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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의 도래[성령강림]가 교회의 탄생 조건 및 시점 -한국 천주교 창립 시점 1293_evangelize 1095_ 163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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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ㅣ No.1639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용 추가 일자: 2024-05-11]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9.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이상, 2024-05-11일자 내용 추가 끝]

 

 

질문 1: 지상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탄생 조건(condition)은 무엇이고 그리고 탄생 시점(time)은 언제입니까? 세 개의 입문 성사들 중의 첫 번째인 세례(Baptism), 즉, 수세(水洗, baptism of water)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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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0. 질문 1: 지상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탄생 조건(condition)은 무엇이고 그리고 탄생 시점(time)은 언제입니까? 세 개의 입문 성사들 중의 첫 번째인 세례(Baptism), 즉, 수세(水洗, baptism of water)입니까???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시작: 결코 아닙니다. 그 조건과 그 시점은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입니다. 즉, 교회의 탄생의 유일한 본질(本質)적 수반 조건(the condition of the essential involvement)과 시점은, 하느님에 의하여서만이 오로지 주관되고 개시되는,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라는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order)에 있어, 하느님에 의하여서만이 오로지 주관되고 개시되는 본질적 수반 조건인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에 의하여 지상에 이미 현존하게 된, 즉, 지상에 이미 탄생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바로 이 교회의 부름에 화답하는 피조물들인 인간들이 이 교회의 구성원/지체들이 될 수 있도록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련된, 후건(後件)적 수반 조건(condition of the consequent involvement)이 바로, 한 개의 가시적 성사(a visible sacrament)인, 세례(Baptism), 즉, 수세(the baptism of water)임에 반드시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례를 받은 이가 다른 이에게 세례를 주는 행위(act)는, 소위 말하는, 복음화(evangelization), 즉, 선교/전교의 한 과정이지, 설사 백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행위 자체가 지상에 교회의 현존/탄생을 정의하는(define)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라는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에 의하여 이미 탄생하게 된 교회의 구성원들을 증가시키는 행위일 뿐이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특정 지역 교회의 탄생 시점을 논하면서도,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에 의하여만 오로지 지상에 현존하게 되는 바로 그 교회가, 해당 지역에 고유한(proper), 본질(本質)적 수반 조건으로서, 한 개의 비가시적 지역 교회로서 특정 지역에 이미 도달하여 현존하고 있는 시점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 주장들은, 결국에,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설득력을 획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9월 7일]

1-1. 그리고 지금 드리는 이 지적의 첫 번째 근거로서 우리는,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79년 강론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의 제정자이시고 또한 집행자이신, 수위권과 재치권을 가지고 계신, 교황님께서 "물로 씻는 세례(수세)가 교회의 탄생의 조건이다" 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심에 받드시 주목하십시오. 대신에, "성령 강림[the descent of the Spirit,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은 교회의 시작을 표시합니다(marks)."  라는 교황 교도권(가르침)을 반드시 숙지하십시오:

 

출처: https://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homilies/1979/documents/
hf_jp-ii_hom_19790603_polonia-gniezno-cattedrale.html

(발췌 시작)

2. Once again the day of Pentecost has come, and we are spiritually present in the Jerusalem upper room, while at the same time we are present here in this upper room of our Polish Millennium, in which we hear as forcefully as ever the voice of the mystery-filled date of that beginning from which we start to count the years of the history of our motherland and of the Church that has been made part of it. The history of Poland ever faithful.

 

2. 다시 한 번 더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는 이미 왔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예루살렘 위층 방에 영성적으로 참석하며, 한편으로 동시에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거기로부터 우리의 모국의 및 이 모국의 일부가 이미 되어버린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의 해들을 세기(count) 시작하는 바로 그 시작의, 신비로 채워진, 날짜(date)의 음성을 언제나(ever) 강력하게 듣는, 우리의 폴란드 천 년(our Polish Millennium)의 바로 이 위층 방에 참석합니다. 언제나 충실한 폴란드의 역사.

 

On the day of Pentecost, in the Jerusalem upper room, the promise is fulfilled that was sealed with the blood of the Redeemer on Calvary: "Receive the Holy Spirit.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 they are forgiven;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 they are retained" (Jn 20:22-23). The Church is born precisely from the power of these words. The Church is born of the power of this breath. After it had been prepared during the entire life of Christ, the Church is definitively born when the Apostles receive from Christ the gift of Pentecost, when they receive from him the Holy Spirit. The descent of the Spirit marks the beginning of the Church, which throughout all generations must bring mankindboth the individuals and the nationsinto the unity of the Mystical Body of Christ.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means the beginning of this mystery and also its continuance. For the continuance is a constant return to the beginning. [...].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의 날에, 예루살렘 위층 방에서, 십자가 위에 계신 구속주의 피로써 봉하여졌던 이 약속은 다음과 같이 구현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복음서 20,22-23). 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의 힘으로부터 정확하게 태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숨의 힘으로부터 태어나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전체 삶 동안에 준비되어 온 후에, 교회는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이라는 선물을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때인, 그들이 그분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때에, 명확하게(definitely) 태어나게 됩니다. 성령 강림[the descent of the Spirit,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은 교회의 시작을 표시하는데(marks), 이 시작은 모든 세대들에 걸쳐, 개인들과 나라들 둘 다인, 인류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단일성(unity) 안쪽으로 반드시 데려와야 합니다. 성령 강림[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은 바로 이 신비의 시작을 그리고 또한 이 신비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연속은 이 시작 쪽으로 어떤 지속적인 되돌아감(a constant return)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5년 9월 7일자 내용 추가 끝]


[2018년 5월 19일자 내용 추가]

게시자 주 1-1: (1)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91년 10월 2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제목: THE BIRTH OF THE CHURCH AT PENTECOST, 성령 강림일에 교회의 탄생]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it/audiences/1991/documents/hf_jp-ii_aud_19911002.html [이탈이아어본]

http://web.archive.org/web/20080426000833/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alpha/data/aud19911002en.html [영어본]

http://totus2us.com/vocation/jpii-catechesis-on-the-church/the-birth-of-the-church-at-pentecost [영어본]

http://www.totus2us.co.uk/teaching/jpii-catechesis-on-the-church/the-birth-of-the-church-at-pentecost/ [영어본, 새 주소(추가일자: 2021년 5월 23일)]

https://westcoastprolife.wordpress.com/pentecost-the-birth-of-the-church [영어본]

 

(2) 그리고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에 의하여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음, 즉, 교회의 현로(顯露)/현시(顯示)/드러내어짐(manifestation)에 대한 가르침은,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726항제1076항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5월 25일]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우리말본이 아닌,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해당 항들을 학습하고도록 하십시오. [이상, 2021년 5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3) 특히, 교의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한, "세례에 의하여 지역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는 (고)최석우 몬시뇰의 주장에 혹시 지금까지 동조(同調)해 온 서울대교구 소속의 성직자들 및 교회사 연구자들께서는, 바로 위에서 추가적으로 안내해 드린 바를 또한 꼭 여러 번 필독하신 후에, 이 글에서 전달해 드리는 교황 교도권의 가르침에, 무조건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2018년 5월 19일자 내용 추가 끝]

 

1-2.  그리고 지금 드리는 이 지적의 두 번째 근거로서 우리는,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성경 학자이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의 제정자이시고 또한 집행자이신, 수위권과 재치권을 가지고 계신, 교황님께서 "물로 씻는 세례(수세)가 교회의 탄생의 조건이다" 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심에 받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speeches/2012/october/documents/
hf_ben-xvi_spe_20121008_meditazione-sinodo.html
 [2012년 10월 8일]

(발췌 시작)
Pentecost is the condition of the birth of the Church: only because God acted first, are the Apostles able to act with him and make what he does present. God has spoken and this “has spoken” is the perfection of faith but it is also always a present: the perfection of God is not only a past, because it is a true past that always carries in itself the present and the future. God has spoken means: “He speaks”. And as at that time it was only on God’s initiative that the Church could be born, that the Gospel could be known, the fact that God spoke and speaks, in the same way today only God can begin, we can only cooperate, but the beginning must come from God. [...] Therefore, it is important always to know that the first word, the true initiative, the true activity comes from God and only by inserting ourselves into the divine initiative, only by begging for this divine initiative, shall we too be able to become — with him and in him — evangelizers. God is always the beginning, and it is always only he who can make Pentecost, who can create the Church, who can show the reality of his being with us. On the other hand, however, this God, who is always the beginning, also wants to involve our activity, so that the activities are theandric, so to speak, made by God, but with our involvement and implying our being, all our activity.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다음과 같이 교회탄생의 조건입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첫 번째로 행동하셨기(acted) 때문에, 사도들은 그분과 함께 행동하는 것과 그리고 그분깨서 행하시는 바를 현존하게 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그리고 바로 이 "이미 말씀하셨음"은 신앙(faith)의 완미(perfection)이고 다만(but) 그것은 다음과 같이 또한 항상 한 개의 현재(a present)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완미(perfection)는 오로지 한 개의 과거만인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현재와 미래를 지니는(carries), 한 개의 참인(true)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음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에 교회가 태어나게 될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알려지게 될 수 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고 그리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오로지 바로 하느님의 주도에서였던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 오로지 하느님만이 시작하실 뿐이고, 우리는 오로지 협조할 수 있을 뿐이며, 다만(but) 그 시작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 그러므로, 첫 번째 말씀(the first word), 참인 주도(the true initiative), 참인 활동(the true activity)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그리고 이 신성적 주도(the divine initiative) 안쪽으로 우리 자신들을 오로지 삽입함(inserting)으로써, 바로 이 신성적 주도(the divine initiative)를 오로지 간청함(begging)으로써, 우리가 또한,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evantelizers)이 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게 됨을 항상 알고 있는(know)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시작(the beginning)이시고, 그리고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굘서 제692항 참조)]마련하실 수 있으신 분, 교회를 창립(創立)하실(create Church) 수 있으신 분,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실재(reality)를 보여줄 수 있으신 분은, 힝싱 오로지 그분 뿐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항상 시작이신 분인 바로 이 하느님께서는 또한, 이 활동들이, 말하자면, 다만(but) 우리의 개입 및 우리의 활동 모두인 우리의 있음을 의미함 뿐임과 함께, 하느님에 의하여 마련된,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가지도록 하시고자, 우리의 활동에 개입하시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3. 지금 드리는 이 지적의 세 번째 근거로서 우리는,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의 제정자이시고 또한 집행자이신, 수위권과 재치권을 가지고 계신, 교황님께서 "물로 씻는 세례(수세)가 교회의 탄생의 조건이다" 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심에 받드시 주목하십시오. 대신에예루살렘 소재 위층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 강림[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교회의 탄생을 나타낸다고 가르치십니다:

 

출처: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en/angelus/2014/documents/
papa-francesco_regina-coeli_20140608.html
 [2014년 6월 8일자 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 말씀 (제목: Regina Caeli)의 시작 첫 단락]

(발췌 시작)

The Feast of Pentecost commemorates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on the Apostles gathered in the Upper Room. Like Easter, this event took place on a preexisting Jewish feast and ended with a surprise. The Acts of the Apostles describes the signs and fruits of that extraordinary outpouring: the strong wind and tongues of fire; fear disappeared, leaving courage in its place; tongues melted and everyone understood the message. Wherever the Spirit of God reaches, everything is reborn and transfigured. Pentecost is the event that signals the birth of the Church and her public manifestation; and two features strike us: the Church astounds and confuses.

