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hath loved much".[루카 복음서 7,47]. Since the act of perfect contrition implies necessarily this same love of God, theologians have ascribed to perfect contrition what Scripture teaches belongs to charity. Nor is this strange, for in the Old Covenant there was some way of recovering God's grace once man had sinned. God wills not the death of the wicked, but that the wicked turn from his way and live (Ezekiel 33:11). This total turning to God corresponds to our idea of perfect contrition; and if under the Old Law love sufficed for the pardon of the sinner, surely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institution of the Sacrament of Penance cannot be supposed to have increased the difficulty of obtaining forgiveness. That the earlier Fathers taught the efficacy of sorrow for the remission of sins is very clear (Clement in P.G., I, 341 sqq.; and Hermas in P.G., II, 894 sqq.; Chrysostom in P.G., XLIX, 285 sqq.) and this is particularly noticeable in all the commentaries on Luke 7:47. The Venerable Bede writes (P.L., XCII, 425): "What is love but fire; what is sin but rust? Hence it is said, many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has loved much, as though to say, she hath burned away entirely the rust of sin, because she is inflamed with the fire of love." Theologians have inquired with much learning as to the kind of love that justifies with the Sacrament of Penance. All are agreed that pure, or disinterested, love (amor benevolentiæ, amor amicitiæ) suffices; when there is question of interested, or selfish, love (amor concupiscentia) theologians hold that purely selfish love is not sufficient.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욕망과 함께 하는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는 죄인을 은총[의 지위]으로 즉시 회복시킵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스콜라 학파 박사(the Scholastic doctors)들(Peter Lombard in P.L., CXCII, 885; St. Thomas, In Lib. Sent. IV, ibid.; St. Bonaventure, In Lib. Sent. IV, ibid.)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리를 그들은 성경 본문으로부터 도출하였습니다. 확실하게 성경 본문은 다음과 같이 죄를 없애는 힘을 애덕(charity, 아가페)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14,21). "그녀에게 많은 죄들이 용서받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이미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Many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hath loved much)." (루카 복음서 7,47).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의 행위가 하느님의, 바로 이러한, 동일한 사랑을 필연적으로(necessarily) 의미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경 본문이 애덕(charity, 아가페)에 속한다고 가르치는 바를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결코 아닌데, 이는 옛 계약(the Ond Covenant) 안에서 사람이 이미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하는 어떠한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에제키엘 33,11). 하느님께로 바로 이러한 전체적 돌아섬은 완미한 회개(悔改)/참회(懺悔)(perfect repentance)[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라는 우리의 관념(idea)에 대응하며, 그리고 만약에 옛 법(Old Law) 아래에서 사랑(love)이 죄인의 사면을 위하여 충분하였다면,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하여 고해성사의 제정이 용서의 획득함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증가시켰을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없습니다. 초기의 교부들이 죄들의 사면(remission)을 위한 슬픔(sorrow)의 효능을 가르쳤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며 (Clement in P.G., I, 341 sqq.; and Hermas in P.G., II, 894 sqq.; Chrysostom in P.G., XLIX, 285 sqq.) 그리고 이것은 루카 복음서 7,47에 대한 주석들 모두에서 특별히 현저합니다(noticeable). 가경자 베다(the Venerable Bede)는 (P.L., XCII, 425)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사랑(love)이 불(fire)이 아니고 무엇이고, 그리고 죄(sin)가 녹(rust)가 아니고 무엇인지요? 따라서, 왜냐하면 그녀가 사랑(love)이라는 불(fire)로써 불태워졌기 때문에, 마치 그녀가 죄(sin)라는 녹(rust)을 전적으로(entirely) 이미 태워없애 버렸다고 말하듯이, 그녀가 이미 크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많은 죄들이 용서받는다 라고 말해집니다." 신학자들은 고해성사와 함께 어떤 충분한 적법한 이유를 나타내는(justifies) 사랑(love)의 종류에 관하여 많은 학식과 함께 이미 질문을 하였습니다. 모든 신학자들은 순수하거나(pure), 혹은 사욕(私慾) 없는(disinterested), 사랑(amor benevolentiæ, amor amicitiæ)충분하다는(sufficient) 데에 동의하게 되고, 그리고 사욕(私慾) 있는(interested), 혹은 이기적인(selfish), 사랑(amor concupiscentia)에 대한 의문이 있을 때에, 신학자들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사랑(purely selfish love)충분하지 않음(not sufficient)을 견지합니다(hold).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6.

질문 2: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에서와 같은 번역 미숙/오류가 발생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우리말 번역 작업에 종사한 분들께서 다음에 나열된 바들 어느 것들 중의 한 개만 사전에 알았더라도, 그러한 번역 미숙/오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i) 위의 제1항에 나열된 사실들,

(ii) 위의제2항에 전달해 드린 해설,

(iii) 위의 제3항 - 제5항에 제시된 설명들.

혹은

(iv) 다음의 글에서 전달해 드리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 또한 필독 권고

혹은

(v) 다음의 글의 제8항 - 제9항에서 전달해 드리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3.htm <----- 또한 필독 권고

혹은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일]

(vi)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의 본문 중에서 어떠한 전후 문맥 안에서 루카 복음서 7,47이 인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
http://www.newadvent.org/summa/1021.htm#article4

http://www.newadvent.org/summa/3106.htm#article2

http://www.newadvent.org/summa/4049.htm#article1

[이상, 내용 추가 끝]

 

그러므로, 빠른 시일 내에,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공동번역성서"의 대응하는 본문 혹은 이와 등가의 문장으로 바로잡아 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드립니다.

 

즉,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있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전례문, 성경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지침서인,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 [제목: Liturgiam authenticam, 2001년 5월 7일]의 제41항에 따라,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 이, 위의 게시자 주 1-7의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루카 복음서 7,47 등가의 문장(an equivalent statement)이 되도록, 우리말로 다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0.htm <----- 필독 권고

 

특히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을 지역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고 계신 분들의 필독을 적극적으로 권고드립니다.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7.

7-1. 끝으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2사무엘 12,7-10.13, 소제목: 다윗의 회개), 복음 말씀(루카 7,36-8,3), 제2독서(갈라티아 2,16.19-2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좋은 해설을 읽고 묵상하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1.htm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9일]

7-2. 다음은, 서울대교구 연희동 성당 홈페이지 제공의 신부님 강론 게시판 제14번 글[2011년 12월 11일, 가해 대림3주일, 주제: 완덕의 길과 고해성사] 전문입니다. "새 번역 성경" 루카 복음서 7,47(<--- 클릭하십시오)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석에 충실하게 올바르게 번역된 "공동번역성서" 루카 복음서 7,47(<--- 클릭하십시오)을 인용하고 있는, 대단히 좋은 내용이라는 생각에 또한 전달해 드립니다:

http://www.yeonhui.or.kr/upfiles/boardfile/대림_제3주일11-12-11_3849_1.hwp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2일]

7-3. 위의 제7-3항에서 말씀드린 바에 이어서,

질문 3: 루카 복음서 7,47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성경 근거라는 사실을 국내의 가톨릭 교우님들께서 얼마나 알고 계실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여기를 클릭하면(<--- 꼭 클릭하십시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또한 꼭 클릭하십시오), 영어권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에 루카 복음서 7,47상등통회(上等痛悔, perfect contrition)성경 근거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에 대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3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터넷 환경이 국내에 이미 널리 보급된 오늘 날짜에 이르기까지, 언어 장벽과 문화 장벽 등에 기인하는 개념 전달 장애/오류가 국내의 가톨릭계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하여 드린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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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71시간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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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exhortations/documents/
hf_jp-ii_exh_02121984_reconciliatio-et-paenitentia_en.html
 [각주 185]

 

(발췌 시작)
But the essential act of penance, on the part of the penitent, is contrition, a clear and decisive rejection of the sin committed, together with a resolution not to commit it again,(185) out of the love which one has for God and which is reborn with repentance.

 

그러나 뉘우치는 자의 측에서 고해(penance)의 본질적 행위는, 당사자가 하느님을 위하여 가지는 그리고 회개(repentance)와 함께 다시 활동하게 되는(reborn) 사랑(아가페, 애덕) 때문에(out of love), 범하였던 죄에 대한, 또다시 이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어떤 분명한 그리고 단호한 거부인, 참회(contrition)입니다.(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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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Cf Council of Trent, Session XIV De Sacramento Poenitentiae, Chap.4 De Contritione:(#)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ed. cit., 705 (DS 1676-1677).(##) Of course, in order to approach the sacrament of penance it is sufficient to have attrition, or imperfect repentance, due more to fear than to love. But in the sphere of the sacrament, the penitent, under the action of the grace that he receives, "ex attrito fit conmtus[마찰(즉, 불완미한 회개)의 결과로서 그 자신을 완전하게 준비하게 될 것인데]," since penance really operates in the person who is well-disposed to conversion in love: cf Council of Trent, ibid., ed. cit., 705 (DS 1678).(##)