 

성령 강림 대축일은 위층 방에 모여있던 [백스무 명가량의] 사도들 위에 내린 성령의 분출/다량의 주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을 기념합니다. 부활절(Easter)처럼, 바로 이 사건은 한 개의 사전에 존재해온(preexisting) 유다교 축제에서 발생하였으며 그리고 한 개의 놀라움(a surprise)과 함께 끝났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비상한 분출/다량의 주어짐의 표징(signs)들과 열매(fruits)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거센 바람과 불꽃 모양의 혀들;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용기를 남김; 녹게된 혀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 메시지를 이해함. 하느님의 거룩한 영(the Spirit of God)께서 도달하는 곳 어디든지, 모든 사물은 다시 태어나게 되고(reborn) 그리하여 변모하게 됩니다(transfigured).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교회의 탄생을 그리하여 교회의 공적 현로(顯露)/현시(顯示)/드러내어짐(manifestation)을 나타내며(signals), 그리고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특징들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릅니다(strike): 이 교회[즉, 이렇게 탄생하게 된 교회]가 놀랍게 하고(astounds)(사도행전 2,7)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합니다(confuses)(사도 행전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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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바로 이 설명은, 사도행전 2,2-7의 바로 직전 기록인 사도행전 2,1-4 동안에 교회가 성경 강림에 의하여 탄생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음에 꼭 주목하라.

 

특히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에 의한 교회의 탄생 시점에서, "세 개의 입문 성사들 중의 첫 번째인 세례(Baptism), 즉, 수세(水洗, baptism of water)"가 아니라바로 이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를 하느님이신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은 자들[즉, 화세(火洗, baptism of desire/baptism of fire/baptism of the Holy Spirit)(#1)를 받은 자들]은 백스무 명가량이었는데, 그러나, 성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세례(Baptism)를, 즉, "세 개의 입문 성사들 중의 첫 번째인 세례(Baptism)"를, 즉, 수세(水洗, baptism of water)(#2)하느님을 대신하여 줌으로써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는 기록은,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에 의하여 지상에 탄생하게 된 바로 이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4-36) 이후인, 사도행전 2,41에 기록되어 있음을 또한 반드시 잊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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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1) 비록 "세례성사(the sacrament of baptism)"로 불리지 않으나 그러나 "화세(火洗, baptism of desire/baptism of fire/baptism of the Holy Spirit)"가 세 가지 종류의 세례들 중의 하나임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Ia, q66, a12IIia, q68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8항에 주어진 가르침들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0.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16.htm <----- 필독 권고

http://www.newadvent.org/cathen/02258b.htm [영어 가톨릭 대사전]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c1258.htm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8항]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7일]

(2) 특히 반드시 주목할 바는,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 즉,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를 처음으로 공표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보다 무려 700년 전에 이미,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바가 결코 아닌, "화세(火洗, baptism of desire/baptism of fire/baptism of the Holy Spirit)"가 가톨릭 교회의 세 가지 종류의 세례들 중의 하나임을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Ia, q66, a12IIia, q68 이 가르치고 있음이다.

 

(3) 따라서,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다음과 같은 최석우 신부1991년 경의 주장은 가히 어불성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출처: http://samok.cbck.or.kr/content/sub0106.asp?idx=5595&page=1&keyword
=&year=&month=&booknumber=144

(발췌 시작)
화세나 혈세 또한 신학적으로 비그리스도인의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교회 밖에서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세례밖에서의 구원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 발췌 끝)

[이상, 2015년 6월 27일자 내용 추가 끝]

 

(#2) 번역자 주: 바로 이 수세(水洗, baptism of water)는,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1784년에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 등에서 입교를 원하는 자들에게 주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진 세례인 ‘대세’(代洗)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내용 보강 및 수정 일자: 2021년 5월 25일]

 

다른 한편으로,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대세’(代洗)를 받기 이전의 시점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desire)으로 이벽(李檗, 1754-1785년)과 함께 가톨릭 교리 학습을 이미 시작하였던 자들은 그러한 욕망을 가진 자들의 영혼 안에 이미 도달해 계셨던 성령으로부터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인, 소위 말하는, 화세(火洗, baptism of desire/baptism of fire/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직접 이미 받은 것이며, 그리고, 성령은 교회의 영이기 때문에, 바로 이 화세(火洗)를 준 거룩한 인격체로서 한 개의 비가시적인 지역 교회가, 초기 교회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현재의 교회법적 그 구성 요건들을 다 드러내지 못한 한 개의 씨앗(a seed)으로서, 초기 교회 시절의 한 개의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형태로서[1770년대였다고 추정되고 있는] 어느 시점에 [이벽의 수양처/독서처였던(정약용)](*) 국내의 경기도 소재 천진암에, 이미 도달하여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 시작함으로써, 이승훈 베드로에 의한 ‘대세’(代洗) 시작 시점인, 1784년 이전에, 이미 필연적으로 현존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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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2021년 5월 21일자로, 지금의 [] 안의 내용으로 내용 바로잡음/보강됨.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글을 읽을 수 있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1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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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1-3: 여기까지 작성한 다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를 찾아보았더니, 이번 글의 <<부록>>으로 아래에 첨부한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분 모두가 아래의 부록[제목: 한국 천주교회 창립 1779년인가 1784년인가?; 게재지: 사목, 1991년 1월호; 저자: 변기영]을 반드시 여러 번 읽을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린다.

(이상, 게시자 주 끝)

 

바로 위의 지적에서,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대세’(代洗)를 받음으로써, 그 안쪽으로 이들 대세자들이 참여하고자(participate in) 욕망하는(desire), 따라서 ‘대세’(代洗)의 시점보다 먼저/전건적으로 현실태적 있음(actual being, 현실유, 現實有), 즉, 존재(existance)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 그 무엇(something)이 바로, 대세자들 앞에 이미 먼저 도달해 있는 교회, 즉, 우리나라 조선의 지역 교회, 즉, 위의 문맥 안에서, 초기 교회의 시절의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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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간략한 답변 끝)

 

2.

2-1. 이번 항에서는, 초기 교회 시설에 예수님의 제자들 120명이 받았던 소위 말하는 "화세(火洗, baptism of desire/baptism of fire/baptism of the Holy Spirit)"가 또한 세례의 한 종류임을 모르고 있었는지, 하여튼 중대한 오류가 없다고 아니할 수 없는, 다음에 발웨된 글을 우선적으로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예를 들어, 이 발췌문이 이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과 얼마나, 어느 정도, 모순되는지 정밀하게 고찰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nh_035_0020&fileName=nh_035_0020.pdf [제97쪽 각주 34 전문]

(발췌 시작)

천주교성직자로 교회사가인 崔奭祐신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未信者가 가톨릭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聖洗聖事를 받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洪儒漢과 李檗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성세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새 교회법이 예비자들에게도 종래 신자들에게만 주어졌던 장례식 같은 권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법상의 권리이고 성세성사의 은총과 교회의 구원 은총에 까지 참여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홍유한이나 이벽은 아직 교회 안에까지 들어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멤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교회공동체가 될 수는 없었다…」走魚寺(天眞庵-필자추가)의 講學은 한국교회의 기원일 수 없다(崔奭祐,《韓國敎會史의 探究》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2쪽).

(이상, 발췌 끝)

 

2-2. 다음은 2014년 8월 20일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이 강른 말씀은, 2014년 8월 중에 우리나라에서 거행되었언 시복식 이후, 로마 시국으로 귀국하신 후의 첫 강론 말씀이신데, 한국 천주교회가 이벽(李檗, 1754-1785년) 및 몇 명의 젊은 양반들로 구성되었던 한 개의 집단(a group)에 의하여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창립되었는지를 재차 다시 대단히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특히 아래의 게시자 주 2-2에 발췌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에 어떠한 종류의 번역 오류들이 있는지, 여러 지역 언어본들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우리말 번역문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실 것을 꼭 요청드립니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audiences/2014/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20_udienza-generale.html
 [이탈리아어본]

(발췌 시작)

La Chiesa in Corea custodisce anche la memoria del ruolo primario che ebbero i laici sia agli albori della fede, sia nell’opera di evangelizzazione. In quella terra, infatti, la comunità cristiana non è stata fondata da missionari, ma da un gruppo di giovani coreani della seconda metà del 1700, i quali furono affascinati da alcuni testi cristiani, li studiarono a fondo e li scelsero come regola di vita. Uno di loro fu inviato a Pechino per ricevere il Battesimo e poi questo laico battezzò a sua volta i compagni. Da quel primo nucleo si sviluppò una grande comunità, che fin dall’inizio e per circa un secolo subì violente persecuzioni, con migliaia di martiri. Dunque, la Chiesa in Corea è fondata sulla fede, sull’impegno missionario e sul martirio dei fedeli laici.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s/audiences/2014/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20_udienza-generale.html
 [스페인어본]

(발췌 시작)

La Iglesia en Corea custodia también la memoria del papel primario que tuvieron los laicos tanto en los albores de la fe como en la obra de evangelización. En esa tierra, en efecto, la comunidad cristiana no fue fundada por misioneros, sino por un grupo de jóvenes coreanos de la segunda mitad del año 1700, quienes quedaron fascinados por algunos textos cristianos, los estudiaron a fondo y los eligieron como regla de vida. Uno de ellos fue enviado a Pekín para recibir el bautismo y luego ese laico bautizó a su vez a sus compañeros. De ese primer núcleo se desarrolló una gran comunidad, que desde el inicio y por casi un siglo sufrió violentas persecuciones, con miles de mártires. Así, pues, la Iglesia en Corea está fundada en la fe, en el compromiso misionero y en el martirio de los fieles laicos.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fr/audiences/2014/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20_udienza-generale.html
 [프랑스어본]