 

185 트리엔트 공의회, Session XIV De Sacramento Poenitentiae, Chap.4 De Contritione:(#)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ed. cit., 705 (DS 1676-1677)(##) 을 참조하라. 당연히, 고해성사에 접근하기 위하여, 사랑(love, 아가페, 애덕)보다 두려워하는 것에 그 원인을 더 돌려야 할(due), 하등통회(下等痛悔), 혹은 불완미한 회개(imperfect repentance)를 하는 것은 충분합니다(sufficient). 그러나, 이 성사의 본분(本分, sphere) 안에서, 뉘우치는 자는, 자신이 받는 은총(grace)의 행위 아래에서, "[마찰(즉, 불완미한 회개)의 결과로서 그 자신을 완전하게 준비하게 될 것인데(ex attrito fit conmtus)," 왜냐하면, 사랑(아가페, 애덕) 때문에(in love) 회심(conversion) 쪽으로 잘 기울어진 인격(the persion)에게 있어, 고해(penance)가 실제로(really)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ibid., ed. cit., 705 (DS 1678)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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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ewtn.com/library/COUNCILS/TRENT14.HTM

(발췌 시작)

CHAPTER IV
CONTRITION

 

Contrition, which holds the first place among the aforesaid acts of the penitent, is a sorrow of mind and a detestation for sin committed with the purpose of not sinning in the future.[16] This feeling of contrition was at all times necessary for obtaining the forgiveness of sins and thus indeed It prepares one who has fallen after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if it is united with confidence in the divine mercy and with the desire to perform the other things that are required to receive this sacrament in the proper manner. The holy council declares therefore, that this contrition implies not only an abstention from sin and the resolution and beginning of a new life, but also a hatred of the old,[17] according to the statement: [18] And certainly he who has pondered those lamentations of the saints: [21] and others of this kind, will easily understand that they issued from an overwhelming hatred of their past life and from a profound detestation of sins. The council teaches furthermore, that though it happens sometimes that this contrition is perfect through charity and reconciles man to God before this sacrament is actually received, this reconciliation, nevertheless, is not to be ascribed to the contrition itself without a desire of the sacrament, which desire is included in it. As to imperfect contrition, which is called attrition, since it commonly arises either from the consideration of the heinousness of sin or from the fear of hell and of punishment, the council declares that if it renounces the desire to sin and hopes for pardon, it not only does not make one a hypocrite and a greater sinner, but is even a gift of God and an impulse of the Holy Ghost, not indeed as already dwelling in the penitent, but only moving him, with which assistance the penitent prepares a way for himself unto justice.

 

And though without the sacrament of penance it cannot per se lead the sinner to justification, it does, however, dispose him to obtain the grace of God in the sacrament of penance. For, struck salutarily by this fear, the Ninivites, moved by the dreadful preaching of Jonas, did penance and obtained mercy from the Lord.[22] Falsely therefore do some accuse Catholic writers, as if they maintain that the sacrament of penance confers grace without any pious exertion on the part of those receiving it, something that the Church of God has never taught or ever accepted. Falsely also do they assert that contrition is extorted and forced, and not free and volu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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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can. 5.

18 Ezech. 18:31.

19 Ps. 50:6.

20 Ps. 6:7.

21 Is. 38:15.

22 Jonas 3:5; Matt. 12:41; Luke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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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

http://www.catho.org/9.php?d=bx3#cdl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qj.htm#b4e

 

(발췌 시작)

1676 Dz 897 Contrition, which has the first place among the aforementioned acts of the penitent, is a sorrow of the soul and a detestation of sin committed, with a determination of not sinning in the future. This feeling of contrition is, moreover, necessary at all times to obtain the forgiveness of sins, and thus for a person who has fallen after baptism it especially prepares for the remission of sins, if it is united with trust in divine mercy and with the desire of performing the other things required to receive this sacrament correctly. The holy Synod, therefore, declares that this contrition includes not only cessation from sin and a resolution and a beginning of a new life, but also hatred of the old, according to this statement: "Cast away from you all your transgressions, by which you have transgressed, and make to yourselves a new heart and a new spirit" (Ez 18,31). And certainly, he who has considered those lamentations of the saints: "To Thee only have I sinned, and have done evil before Thee" (Ps 50,6); "I have labored in my groanings; I shall wash my bed every night" (Ps 6,7); "I will recount to Thee all my years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Is 38,15), and others of this kind, will readily understand that they emanate from a certain vehement hatred of past life and from a profound detestation of sins.

1677 Dz 898 The Council teaches, furthermore, that though it sometimes happens that this contrition is perfect because of charity and reconciles man to God, before this sacrament is actually received, this reconciliation nevertheless must not be ascribed to the contrition itself without the desire of the sacrament which is included in it.

1678 That imperfect contrition [can. 5] which is called attrition, since it commonly arises either from the consideration of the baseness of sin or from fear of hell and its punishments, if it renounces the desire of sinning with the hope of pardon, the Synod declares, not only does not make a person a hypocrite and a greater sinner' but is even a gift of God and an impulse of the Holy Spirit, not indeed as already dwelling in the penitent, but only maying him, assisted by which the penitent prepares a way for himself unto justice. And though without the sacrament of penance it cannot perse lead the sinner to justification, nevertheless it does dispose him to obtain the grace of God in the sacrament of penance. For the Ninivites, struck in a salutary way by this fear in consequence of the preaching of Jonas which was full of terror, did penance and obtained mercy from the Lord (cf. Jon 3). For this reason, therefore, do some falsely accuse Catholic writers, as if they taught that the sacrament of penance confers grace without any pious endeavor on the part of those who receive it, a thing which the Church of God has never taught or pronounced. Moreover, they also falsely teach that contrition is extorted and forced, and that it is not free and voluntary [ca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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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굿뉴스 서버 제공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참회/회개(repentance)"에 대한 설명: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378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일]  

다음은, Dictionary of the Liturgy (New York, 1989) (원저자: Jovian Peter Lang)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례 사전"(주비언 피터 랑 지음, 박요한 영식신부 옮김,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에 주어진 상등통회(上等痛悔, Contrition)에 대한 설명입니다:

 

츨처 1: http://www.liturgynmusic.com/board/dic_bd/read.php3?code=dic_bd&page=1&number=
196&article_num=19&key=&keyfield=&type=12
 [김종헌 신부님의 전례&전례음악 홈페이지 제공]

출처 2: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8523

(발췌 시작)

상등통회(上等痛悔, Contrition)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하며 지은 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슬퍼하고 혐오하는 '완전한 뉘우침'이다. 상등 통회는 고해성사의 네 가지 구성 요소 가운데 첫째 부분이며, 통회에 이어 고백, 보속 그리고 사죄경이 따라온다.

인간 조건, 예를 들어 수치심이나 직장을 잃은 것으로 인해 죄를 아파하는 것은 '자연적인' 통회인데, 이것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에 충분하지 않다. '초자연적인'통회(곧 상등 통회)는 신앙의 동기, 곧 우리가 거스른 하느님의 선하심과 하느님의 정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를 거슬러 쉽게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통회가 '완전한' 통회가 되려면 슬픔의 동기가 최고의 선이시며 우리를 가장 잘 돌보시는 하느님에 대한 참사랑에서 유래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그분을 거슬렀으며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해야 한다. 이런 통회를 완전한 통회라고 하는 까닭은 통회의 가장 완벽한 최상의 동기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적인 통회 행위는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라는 기도로 통회의 정을 드러낸다.

초자연적인 통회가 신앙의 동기에서 유래하지만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통회이다. 이 점 역시 전통적인 통회 행위에 내포되어 있다. "천국을 잃어 버릴까 두려워하고 연옥의 아픔을 무서워하였기에…." 그와 같은 동기는 만약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으면, 또 그분만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하느님으로부터 마땅히 벌을 받을 것(현세와 내세에)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고해성사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통회(하등 '통회'라고도 함)만 있어도 충분하다.

실제적인 면에서 볼 때 상등 통회는 흔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오롯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신뢰하기도 한다. 사랑이 클수록 두려움은 그만큼 작아진다.