(발췌 시작)

L’Eglise qui est en Corée conserve également la mémoire du rôle fondamental qu’eurent les laïcs, tant à l’aube de la foi que dans l’œuvre d’évangélisation. En effet, sur cette terre, la communauté chrétienne n’a pas été fondée par des missionnaires, mais par un groupe de jeunes coréens de la deuxième moitié du XVIIIe siècle, qui furent fascinés par certains textes chrétiens. Ils les étudièrent à fond et les choisirent comme règle de vie. L’un d’eux fut envoyé à Pékin pour recevoir le Baptême, puis ce laïc baptisa à son tour ses compagnons. A partir de ce premier noyau se développa une grande communauté, qui dès le début et pendant environ un siècle, subit de violentes persécutions, avec des milliers de martyrs. L’Eglise qui est en Corée est donc fondée sur la foi, sur l’engagement missionnaire et sur le martyre des fidèles laïcs.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audiences/2014/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20_udienza-generale.html
 [영어본]

(발췌 시작)

In Korea the Church also safeguards the memory of the primary role played by lay people, both at the dawn of the faith and in the work of evangelization. In that land, in fact, the Christian community was not founded by missionaries but by a group of young Koreans in the latter half of the 1700s. They were captivated by several Christian texts which they studied in depth and chose as their rule of life. One of them was sent to Peking to receive Baptism and then this layman baptized his companions. From that first core a great community developed, which from the very start and for about a century was subjected to violent persecution, with thousands of martyrs. Thus, the Church in Korea was founded on faith, on missionary commitment and on the martyrdom of the lay faithful.

(이상, 발췌 끝)

 

(졸번역 시작) 

한국에 있어 교회는, 이 신앙의 새벽에(at the dawn of the faith) 그리고 복음화(evangelization)의 노동(work)에 있어, 평신도 백성에 의하여 행하여졌던 주된 역할(primary role)에 대한 기억을 또한 동등하게 보존합니다(conserve également).(##1) 바로 이 땅 안에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the Christian community)가 1700년대의 후반부에 선교사들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젊은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집단(a group)에 의하여 창립(創立)되었읍니다(was founded). 그들은 몇 권의 그리스도교 저서들에(##2) 의하여 [심장이] 사로잡혔는데, 이 저서들을 그들은 깊이 있게 학습/연구하였고 그리고 삶에 있어서의 자신들의 규칙(rule)으로서 선택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한 명(##3)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북경(Peking)으로 보내졌으며(##4) 그런 다음에 바로 이 평신도[즉, 이승훈 베드로]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바로 이 첫 번째 [ce premier noyau][집단](##5)으로부터 한 개의 커다란 공동체(a great community)가 이미 발전하였는데, 이 공동체는 바로 그 시작부터 약 한 세기[즉, 100년] 동안, 수천 명의 순교자들을 가지는(with), 난폭한 박해를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한국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Koera) 열심 평신도들의 신앙(la foi) 위에, 선교 개입(l’engagement missionnaire) 위에 그리고 순교(le martyre) 위에 창립(創立)되었던 것입니다(was foun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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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바로 이 "평신도 백성에 의하여 행하여졌던 주된 역할(primary role)에 대한 기억을 또한 동등하게 보존합니다(conserve également)" 라는 말씀의 의미는, 2014년 8월 14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바로 그날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를 방문하시여, 한국 주교님들께 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우리나라 방문 기간 중의 첫 번째 강론 말씀에서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출처 1: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it/speeches/2014/august/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14_corea-incontro-vescovi.html
 [이탈리아어본]

(발췌 시작)

Essere custodi della memoria. La beatificazione di Paul Yun Ji-chung e dei suoi compagni è un’occasione per ringraziare il Signore che, dai semi sparsi dai martiri, ha fatto scaturire un abbondante raccolto di grazia in questa terra. Voi siete i discendenti dei martiri, eredi della loro eroica testimonianza di fede in Cristo. Siete inoltre eredi di una straordinaria tradizione che iniziò e crebbe largamente grazie alla fedeltà, alla perseveranza e al lavoro di generazioni di laici. Questi non avevano la tentazione del clericalismo: erano laici, andavano avanti da soli! È significativo che la storia della Chiesa in Corea abbia avuto inizio da un incontro diretto con la Parola di Dio. È stata la bellezza intrinseca e l’integrità del messaggio cristiano – il Vangelo e il suo appello alla conversione, al rinnovamento interiore e a una vita di carità – ad impressionare 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 ed è a quel messaggio, alla sua purezza, che la Chiesa in Corea guarda come in uno specchio, per scoprire autenticamente sé stessa.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fr/speeches/2014/august/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14_corea-incontro-vescovi.html
 [프랑스어본]

(발췌 시작)

Être gardiens de la mémoire. La béatification de Paul Yun Ji-chung et de ses compagnons est une occasion de remercier le Seigneur, qui, des semences jetées en terre par les martyrs, a fait jaillir une abondante récolte de grâce en cette terre. Vous êtes les descendants des martyrs, héritiers de leur héroïque témoignage de foi dans le Christ. Vous êtes aussi les héritiers d’une impressionnante tradition qui a commencé, et a largement grandi, grâce à la fidélité, à la persévérance et au travail de générations de laïcs. Ceux-ci n’avaient pas la tentation du cléricalisme : ils étaient des laïcs, ils allaient seuls de l’avant. Il est significatif que l’histoire de l’Église en Corée ait commencé par une rencontre directe avec la Parole de Dieu. Ce furent la beauté intrinsèque et l’intégrité du message chrétien – l’Évangile et son appel à la conversion, au renouvellement intérieur et à une vie de charité – qui ont impressionné Yi Byeok et les nobles anciens de la première génération ; c’est vers ce message, vers sa pureté, que l’Église en Corée regarde, comme dans un miroir, pour se découvrir authentiquement elle-même.

(이상, 발췌 끝)

 

출처 3: https://w2.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14/august/documents/
papa-francesco_20140814_corea-incontro-vescovi.html
 [영어본]

(발췌 시작)

To be guardians of memory. The beatification of Paul Yun Ji-chung and his companions is an occasion for us to thank the Lord, who from the seeds sown by the martyrs has brought forth an abundant harvest of grace in this land. You are the children of the martyrs, heirs to their heroic witness of faith in Christ. You are also heirs to an impressive tradition which began, and largely grew, through the fidelity, perseverance and work of generations of lay persons. They were not tempted by clericalism: they were laity and they moved ahead on their own. It is significant that the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began with a direct encounter with the word of God. It was the intrinsic beauty and integrity of the Christian message – the Gospel and its summons to conversion, interior renewal and a life of charity – that spoke to Yi Byeok and the noble elders of the first generation; and it is to that message, in its purity, that the Church in Korea looks, as if in a mirror, to find her truest self.

 

기억의 보호자들이 되십시오.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의 시복은 우리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한 기회인데, 그분께서는 , 바로 이 땅 안에서 순교자들에 의하여 씨가 뿌려진 씨앗들로부터 은총(grace)의 넉넉한 추수 한 개를 이미 맺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쪽으로 믿음(faith in Christ)에 대한 그들의 영웅적인 증언의 상속자들인,  이 순교자들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또한, 평신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대들의 충실(fidelity), 끈기(perseverance) 그리고 노동(work)을 통하여, 시작하였고, 그리고 크게 성장하였던, 한 개의 강한 인상을 주는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다음과 같이 그들은 성직자주의(clericalism)에 의하여 부추겨지지(tempted) 않았습니다: 그들을 평신도였으며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단독으로 전진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즉, 예수 그리스도]과의 한 개의 직접적 만남(a direct encounter)과(##6) 함께 시작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significant). 이벽(Yi Byeok, 李檗, 1754-1785년) 및 제1세대의 양반 선조(noble elders)들(##7)의 심장(heart)에 이미 각인하였던(ont impressionné) 것(##8)은, [그리스도의] 복음(Gospel) 및, 회심(conversion), 내부로부터의 갱신(interior renewal) 그리고 애덕의 어떤 삶(a life of charity) 쪽으로, 이 복음에 의한 소환(its summons)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메시지(Christian message)의 내재적 아름다움과 [결함 없는] 본래의 모습(integrity)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리하여 한국에 있는 교회가 자신의 가장 참된 자아(self)를 발견하기 위하여, 마치 한 개의 거울 쪽으로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은, 그 순수의 상태에 있는, 바로 이 메시지 쪽으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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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번역자 주:

(1) 하느님의 말씀은 자연적 진리(natural truth)가 아니라, 초자연적 진리(supernatural truth)에 대한 것이므로, 오로지 자연법(the natural law)에만 의존하여서는 그 내용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데(루카 복음서 24,45 참조), 예를 들어, 선교사들에 의한 교리 교육 없이, 천주교 핵심 교의(dogmas)들과 교리(doctrines)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벽(李檗, 1754-1785)의 마음을 열어 준 것은, 다른 한 말단(a termination)이 성령인,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 즉, 그의 영혼에 주입된 하느님의 은총(the grace of God), 특히 최초 은총(the initial grace)[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 제2011항, 제2027헝](##9)의 작용의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즉, 이벽(李檗)이 신약 성경 말씀들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가르침들 그리고 천주교 수덕서들을 학습/연구하는 과정 중의 어느 날에, 아래의 제(##2)항 및 제3항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듯이, 아무리 늦어도 1779년 혹은 그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에게 소위 말하는 한 개의 윤리적 기적이 발생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인 성령 강림,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제키엘 2,2; 요한 복음서 16,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 참조)가 발생하였음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바로 그 시점에 그리고 그 장소에, 우리나라에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즉,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가, 하느님에 의한 한 개의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의 결과로서, 바로 그 시점에 그리고 그 장소에 창립(創立)되었던 것이다(was founded).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5일]

(2)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바로 이 말씀은 황사영의 백서 제101-102행에서 언급된 바를 논리적으로 등가의 표현으로 말씀하고 계심에 주목하라:

 

출처: http://www.chonjinam.org/client/press/viw.asp?p_idx=228&cpage=1

(발췌 시작)

황사영의 백서 101-102(김시준역 벽위편 p. 306)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동방의 우리나라에서 주님의 은혜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전교자가 온 일도 없이, 주님께서 친히 특별하게 성교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서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101/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
 102/卑之 繼又以授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이상, 발췌 끝)

[이상, 2015년 6월 25일자 내용 추가 끝]

 

(##7) 번역자 주: 바로 이 "이벽(Yi Byeok, 李檗, 1754-1785년) 및 제1세대의 양반 선조(noble elders)" 은, 위에 또한 발췌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2014년 8월 20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에서 또한 "젊은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집단(a group)" 및 "바로 이 첫 번째 [ce premier noyau][집단]" 이라고 논리적으로 등가로 불리고 있음에 반드시 주복하라.

 

(##8) 번역자 주: 영어본에 번역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며, 이 우리말 번역은 다음에 주어져 있는 "impress" 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의 의미를 따른 것이다:

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impress&allowed_in_frame=0

http://www.perseus.tufts.edu/hopper/morph?l= imprimere&la=la#lexicon

 

(##9) 번역자 주: "하느님의 은총" 과 "최초 은총/초기 은총"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63.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11.htm [최초 은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25.htm [하느님의 은총, 최초 은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htm [최초 은총, 트리엔트 공의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은총의 정의]<----- 최우선적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법과 은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4_metanoia_Benedict_XV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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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출처 4: http://www.chonjinam.org/client/vsound/viw.asp?p_idx=397

(출처 4로부터 발췌 시작)

교황 성하께서는 이날 강론의 거의 반 이상을 "기억 지킴이"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가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지킴이 - 희망의 지킴이 - 한국 교회의 기묘한 역사의 상속 지킴이 - 특히, 선교사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자발적인 진리탐구 노력에 대한 언급과, 또한, 이벽과 신앙의 첫 1세대 양반 선조들 (Yi By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에 대한 기억을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또, 오늘날도, 우리 한국 교회가 우리교회의 자발적인 창립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하며, 이에 대한 기억 상실증에서 깨어나라는 교훈을 내포하고 강조하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È significativo che la storia della Chiesa in Corea abbia avuto inizio da un incontro diretto con la Parola di Dio. È stata la bellezza intrinseca e l’integrità del messaggio cristiano – il Vangelo e il suo appello alla conversione, al rinnovamento interiore e a una vita di carità – ad impressionare 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 ed è a quel messaggio, alla sua purezza, che la Chiesa in Corea guarda come in uno specchio, per scoprire autenticamente sé stessa.
(이상, 발췌 끝)
 
(##2)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교 저서들은 천주교 교리서(敎理)에 대한 가르침들이 포함된 천주실의[天主實義, 저자: 마태오 리치 신부(1552-1610년)], 천주교 수덕서(修德書)칠극[七克, 저자: 빤토하 신부(1571-1618년)] 등을 포함하는,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어로 저술 작업을 하였던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신부들의, 저서들을 말한다. 이들 저서들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천학초함[天學初函, 엮은이: 이지조(李之藻, 1565-1630년), 초판 발행 년도: 1629년경]"에 수록된 중국어본 천주교 저서들의 목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천학초함/천학초함_전6책.pdf

 

그런데,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설명의 제일 마지막 단락의 시작 부분에서 (i)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 그 확실한 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이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 (ii)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아니면 그 속에 수록된 책들이 개별적으로라도 180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라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설명이 주어져 있는데, 이 주장과 설명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이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452

 

지금 지적한 바에 대하여서는,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례(counter-examples)들을 제시하는 아래의 제3항을 꼭 읽도록 하라.

   

(##3) 번역자 주: 즉,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을 말한다.

 

(##4) 번역자 주: 이러한 조치는 1783년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일(오푸스 데이, Opus Dei)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이벽(李檗, 1754-1785년)의 지시에 의하여서였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5일]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바로 이 말씀은 황사영의 백서 제44행에서 언급된 바를 그대로 말씀하고 계심에 주목하라:

 

출처: http://www.chonjinam.org/client/press/viw.asp?p_idx=228&cpage=1

(발췌 시작)

(백서44/ 布衣李檗大奇之-承薰 李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이벽이 아주 기특히 여기고 있어, 이벽이 이승훈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습니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성당에는 서양 전교자가 있으니,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여 받고, --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2015년 6월 25일자 내용 추가 끝]

 

(##5) 번역자 주: 바로 이 첫 번째 핵심 [집단]은, 위에서 언급된 젊은 한국인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집단(a group)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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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2: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혚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인데, 위의 여러 지역 언어본들 및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한 바로 위의 우리말 번역문과 어디서, 어떠한 종류와 정도의 번역 오류가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10769&page=9

(발췌 시작)
한국 교회는 또한 신앙의 동기와 복음화 과정에서 평신도들이 맡았던 으뜸 역할을 기억합니다. 실제로 그 땅에서 1700년대 후반에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운 것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젊은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그리스도교 서적 몇 권에 매료되어 이를 깊이 연구하고 그들 삶의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북경으로 파견되어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이 평신도가 동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최초의 핵심 인물들을 시작으로 위대한 공동체가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초기부터 약 100여 년 동안 끔찍한 박해를 겪었고 수천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신앙과 선교 노력, 그리고 평신도의 순교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끝)

 

2-3. 다음은, 올해인 2015년 3월 12일에, 우리나라의 주교님들께서 (매 5 년마다 있는) 사도좌를 방문하였을 때에(Ad Limina) 말씀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환영 연설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15/march/documents/
papa-francesco_20150312_ad-limina-corea.html
 

(발췌 시작)

In the course of my visit, we had the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 life of the Church in Korea and, in particular, on our episcopal ministry in the service of the People of God and of society.  I wish to continue that reflection with you today, by highlighting three aspects of my visit: memory, youth and the mission of confirming our brothers and sisters in the faith.  I would like also to share these thoughts with the Church in Mongolia.  Though a small community in a vast territory, it is like the mustard seed which is the pledge of the fullness of God’s Kingdom (cf. Mt 13:31-32).  May these reflections encourage the continuing growth of that seed, and nourish the rich soil of the Mongolian people’s faith. 

 

저의 [한국] 방문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에 있는 교회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봉사에 있는 우리 주교단의 사역(episcopal ministry)에 대하여, 성찰할(reflect)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저의 [한국] 방문의 세 개의 양상들인 (i) 기억(memory), (ii) 청춘기(youth) 그리고 (iii) 신앙으로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견고하게 하는 사역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바로 이 성찰(reflection)을 계속하는 것을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들을 몽고에 있는 교회와 또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비록 한 개의 광활한 지역에 있는 한 개의 조그마한 공동체이기는 하나, 이 공동체는 하느님의 나라의 충만함에 대한 보증(pledge)인 겨자 씨앗(the mustard seed)일(마태오 복음서 13,31-32 참조) 것입니다(it is like). 이들 성찰들이 바로 이 씨앗의 지속적인 성장을 장려하고, 그리고 몽고 백성의 신앙의 풍부한 땅에 자양분을 줄 것들 기도합니다.

 

For me, one of the most beautiful moments of my visit to Korea was the beatification of the martyrs Paul Yun Ji-chung and companions.  In enrolling them among the Blessed, we praised God for the countless graces which he showered upon the Church in Korea during her infancy, and equally gave thanks for the faithful response given to these gifts of God.  Even before their faith found full expression in the sacramental life of the Church, these first Korean Christians not only fostered their personal relationship with Jesus, but brought him to others, regardless of class or social standing, and dwelt in a community of faith and charity like the first disciples of the Lord (cf. Acts 4:32).  “They were willing to make great sacrifices and let themselves be stripped of whatever kept them from Christ… Christ alone was their true treasure” (Homily in Seoul, 16 August 2014).  Their love of God and neighbor was fulfilled in the ultimate act of freely laying down their lives, thereby watering with their own blood the seedbed of the Church. 

 

저의 경우에, 한국 쪽으로 저의 방문에 있어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의 하나는 순교자들인 바오로 윤지충(Paul Yun Ji-chung)과 동료들의 시복(諡福, beatification)이었습니다. 복자(福者, the Blessed)들 중에 그들의 이름을 명부에 올림으로써, 우리는 한국에 있는 교회 위에 이 교회의 유아기(infancy) 동안에 하느님께서 퍼부어셨던 셀 수 없는 은총(countless graces)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으며, 그리고 그와 동시에(equally) 하느님의 이러한 선물(gifts)들 쪽으로 주어졌던 열심 신자들의 화답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신앙이 교회의 성사적 삶 안에서 충만한 표현을 발견하기 전에, 이들 첫 번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의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를 육성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계급 혹은 사회적 지위에 무관하게 다른 이들 쪽으로 그분을 모셔갔으며, 그리하여, 주님의 첫 번째 제자들처럼(사도행전 4,32 참조), 신앙(faith)과 애덕(charity)의 한 공동체(a community) 안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희생들을 기꺼이 하고자 하였으며 그리고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멀어지게 하는 무엇이든지 자신들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참된 보물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강론, 2014년 8월 16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사랑(love)은 자신들의 목숨을 자유롭게 내려 놓음이라는, 그것에 의하여 교회의 묘판/못자리(苗板, seedbed)에 자신들의 고유한 피로써 물을 댐이라는, 궁극적인 행위(act) 안에서 구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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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은 위의 (##7)에서 "이벽(Yi Byeok, 李檗, 1754-1785년) 및 제1세대의 양반 선조(noble elders)"라고 언급되는 한 개의 집단(a group)을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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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first community has left you and all of the Church a beautiful witness of Christian living: “their integrity in the search for truth, their fidelity to the highest principles of the religion which they chose to embrace, and their testimony of charity and solidarity with all” (idem).  Their example is a school which can form us into ever more faithful Christian witnesses by calling us to encounter, to charity and to sacrifice.  The lessons which they taught are particularly applicable in our times when, despite the many advancements being made in technology and communication, individuals are increasingly becoming isolated and communities weakened.  How important it is, then, that you work together with the priests, religious men and women, and lay leaders of your dioceses, to ensure that parishes, schools and centers of apostolate are authentic places of encounter: encounter with the Lord who teaches us how to love and who opens our eyes to the dignity of every person, and encounter with one another, especially the poor, the elderly, the forgotten in our midst.  When we encounter Jesus and experience his compassion for us, we become ever more convincing witnesses of his saving power; we more readily share our love for him and the gifts with which we have been blessed.  We become a living sacrifice, devoted to God and one another in love (cf. Rom 12:1, 9-10).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3.