고해성사 예식(告解聖事 禮式 Penance, Rite of) 참조

(이상, 발췌 끝)

 

다음은, Dictionary of the Liturgy (New York, 1989) (원저자: Jovian Peter Lang)을 우리말로 번역한, "전례 사전"(주비언 피터 랑 지음, 박요한 영식신부 옮김,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에 주어진 하등통회(下等痛悔, Attrition)에 대한 설명입니다:

 

츨처 1: http://www.liturgynmusic.com/board/dic_bd/read.php3?code=dic_bd&page=1&number=
197&article_num=18&key=&keyfield=&type=12
 [김종헌 신부님의 전례&전례음악 홈페이지 제공]

출처 2: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8524

(발췌 시작)

하등통회(下等痛悔, Attrition)

 

죄를 지은 데 대한 슬픔으로서 신앙에 기반을 두지만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동기에서 생겨나는 '불완전한 뉘우침'이다. 뉘우침만으로도 화해의 성사, 어른 세례 그리고 고해하러 갈 수 없을 때에는 병자성사에서 죄의 용서를 받기에 충분하다. 뉘우침을 위한 몇 가지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천국에 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지옥의 고통,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징벌이나 죽을 때에 하느님의 징벌, (2) 하느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역하였다는 감정, (3) 잃어버린 상급이나 은총에 대한 후회.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1일]

루카 복음서 7,47을 인용히는 교부(Church Fathers)들의 문헌들:

"luke 7:47" "church fathers" site:newadvent.org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번역문이 포함된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을 발췌 인용하지 않으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letters/documents/
hf_jp-ii_apl_15081988_mulieris-dignitatem_en.html

(발췌 시작)
This is the case with the "sinful" woman in the Pharisee's house, whose way of acting is taken by Jesus as the starting-point for explaining the truth about the forgiveness of sins: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Lk 7:47).(*)

 

-----

(*) 게시자 주:

(1) 위 문헌의 프랑스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letters/documents/
hf_jp-ii_apl_15081988_mulieris-dignitatem_fr.html

(발췌 시작)

la réprobation encourue dans l'opinion commune, entre dans la maison du pharisien pour répandre de l'huile parfumée sur les pieds de Jésus. Celui-ci dira d'elle à son hôte scandalisé par ce geste: «Ses nombreux péchés lui sont remis, parce qu'elle a montré beaucoup d'amour» (cf. Lc 7, 37-47).
(이상, 발췌 끝)

 

(2) 위 문헌의 스페인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letters/documents/
hf_jp-ii_apl_15081988_mulieris-dignitatem_sp.html

(발췌 시작)

He aquí otra figura de mujer: la de una pecadora pública que, a pesar de la opinión común que la condena, entra en casa del fariseo para ungir con aceite perfumado los pies de Jesús. Este, dirigiéndose al huésped que se escandalizaba de este hecho, dirá de la mujer: «Quedan perdonados sus muchos pecados, porque ha mostrado mucho amor» (cf. Lc 7, 37-47).
(이상, 발췌 끝)

 

(3) 위 문헌의 이탈리아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letters/1988/documents/
hf_jp-ii_apl_19880815_mulieris-dignitatem_it.html

(발췌 시작)

Ecco poi una pubblica peccatrice, che, nonostante la condanna da parte dell'opinione comune, entra nella casa del fariseo per ungere con olio profumato i piedi di Gesù. All'ospite che si scandalizzava di questo fatto egli dirà di lei: «Le sono perdonati i suoi molti peccati, perché ha molto amato» (cf. Lc 7, 37-47).


(4) 위 문헌의 라틴어 정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post_letters/1988/documents/
hf_jp-ii_apl_19880815_mulieris-dignitatem_lt.html

(발췌 시작)
En, postea, publica peccatrix quae, quamvis eam sensus communis reprehendat, domum Pharisaei ingreditur ut pedes Iesu ungat unguento. Hic inospiti, offenso in ea re, dixit de illa: “Remissa sunt peccata eius multa, quoniam dilexit multum” (Cfr. Luc. 7, 37-47).
(이삳,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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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번역문이 포함된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을 발췌 인용하지 않으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2000/documents/
hf_jp-ii_aud_20000809_en.html

(발췌 시작)

This is also what happened with the repentant woman sinner whose sins were forgiven "because she loved much" (Lk 7: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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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위 문헌의 프랑스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2000/documents/
hf_jp-ii_aud_20000809_fr.html