게시자 주 3: 이번 항은 위의 (##2) 번역자 주로서 애초에 마련되었으나, 그러나 그 내용이 예상 밖으로 풍부해 짐에 따라, 별도의 항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3-1. 사실, 1629년경에 중국에서 초판 발행되었다고 알려진 "천학초함(天學初函)"1783년 이전이미 약 15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도 알려져, 입수되어 탐독되었음을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데,

 

예를 들어, 현종과 숙종대에 영의정까지 지냈던 문신 최석정(崔錫鼎, 1646-1715년)이 서양의 수학(Mathematics)을 학습하기 위하여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탐독하였음은 다음의 게재글[제목: 최석정, 17세기의 영의정 수학자, 대한수학회소식 제151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http://icms.kaist.ac.kr/file/kmsnewsletter-151(2013.9).pdf

 

그리고 그가 "천학초함(天學初函)"을 탐독하고 나서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수학 저서들을 저술하였음은 다음의 논문[제목: 최석정의 직교라틴방진, 한국수학사회지 제23권 제3화 (2010년 8월]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http://coding.yonsei.ac.kr/pdf/KSHSBA_2010_v23n3_21.pdf

 

그리고 다음의 논문[우리말 제목: 남병철(南秉哲) 『의기집설(儀器輯說)』의「혼개통헌의설(渾蓋通憲儀說)」 연구]에서는 이 17세기 중반 이에 김만중(金萬重, 1637~1692), 김석주(金錫?, 1634~1684), 최석정(崔錫鼎, 1646~1715) 등이 "천학초함(天學初函)"을 접하였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http://harg.kasi.re.kr/pro_plus/down/201205/201205_107-112.pdf

 

그리고 다음의 논문[제목: 19세기 조선 수학의 지적 풍토: 홍길주(1786-1841)의 수학과 그 연원, 저자: 전용훈]에서는, 1762년에 이르면, "黃胤錫이 열람한 서적들 중에서 동문산지, 기하원본, 句股義, ?容較義, 渾蓋通憲, 泰西水法, 表度說, 天主實義 등 "천학초함(天學初函)"에 포함된 서적들과 숭정역서 이전의 한역서학서들이 확인된다. 1629년에 李之藻가 편집하여 간행한 "천학초함"은 명말에 중국에 극히 널리 퍼졌고 수차에 걸쳐 인쇄되어 서양 수학과 천문학 지식을 습득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18세기 초반까지도 몇몇 열람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교류가 경색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청나라를 통한 지식의 수용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지식계의 분위기에 원인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초반을 고비로 달라졌다." 라는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http://www.dibrary.net/jsp/download.jsp?file_id=FILE-00003712817

 

게시자 주 3-1:

(1)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지봉유설" 과 "이수광" 에 대한 글들에 의하면,"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년)"천학초함(天學初函)"의 초판 발행된 해인 1629년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죽기 14년 전(1614년)에 집필되었다고 알려진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천학초함(天學初函)"이라는 총책의 이름이 전혀 거명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322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853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4일]

(2) 다른 한편으로, 2009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18세기 선비들 밤새워 '수학 그룹스터디']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습니다: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90827/8771971/1

(발췌 시작)

구만옥 경희대 교수는 미리 낸 발표문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의 서학서(西學書) 유통’에서 황윤석(1729∼1791)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를 분석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소개했다.

 

노론계 유학자였던 황윤석은 서양 수학과 천문학, 율력학에 재미를 붙인 뒤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빠져들었으며 ‘수리정온(數理精蘊)’ ‘역상고성(曆象考成)’ 같은 서양 책들을 읽었다.

 

1762년 어느 날의 일기에는 그가 서양 과학서 ‘천학초함(天學初函)’을 빌리기 위해 사방으로 부탁을 하고 애쓰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또 다른 일기에선 서양 수학책을 많이 갖고 있는 학자를 방문한 뒤 ‘역시 사람은 수도 한양에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1761년 일기에는 다른 학자들과 밤을 새우며 수학에 대해 토론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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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바로 이 언급과 이어지는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1762년 경에 이르면, 당시에 한양(지금의 서울)에 거주하였던 일부 유학자들은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입수하여 이미 읽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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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 다른 한편으로 조헌 후기의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1731-1783년)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천학초함(天學初函)" 은 전반부인 "이편(理篇)" 과 후반부인 "기편(器篇)"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전반부 "이편(理篇)" 이 천주교 관련 저술들의 모음집입니다:

 

출처: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5601&yy=1995

(발췌 시작)

담헌이 부탁했던  '천학초함'을 요구한지 10년만에  반정균은 귀하와 같은동방의 군자가 너무 서양학문의 사설(사설)에 빠져 선비의 도를 잃을까 걱정된다는 편지와 함께  '동문산지'(동문산지) '천문략'(천문략)등 후반부 반질을 보내 왔다.

(이상, 발췌 끝)

 

담헌 홍대용이 1771년에 북경 남당을 두 번 방문하였다고 하므로,(*1) 이 시기에도 홍대용은 "천학초함(天學初函)"을 북경에서 입수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위의 발췌문에 언급된 그 이후 홍대용은 오로지 "천학초함(天學初函)"의 후반부인 "기편(器篇)" 을 청나라 관리였던 반정균으로부터 요구한지 10년만에 입수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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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서양자 수녀의 저서, "중국천주교순교사", 제151쪽 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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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벽(李檗, 1754-1785년)의 지시에 따라, 이승훈이 북경으로 출발하였던 1783년에 이르면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중국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유학자가 입수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중국 청나라에서, 소위 말하는, "예의 문제"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가 서거한 1722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다음 황제인 옹정제(재위 기간: 1722-1735년) 천주교 금교정책, 그리고 그 다음 황제인 건륭제(재위 기건: 1735-1796년)에 걸쳐 계속적으로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건륭제 재위 기간 중이었던 1742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한 예의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장편의 통유(Ex quosingulari)와 1773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한 중국 예수회 해산 명령 등으로 인하여, 1742년부터 중국의 청나라 황제, 조정 대신들, 그리고 관직에 있는 자들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급격하게 본격적으로 심화되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위에 발췌된 담헌 홍대용과 오랜 기간에 걸쳐 우의(友誼) 깊은 교류(직접 만남 및 이후 서신 교환 포함)를 하였다고 당대 및 후대에도 널리 잘 알려졌던 [청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1780년 경에 청나라 관직에 있었던] 반정균의 언급으로부터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15년 6월 24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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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17세기-18세기 조선 시대의 상당수의 유학자들에게 있어,

 

(i) 실학(實學)으로서 서학(西學)을 학습하고자 하였던 유학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읽고자 하는 서양 문물들을 소개하는 저서들이 포함되어 있는 "천학초함(天學初函)" 은 필독 탐구 서적이었을 것이고, 그러나

 

(ii) 서학(西學)의 도입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을 집권 세력의 유학자들의 경우에는, 서학(西學)의 도입을 지지하는 비 집권 세력의 유학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학초함(天學初函)" 에 포함되어 있는 저서들을 일정 수준 이상 학습하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이 "천학초함(天學初函)" 의 전반부인 "이편(理篇)" 에 있는 천주교 관련 저서들이 전달하는 우주관(宇宙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그러나 "천학초함(天學初函)"에 포함되어 있는 저서들을 자신의 고유한 저서들의 출처 혹은 근거 자료로는 절대로 제시하지 않는 이중적 입장을 취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며,

 

(iii) 따라서, 1779년 천진암 강학 모임에서 이벽(李檗, 1754-1785년)에 의하여 선교/복음화(evangelization)를 당하였던, 그리고 1783년에 또한 이벽(李檗)에 의하여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1784년에 북경에서 귀국할 때에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위의 발췌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하여 한 개의 집단(a group)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벽(李檗) 및 제1세대의 양반 선조들에게, 비로소 처음으로 전달되어져, 그리하여 1784년 귀국 시점 이후에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이들에 의하여 비로소 처음으로 탐독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주장은 현실적으로, 위의 게시자 주 3-1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입니다. 

 

3-3. 다른 한편으로, "정조실록" 권33 15년 11월 8일이승훈(李承薰)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천학초함(天學初函)"을 여행 선물로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1: 소장 중인 서양자 수녀의 저서,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제51쪽

출처 2: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va_11511011_003

(출처 1에서 발췌 시작)
(이승훈) 제가 계묘년 겨울 부친을 따라 연경(燕京, 북경)에 가서, 서양인이 사는 집이 웅장하고 기묘해 볼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사신들을 따라 한 차례 가 보았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를 파할 무렵에 서양인이 곧 "천주실의" 몇 질을 사람마다 앞에 내 놓으면서 마치 차나 음식을 대접하듯이 하였는데, 저는 애초에 펴 보지도 않고, 돌아오는 여장에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역상에 미치자 서양인이 또 "기하원본" 및 "수리정온" 등의 책과 "시원경(망원경)", "지평표" 등의 물건을 여행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상, 발췌 끝)

(출처 2에서 발췌 시작)
이것도 역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대저 그 책이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이미 수백 년 전의 로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이미 그 학설을 비평한 말이 있는데 홍문관의 장서각(藏書閣)에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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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지봉유설" 과 "이수광" 에 대한 글들에 의하면,"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년)"천학초함(天學初函)"의 초판 발행된 해인 1629년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죽기 14년 전(1614년)에 집필되었다고 알려진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천학초함(天學初函)"이라는 총책의 이름이 전혀 거명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322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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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그리고 바로 위의 이승훈의 답변과 관련하여, 정조 실록 권33 15년 11월 11일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 아래의 발췌문에서, 이동욱은 이승훈의 아버지이고, 이승훈은 자신의 아버지가 공무로 북경을 방문 할 때에 함께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va_11511011_003

(발췌 시작)

그러나 진실로 의도를 가지고 사 온 자취가 있다면 이동욱을 무겁게 처벌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사실을 들어보니, 서학에 관한 여러 책을 서양 사람이 선물로 세 사신에게 고루 전해 주었으므로 삼사가 모두 받아 왔다고 한다. 처음 생각으로는 그 때의 세 사신을 모두 처분하려 했으나, 추후에 형조의 문안(文案)을 보니, 모두 우리 나라에 유행하는 서목(書目)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었고 그 사행(使行)에서 처음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선 참작해서 용서한 것이다.
(이상, 발췌 끝)
 
그러므로, 예를 들어,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이벽(李檗, 1754-1785년)"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혹시라도 어떤 자가, "이벽은, 1784년 3월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책들을 읽어 교리를 터득한 후, 가까운 친구들을 설득하여 교화시켰다." 라는, 혹은 이와 논리적으로 등가의, 주장을, 이벽이 이승훈이 가져다 준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읽고서 천주교 교리를 터득한 후 비로소 처음으로 친구들을 설득하여 교화시켰다는 의미로 주장을 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의 주장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지요?
 
왜냐하면, 5년 전인 1779년 천진암 강학 모임에서 이벽에 의하여 전교/복음화를 당하였던 선비들이 이미, 이승훈을 포함하여, 9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파악된 1779년 천진암 강학 모임의 참석자 명단입니다: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권, 이벽 등.
 
3-4.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1784년이가환(李家煥, 1742-1801년)이벽(李檗, 1754-1785년)에게 천주교에 반하는 여러 질문들을 하였을 때에, 이벽(李檗)은 질서정연하게 답변을 하였으며, 그리고 자신의 답변을 듣고서 이가환(李家煥)심장(heart)이 오히려 천주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즉, 이가환(李家煥)이 자신에게 오히려 선교/복음화(evangelization) 당하고 있는 중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벽(李檗)은, 최후의 일격으로서, 그에게, 자신의 답변의 근거 문헌으로서, 우리가 위에서 정조 실록애 기록된 정사의 일부분을 함께 살펴보았듯이, 이승훈(李承薰)1784년에 북경에서 돌아 올 때에 선물로서 받아 오지 않았던, 그러나, 그 안에 포함된 천주교 관련 저서들을 이미 탐독하였고 또 하느님의 초기 은총의 덕택으로 이미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그리하여 자신의 전교/복음화(evangelization)의 비장의 무기인"천학초함(天學初函)"(*)이가환(李家煥)에게 드디어 제시하였다는 생각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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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가환이 집중적으로 학습하였을 "천학초함(天學初函)"  의 전반부인 "이편(理篇)"에 수록된 저서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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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8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3-5.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바로 위의 지적과 관련하여, 이벽(李檗, 1754-1785년)이 아무리 늦어도 1779년 이전에 이미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학습하였을 것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다음의 글[제목: 한국 천주교의 뿌리, 저자: 김학렬 신부, 2011년 3월]제14-21쪽을, 특히 이 글의 제18쪽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벽위편(闢衛編)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다루어 지고 있는 내용에 대한 부분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여기에는, 예를 들어1779년에 천진암에서 개최되었던 강학 모임보다 60년 전에 이미 성호우파인 순암계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거의 다 알고 배격하였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탐독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http://old.chonjinam.org/bbs/file_down.php?db=tb_pds&frm_idx=73 <----- 필독 권고

http://www.cccatholic.or.kr/?document_srl=88983 

 

(iv) 그런데, 만약에 혹시라도 이벽(李檗, 1754-1785년)1779년 천진암 강학 모임 이전에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입수하여 이 총책에 포함되어 있는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전혀 학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a) 1779년 천진암 강학 모임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벽(李檗, 1754-1785년)에 의하여 선교/복음화(evangelization)를 당하였고, 그리고

 

(b) 1783년에 또한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아오라는 이벽(李檗)의 지시에 의하여, 즉, 더 구체적인 선교/복음화(evangelization)를 당하여, 실제로 북경에 가서 그리고 실제로 세례를 받았다면,

 

아무리 늦어도 1779년 이전에, 이벽(李檗)에게 회심(conversion)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하느님의 초기 은총(initial grace)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만한 크기였을까요?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4일]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말하는 초자연적 개념(supernatural concepts)들은, 오로지 자연법(natural law)에만 근거한 인간의 지성(intellect)만으로는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나머지 한 말단(a termination)이 성령(Holy Spirit)인, 하느님의 은총(grace)이라는 도움을 받은 자만이 오로지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루카 복음서 24,45 참조). 

 

그리고 이것은, 조선 후기의 경우에, 예를 들어, 조선 후기의 상당한 숫자의 유학자들이 "천주실의""칠극" 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1770년 경 전후의 시기까지, 이벽(李檗, 1754-1785년)을 제외하고, 소위 말하는, [Credere Deum 혹은 Credere Deo 의 단계가 아니라, 그 다음 단계인] Credere in Deum(신앙천주)를 그들의 의지(will)가 받아들이지 못하였음으로부터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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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에 의하여 구분된, 이들 "Credere Deum", "Credere Deo", et "Crede in Deum"의 커다란 차이점들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제목: 믿다believe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제목: IIa IIae q2 믿음(faith, 신덕, 신앙)의 내면적 행위]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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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6월 24일자 내용 추가 끝]

 

4.

게시자 주 4: 그 내용에 있어 바로 위의 제3항에 이어지는 이번 항에서는, 이벽(李檗, 1754-1785년)이 "천학초함(天學初函)" 을 언제쯤 처음으로 접하였는 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도록 하겠으며, 추정되는 첫 대면 시기를 연대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열하도록 하겠습니다:

 

4-1. 다음은 천진암 홈페이지 제공의 자료입니다:

출처:  http://old.chonjinam.org/bbs/view.php?db=tb_board&frm_num=537&page=3

(뱔췌 시작)

丁學術의 [李檗傳] 발췌 1837년

천진암에 도우(道友)가 중도(衆徒)하니, 광암 공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하필(下筆)하였다 - 1837년 의 李檗傳

천진암 講學에 관한 내용이 『니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술(戊戌, 1778)년 이벽 광암 공이 25세 되던 해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정씨(丁氏), 이씨(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무관(武官) 홍군사(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산수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셨다. 광주(廣州) 땅 원앙산사(鴛鴦山 寺, 일명 앵자산 천진암)에 은거(隱居)하시매, 도(道)를 닦는 벗들(道友들=敎友들)이 총림(叢林, 衆徒, 僧團 즉 수도적 단체(修道的 團體, 衆徒=修道者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쓰게 하시었다.”
(이상, 발췌 끝)

 

4-2. 다음은 천진암 홈페이지 제공의 자료인데, 성 모방 신부의 1838년 증언입니다:

 

출처 1: http://www.chonjinam.org/client/councils/viw.asp?p_idx=10

출처 2: http://old.chonjinam.org/bbs/view.php?db=tb_board&frm_num=537&page=3

(출처 1에서 발췌 시작)

이 서한은 1838년 10월 3일, Mr. Maubant 신부가 조선에서, 파리에 있는 대신학교 학장 Mr. Langlois 신부에게 보낸 것입니다.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ée à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 Yangtchi 3 Xbre 1838.
 
"[…]Nous avons pu cette année nous procurer secrè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 Elles diffè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èes d'aprè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è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èen nommé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ç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ée. Un nommé Koang, qui reç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é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 égalemant nommé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李檗 曠菴 公이 改宗者들과함께 자기들 대표자로 李承薰을 북경교회에 파견하였음을, 聖 모방(St. Maubant 신부)가 1838년 10월 3일에 용인 양지 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Mr. Langlois신부에게 보고한 문헌 일부 발췌 번역함.
 
聖 Maubant 신부(1803~1839)는 1836년에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이며, 김대건, 최양업, 최과출, 3명의 15세 조선 소년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낼 때, 추천서를 쓴 신부인데, 그가 입국한 지 2년 정도가 지난 후에, 즉, 1838년 10월 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Mr. Langlois신부에게 보낸 문헌에는 조선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 일부 발췌하여 옮겨본다.
 
[금년에 우리는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établissement)에 관하여, 말로만 듣던, 손으로 기록한 비망록을 비밀히 관리하도록 받을 수가 있었는데, 口頭로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즉, 1720년, 중국 年號로 저 유명한 강희 58년에, 북경에 다녀온 사신 이공(李公, 역자 주. 이이명:李?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역자 주. 광암(曠菴) 이벽(李檗)은 후에 요한이라는 교명을 가진 분입니다.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深醉한 나머지, 천주교를 전심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étien), […] 광이라는(광암 공)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é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élégué)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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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은, 여기서 말하는 이공(李公)은 이이명(李?命, 1658-1722년)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이명(李?命)에 대한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886

(발췌 시작)

그 뒤 1720년 숙종이 사망하자 고부사(告訃使)로 청(淸)에 가서 당시 북경(北京)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쾨글러(Kogler, 중국명 載進賢)와 수아레스(Saurez, 중국명 蘇林)를 만나 이들과 서학(西學)에 대해 담론하며 친교를 맺었고, 이듬해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갖고 귀국하여 서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국내에 이를 소개하였다. 

(이상, 발췌 끝)

 

(2)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이 소장 중인,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제목의 책 [저자: 서양자 수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제48쪽에서 발췌 시작)

관상감 관원은 아니지만 조정의 대신 이이명(李?命)은 북경에 가서 흠천감 감정 쾨글러 신부와 감부 요셉 수아레스[Joseph Suarez, 중국명 蘇霖] 신부를 두 차례나 만나 역법에 대해 많은 것을 문의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상, 발췌 끝)

 

(제372쪽에서 발췌 시작)

이이명은 숙종 40년(1720) 사신 자격으로 북경에 들어간 기회에 그곳에서 쾨글러 신부와 수아레스 신부를 만나 역상()과 수학에 대해 담론하였다. 이이명은 나쁜 본능을 극복하고 마음을 깨끗이 가져야한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유교와 비슷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2: 다음의 논문[제목: 18세기 초 연행록에 나타난 조선인과 서양 선교사의 교유 양상: [一菴燕記]를 중심으로, 조융희]에 의하면, 이이명이 방문하였을 때에 서양 선교사들의 호의적 태도가 1766년 초에 북경에 체류한 홍대용"연행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방문자인 조선인들의, 1720년에 이이명 일행의 방문 이후 약 46년 동안에, 달라진 부정적인 행태로 인하여 서양 선교사들의 태도가 많아 달라져, "조선 사신 일행이 "보여 주기를 청하면 (선교사들이) 반드시 거절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음에 또한 주목하라. 참고로, 아래의 출처에서 "소림" 으로 불리는 서양 선교사는 수아레스(Saurez, 중국명 蘇林) 신부를 말한다:

 

출처: http://congress.aks.ac.kr/korean/files/2_1358497568.pdf

  