(발췌 시작)
C'est ce qui arrive également à la pécheresse repentie à laquelle sont pardonnés ses péchés "parce qu'elle a montré beaucoup d'amour" (Lc 7, 47)

(이상, 발췌 끝)

 

(2) 위 문헌의 스페인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2000/documents/
hf_jp-ii_aud_20000809_sp.html

(발췌 시작)
Así acontece también a la pecadora arrepentida, a la que se le perdonan los pecados "porque ha amado mucho" (Lc 7, 47)

(이상, 발췌 끝)

 

(3) 위 문헌의 이탈리아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2000/documents/
hf_jp-ii_aud_20000809_it.html

(발췌 시작)
Così succede pure alla peccatrice pentita alla quale vengono perdonati i peccati “perché molto ha amato” (Lc 7,47)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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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인과(cause and effect) 관계가 뒤바뀐 번역문이 포함된 NAB(New American Bible) 루카 복음서 7,47을 발췌 인용하지 않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3/documents/
papa-francesco_20130616_omelia-evangelium-vitae.html

(발췌 시작)

2. Today’s Gospel brings us another step forward. Jesus allows a woman who was a sinner to
approach him during a meal in the house of a Pharisee, scandalizing those present. Not only does he let the woman approach but he even forgives her sins, saying: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Lk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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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위 문헌의 프랑스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fr/homilies/2013/documents/
papa-francesco_20130616_omelia-evangelium-vitae.html

(발췌 시작)

2. Le passage de l’évangile d’aujourd’hui nous fait faire un pas en avant. Jésus rencontre une femme pécheresse durant un repas dans la maison d’un pharisien, suscitant le scandale de ceux qui sont présents : Jésus se laisse approcher par une pécheresse et même lui remet les péchés, disant : « Si ses nombreux péchés sont pardonnés, c’est à cause de son grand amour. Mais celui à qui on pardonne peu montre, montre peu d’amour » (Lc 7,47).

(이상, 발췌 끝)

 

(2) 위 문헌의 스페인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s/homilies/2013/documents/
papa-francesco_20130616_omelia-evangelium-vitae.html

(발췌 시작)

2. El pasaje evangélico de hoy nos hace dar un paso más. Jesús encuentra a una mujer pecadora durante una comida en casa de un fariseo, suscitando el escándalo de los presentes: Jesús deja que se acerque una pecadora, e incluso le perdona los pecados, diciendo: «Sus muchos pecados han quedado perdonados, porque ha amado mucho, pero al que poco se le perdona, ama poco» (Lc 7,47).

(이상, 발췌 끝)

 

(3) 위 문헌의 이탈리아어본의 대응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homilies/2013/documents/
papa-francesco_20130616_omelia-evangelium-vitae.html

(발췌 시작)

2. Il brano del Vangelo di oggi ci fa fare un passo avanti. Gesù incontra una donna peccatrice durante un pranzo in casa di un fariseo, suscitando lo scandalo dei presenti: Gesù si lascia avvicinare da una peccatrice e addirittura le rimette i peccati, dicendo: «Sono perdonati i suoi molti peccati, perché ha molto amato. Invece colui al quale si perdona poco, ama poco» (Lc 7,47).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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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교황청 소속 성직자들(주: 여기에는 교황님도 포함됨)을 위한 홈페이지(http://www.clerus.org) 제공의 RSV(Revised Standard Version) 루카 복음서 7,36-50: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f1g.htm#bo

(발췌 시작)

A Sinful Woman Forgiven

 

36One of the Pharisees asked him to eat with him, and he went into the Pharisee's house, and took his place at table. 37And behold, a woman of the city, who was a sinner, when she learned that he was at table in the Pharisee's house, brought an alabaster flask of ointment, 38and standing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the hair of her head, and kissed his feet, and anointed them with the ointment.
39Now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it,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have known who and what sort of woman this is who is touching him, for she is a sinner." 40 And Jesus answering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say to you." And he answered, "What is it, Teacher?" 41"A certain creditor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42When they could not pay, he forgave them both. Now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43Simon answered, "The one, I suppose, to whom he forgave more." And he said to him, "You have judged rightly."
44Then turning toward the woman he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entered your house, you gave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45You gave me no kiss, but from the time I came in she has not ceased to kiss my feet. 46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she has anointed my feet with ointment. 47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48And he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49Then those who were at table with him began to say among themselves, "Who is this, who even forgives sins?" 50And he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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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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