4-3. 다음은, 예상 밖의 출처에 있는 글[제목: 天眞庵은 韓國천주교와 西學의 子宮, 게시자: 조갑제, 게시년도: 2003년 4월 23일; 원 제공자: 정순태 기자, 제목: 韓國천주교와 西學의 발상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승훈의 경우에서처럼] 동지사 등의 공무로 북경에 파견되었기에 북경에 잠깐 머물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천주교 관련 저서들을 확보하였을 다른 방문자들과 비교하였을 때에, 이벽(李檗, 1754-1785년)의 6대조 선조인 이경상(李慶相, 1603~1647년)의 경우는, 병자호란의 결과 중국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1)와 함께 중국으로 갔던 것인데, 이들 일행이 이후에 북경에 머물렀던 약 70일간의 기간(*2)은 이승훈 등의 다른 방문자들이 북경에 머불렀던 기간보다 더 길었을 것이고 그리고 소현세자의 지시를 받는 신하의 신분으로서 천주교 관련 저서(즉, 한역서학서)들을 확보하였을 경우이므로, 그리고 특히 그 당시까지 중국의 명나라 및 청나라 황제들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량과 부피에 있어 상당한 분량의 천주교 관련 저서들을, 예수회 소속의 아담 샬 신부측으로부터, 체계적으로 확보하였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2) 그리고 예수회 소속의 신부들에 의하여 발행되었던 한역서학서들을 체계적으로 묶어 놓은 "천학초함(天學初函)"(*3)1629년경에 초판 발행되었으므로, 이 총책이 포함된 한역서학서들이 귀국할 당시인 1645년에 국내로 확실히 반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지금 말씀드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추정은, 위의 제3-1항에 구체적으로 제시해 드린, "천학초함(天學初函)"의 조선 내의 반입 시기들에 대한 확실한 문헌 증거들과 잘 일치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아래의 발췌문에서 특히 "이경상은 淸國에서 가져온 궤짝을 개봉하면 滅門之禍를 당한다는 유언을 하고 사망했는데" , 약 8년 동안의 볼모를 끝내고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발생하였던 의문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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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소현세자(1612-1645년)"에 대한 안내의 글은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져 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1923

 

(*2) 게시자 주: 서양사 수녀님의 저서, "청나라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 제270쪽에 바로 이 언급이 있다. 청나라 황제 순치제의 사부(師父), 자부(慈父)의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진, 아담 샬 신부와 소현 세자 사이에 여러 번 만남이 있었음에 대하여서는, 이 저서의 제269쪽-271쪽을 꼭 읽도록 하라. 특히 제270쪽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발췌 시작)

아담 샬 신부는 당시 중국에 서양 신부들이 몇 명 안되고 마카오에 있는 순찰사 신부에게 허락을 얻지 못하여 서양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주지 못하는 대신 소현 세자의 환관 중에 이미 세례를 받은 환관에게 교리를 자세히 가르쳐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상, 발췌 끝)

 

(*3) 게시자 주: "천학초함(天學初函)"에 대한 안내의 글은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져 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452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7일]

이글은, 위의 주소에 있는 설명의 제일 마지막 단락의 시작 부분에서 (i)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언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 그 확실한 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이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 (ii) "'천학초함(天學初函)'이 아니면 그 속에 수록된 책들이 개별적으로라도 180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라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설명이 주어져 있는데, 이러한 주장과 설명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이제는 많이 부족함을 독자들에게, 구체적인 자료들과 함께, 말씀드리고자 마렸되었다. 지금 지적한 바에 대하여서는, 이 글의 (##2) 특히 바로 위에 발췌된 주장 (i) 에 대한 반례(counter-examples)들을 제시하는 이 글의 제3항을 꼭 읽도록 하라.

[이상, 2015년 6월 27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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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1490&C_CC=AZ

출처 2: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6100049 [원 제공자: 정순태 기자, 제목: 韓國천주교와 西學의 발상지]

(발췌 시작)

  서기 1779년 겨울날 밤, 눈보라를 헤치고 李檗(이벽)이란 사람이 두물머리(兩水里) 밑 마재에서 漢江을 건넌 다음 앵자봉을 넘어 조그마한 불교의 암자 天眞庵에 등장한다. 이벽은 한국천주교에서 創立聖祖로 받드는 분이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를 世界傳敎史上 유례없이 自生시킨 인물이다. 


   당시 천진암에는 權哲身, 權日身,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등 畿湖南人系의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講學會를 열고 있었다. 儒學의 經典을 공부하는 講學會의 講長은 당시 44세의 鹿菴 權哲身이었고, 후일 朝鮮實學을 집대성한 茶山 정약용은 그때 나이 불과 18세였다. 그들은 모두 실학자 星湖 李瀷(1681-1763)의 學統을 잇고 있었다. 


   한국천주교를 이해하려면 이벽이란 인물부터 살펴야 한다. 여러분들이 중부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기 전에 통과했던 터널이 바로 광암(광암)터널인데, 광암이 바로 이벽의 雅號다. 


   이벽의 6대조는 병자호란(1636-1637) 때 淸軍에 의해 볼모로 瀋陽에 붙잡혀간 昭顯世子를 수행했던 李慶相이다. 소현세자는 이경상을 시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과 접촉토록 했다. 소현세자로서는 北京에다 南堂을 지어놓고 천문학·수학 등 선진학문으로 淸國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담 샬을 상대로 多邊外交를 시도했던 셈이다. 


   소현세자는 8년만에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중국인 가톨릭 신자 5명을 데리고 왔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世子가 천주교와 서학에 관심이 깊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후 곧 죽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病死로 되어 있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은 소현세자의 증세와 사체의 모습 등으로 미루어보아 毒殺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소현세자를 따라온 중국인 궁녀와 환관 등의 천주교도가 자기 손으로 실로 해괴한 짓을 하고(성호를 긋고) 십자가에 매단 半裸 남자(예수)의 像에 경배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당시 사람들은 西洋雜鬼가 붙었다고 기겁을 했다. 더욱이 의심이 유별나게 많았던 仁祖는 淸나라의 朝野에 인맥이 두터운 소현세자를 王權의 도전자로 간주, 부자지간이면서도 政敵으로 증오했다.


   소현세자가 急死하자 이경상도 향리 포천으로 물러나 은거했다. 이경상은 淸國에서 가져온 궤짝을 개봉하면 滅門之禍를 당한다는 유언을 하고 사망했는데, 이벽이 판도라의 상자, 즉 그 家傳의 궤짝을 열고 말았다. 이벽은 궤짝 속에서 끄집어낸 西學·西敎 관련서적들을 자습했다.


   이런 이벽이 천진암 강학회에 동참하여 천주교를 전교하기로 마음을 먹고 서울 수표동 자택을 출발하여 마재를 거치는 100리 길을 걸어 走魚寺(현재 여주군 금사면 하품리)까지 갔다가 강학회 장소가 산너머 천진암이란 말을 듣고 앵자봉을 넘어 천진암에 당도했다. 이벽이 주어사를 먼저 갔던 것은 권철신이 평소 머물었던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열리고 있는 줄 잘못 알았기 때문이다. 


   천주교측은 강학회에서 이벽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즉 이벽이 천문, 지리, 철학, 수학 등 實學을 강의하면서 天主學을 논증하고 함께 실천케 하여 신앙의 싹이 움트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曜日이 없던 때라 음력으로 매월 7, 14, 21, 28일을 휴일, 즉 主日로 정했으며, 天主恭敬歌, 십계명가, 聖敎要旨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후 천진암 강학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이벽은 李承薰을 北京에 보내 세례를 받게 했다. 이듬해 봄, 이승훈은 북경의 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과 聖物을 갖고 귀국했다. 이에 이벽은 자신의 수표동 집을 임시성당으로 정하고 傳敎활동에 나섰다.


   한국천주교에서 정약용은 절대로 지워버릴 수 없는 특이한 존재다. 다산이 기록 또는 편집한 이벽, 李家煥, 이승훈, 권철신, 정약전의 묘지명, 유고집 등이 아니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신부 달레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의 底本도 바로 다산의 기록이다. 특히 이벽은 다산의 큰  姉兄이기도 하다[게시자 주: (오류 바로잡음) '이벽은 다산의 큰형수의 동생이기도 하다'로 바로잡습니다]. 이승훈도 다산의 妹夫다. 그러면 다산의 행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다산은 영조 38년(1762)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晉州牧使를 지낸 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진암에서 강학한 지 4년 뒤인 정조 7년(1783)에 정약용은 22세의 나이로 會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正祖가 신료들에게 中庸의 해석에 관한 숙제를 냈는데, 정약용이 제출한 中庸講義가 조선조 최고의 君師로 손꼽히는 正祖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註解에 대해 후일 정약용은 『이것은 曠菴의 說』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처음 정약용은 李瀷의 遺稿를 보고 民生을 위한 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西學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 무렵에 정약용은 이벽으로부터 받은 천주교책도 탐독했다. 그로부터 그는 「매우 열심히 마음을 기울여」 천주교를 믿었다. 그러던 정조 9년(1785) 을사년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秋曹(형조)의 禁吏(수사관)들이 이벽의 주재로 明禮坊(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金範禹(譯官과 醫員을 겸업한 中人) 집에서 진행중이던 미사현장을 덮친 것이다. 참석자들은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멤버들이었다. 


   이때 김범우는 혹심한 매를 맞고 密陽에 귀양가서 죽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순교자 제1호가 되었다. 형조에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등 명문 양반 출신에 대해선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정약용의 아버지는 押海丁氏 종친회에, 그리고 이승훈의 아버지는 平昌이씨의 종친회에 불려나가 크게 추궁당했다.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이씨 문중회의에 여러번 호출되어 「오랑케의 법도를 가르치는 斯文亂賊」을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관직에서도 추방되던 시절이었다. 이벽의 부친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이벽의 형과 아우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올라 있었다. 


   이부만은 드디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았다. 이벽은 아버지의 죽음을 건지기 위해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방안에서 15일간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1785년 음력 6월14일의 일로 향년 32세였다. 


   乙巳迫害의 회오리가 불긴 했지만 정약용 일가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정조 13년(1789) 정약용은 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고 그후 엘리트 관료로 한강 舟橋역사의 규제를 만들어 올림으로써 「正祖스쿨의 최우등생」이 되었다. 


   正祖 15년(1791) 珍山사건으로 進士 尹持忠(바오로)이 효수되고 권일신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가서 병사하는 辛亥迫害가 있었지만, 정조의 사랑을 받은 정약용은 출세의 길을 달렸다.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형이었다.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정조 16년(1792) 정약용은 왕명을 받들어 華城城制를 지어올렸다. 수년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水原城의 설계도를 완성한 것이다.


   1796년 화성이 준공되었는데, 거중기·녹로기 등의 이용으로 국고금 4만량이 節用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36세 때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또다시 西敎문제로 攻西派의 탄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辨謗疏를 올리고 사직했다. 


   그런 그를 바로 몇 개월 뒤 谷山府使로 기용했다. 목민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는 때마침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 「麻科會通」 12권을 지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했다. 천연두에 대해선 개인적인 회한도 있었다. 그는 슬하에 9남매를 두었으나 6명이 천연두를 앓다 죽었다. 정조 23년(1799) 그는 또다시 內職으로 돌아와 형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반대파의 공세로 곧 물러나고 만다.


   1800년 6월, 정약용을 「미래의 재상」으로 지목했던 正祖가 급사했다. 노론 벽派를 견제하기 위해 南人 時派를 옹호했던 正祖의 死因에 대해선 毒殺說이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다. 어떻든 정조의 急死로 英祖의 繼妃이며 골수 노론벽派 가문 출신인 대왕대비 경주김씨 貞純王后가 12세의 純祖를 섭정하면서 垂簾聽政을 폈다.


   이런 판에 정약용의 셋째형 若鍾이 신유년(1801) 1월19일 敎理書·聖具 등을 담은 책롱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다가 漢城府의 捕校에게 적발되었다. 2월9일, 이가환(前 공조판서), 이승훈(前 천안현감), 정약용을 국문하라는 司憲府의 臺啓(공소장)가 올라갔다.


   "오호, 애통하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악은 죽이기만하고 말겠습니까. …정약용은 본래 두 醜物(이가환·이승훈)과 한 뱃속이 되어 협력했습니다. 그의 자취가 이미 탄로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입이 닳도록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몰래 요물을 맞아들이며 예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임금을 속였고…"


   숙질간인 이가환과 이승훈은 죽임을 당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약전은 천주교와 관계를 청산한 정황이 있어 각각 멀리 귀양을 갔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을 살면서 대작 「牧民心書」 등을 완성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玆山魚譜를 저술하고 귀양 17년째에 不歸의 客이 되었다. 세째형 정약종은 그의 장남 鐵相과 함께 西小門 밖에서 처형되었다. 淸國人 신부 周文模도 이때 자수하여 사형을 받았다. 이른바 辛酉迫害이다. 


   신유박해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黃嗣永의 帛書사건이 일어났다. 백서사건이란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흰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密書가 적발되어 빚어진 사건이다. 편지의 내용은 청국황제가 조선국왕에게 천주교도 박해 중지의 압력을 가하도록 선교사들이 개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이라면 16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秀才로서 정약용의 조카사위다. 


   광주-천진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45번 국도를 따라 3km쯤 가다 「윗도마치」 삼거리에서 30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팔당호의 남쪽 호면 위에 걸려 있는 그림같은 광동교를 만나게 된다. 광동교를 건너면 퇴촌우체국이며 여기서 광주산맥 앵자봉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외가닥길을 25리쯤 달리면 천진암이다. 천진암 입구에서 성지안내소로 이르는 길의 이름이 俟菴路(사암로)이다. 사암이라면 바로 丁若鏞의 아호다. 


   천진암은 조그마한 암자가 있던 자리라고 하지만, 한국천주교에서 성지로 잡아놓은 면적은 약 30만평에 달한다. 한국천주교 창립 300주년인 2079년에 맞춰 준공 예정인 천진암 大聖堂은 일시에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물이 되리라고 한다. 대성당 부지 위쪽으로 난 講學路로 접어들면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鹿菴權哲身墓地銘 巽菴丁若銓墓地銘抄」로 시작되어 「茶山丁若鏞作」으로 끝나는 205자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즉 다산이 지은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을 발췌·인용하여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산길소로를 20분쯤 오르면 옛 천진암 터가 있다. 천진암 터 주변은 현재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의 창립선조」 5人의 묘역이 되어 있다. 옛 천진암 터 아래로는 1789년 강학회 멤버들이 아침마다 세수를 했다는 氷泉이 있다. 다산의 기록 그대로의 모습이다. 


   대성당 부지 동쪽 앵자봉 기슭에는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이 있는데, 정약용 집안의 가족묘지를 방불케 한다. 그곳에는 조선교구의 설립자이자 다산의 조카인 丁夏祥(1795-1839)의 묘가 있다. 정하상은 서소문에서 참수당한 정약종의 둘째아들로서 그 역시 38년 후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다. 정하상 묘 바로 밑에는 정약용의 조부모·부모·정약전의 묘 그리고 이벽의 부모·동생부부·누이의 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초기 교회사는 정약용 가문의 가족사라고 해도 좋다. 


   茶山은 18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와서도 17년을 살고 憲宗 2년(1836)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의 내로다 하던 사람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茶山을 외면했다. 그는 외로웠다. 그는 고독속에서 「欽欽新書」 30권, 「雅言覺非」 3권 등의 대작을 완성했다. 흔히 정치범에게 감옥은 대학원이라고 하지만, 다산 유배지 康津과 고향 마재야 말로 우리 역사상 최대의 학자이며 最多作 저술가를 위한 天賦的인 産室이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3: 위의 제4-3항에 있는 글은, 다음의 파란 색을 클릭하면 확보되는 자료들 중의 한 개 입니다:

 

"소현세자" "이벽" "6대조" "이경상"

 

그리고 바로 위의 구글 검색 키 워드들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 특히 이벽의 집안 내력]을 읽고서 확보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chonjinam.org/client/form/viw.asp?p_idx=151

(발췌 시작) 

또 이제현의 직계 5대 후손이 되는 이 정형은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10대조로서, 1593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선의 임금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하는 국난을 겪을 때,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였고, 조선으로서는 역부족이었던 왜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중국 明 나라의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라는 왕명을 받아, 明 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이를 성사시키기도 하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그는 그의 제자이며 후배였던 지봉 이수광과 함께 서양 문화에 관한 많은 책들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 책들 가운데에는 유럽선교사들이 번역했거나 저술했던 천주교에 대한 책들, 天主實義, 職方外記, 등도 들어있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이정형과 이수광 두 사람들은 교대로 지금의 천진암이 속해 있는 광주군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광주 지역에 학문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광주실학(廣州實學)을 싹틔우기 시작하였다.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 즉 1637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이 항복하자, 광암 이벽 성조의 직계 6대조 이경상 또한 조선의 이 국난 중에 조정에서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경상은 인조 임금의 명으로 靑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 세자를 8년간이나 수행하는 서장관 직무를 받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소현 세자와 이경상은 당시 북경에 머물면서, 거기서 선교 활동하고 있던 독일인 Adam Schall 예수회 신부와 친분을 맺고, 소현 세자의 허락을 받아, 이경상은 자신이 데리고 간 그의 조선인 시종 3명으로 하여금 아담 샬 신부한테서 1645년 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서장관 이경상과 소현세자도 입교 영세하였는지는 불분하다.
 
9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는 아담 샬 신부의 배려와 주선으로, 아담 샬 신부가 세례를 베풀어준 5명의 중국인 영세 신자들도 함께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모두 8명의 영세신자들로 구성된 마치 평신도 선교단과도 같이 교회 서적들과 성물들을 구입하여 가지고, 지금의 해외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신자들처럼 귀국하였다.
 
그러나 1645년 봄 귀국하자마자 2 개월 후, 소현 세자는 갑자기 독살로 죽음을 당하였다. 9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장례는 독살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안되는 죽음의 현장이 기록으로 알려졌으니, 갑자기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은 머리의 두 눈, 코, 귀, 입, 7곱 구멍과 하체 두 곳, 모두 전신 9개 구멍에서 출혈이 쏟아지고, 온 몸은 진흙덩이처럼 상해 있었고, 시신 入棺 때도 참관자들을 극히 통제하였다는 기록으로 독살임이 증명되고 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 Adam Schall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靑 나라에 9 년이나 있으면서, 明 나라를 멸망시키는 靑 나라 군대의 북경 함락에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靑 나라의 지지를 받으므로, 국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구정권인 明 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우는 대신들의 증오심과, 남한산성 함락으로 삼전도에 끌려나와 靑 ?라 장군 한테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던 仁祖 임금의 증오심도 소현세자의 독살에 무관하다고 불 수는 없었다.
 
소현세자가 비운에 세상을 따나자, 북경에서 귀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다섯 명의 중국인 신도들은 즉시 중국으로 다시 귀국조치되었고, 세자의 비서실장(서장관)이었던 이경상 역시 바로 사직당하고 낙향하여,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북경에서 Adam Schall 신부한테 세례까지 받고 함께 귀국하였던 3명의 그 시종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종적이 묘연하여, 아무런 기록도 국내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훗 날, 북경에서 1784년 2월 24일(?) 이승훈 진사 1 인의 영세보다 139년이 앞서는 1645년 이경상이 부리던 소현세자의 시종관들 3명의 입교 영세와 韓中 8명의 영세 信者團 귀국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 벽 성조의 가문은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면서, 학문과 천주교 신앙과 접촉과 관계 발전에 당시로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서양문물이나 서양 종교에 관한 분야는 돋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오로지 왕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매우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이상, 발췌 끝)
 
4-4.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이 소장 중인,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제목의 책 [저자: 서양자 수녀], 제65쪽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명 승정 16년(1643년)에 중국에 왔던 예수회 마르티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중국명 衛匡國] 신부가, 중국의 교무 상황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께 보고드리고자 예수회에 의하여 로마로 파견되어(게시자 주: 동일한 저서 제287-289쪽 참조)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완성한, 그리고 1655년에 유럽에서 출판되었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중국신지도집(中國新地圖集)[게시자 주: 즉, 중국신도(中國新圖)]"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음:
 
(발췌 시작)
  "내가 중죽에 있을 때에더 (소현세자를 가리킴)은 와서 순치 황제를 알현하고 북경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과 친히 사귀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조선 사람도 두서넛이 있었다. 그 가운에 한 사람은 왕에게 시중드는 높은 환관이며, 그는 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신부를 조선에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신부의 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이 떳떳하고도 공순한 원망(願望)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어서 모처럼 얻은 좋은 기회를 헛되이 놓쳐버렸다. 그리고 조선왕은 매우 친절하게 여러 가지로 호의를 보였으나 청나라 황제는 신부를 감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그들과 오고 가는 것을 엄중히 금하였다. 그것은 조선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명나라에 대하여 충성을 바쳤왔기 때문이다.
  즉, 이때 조선 사람 두세 명이 성세를 받고 세자도 신부를 보내주기를 바라마지 않았으나, 신부가 모자라고 청나라에서 엄하게 감시를 하므로 보내줄 수가 없었다."(게시자 주: 동일한 저서 제269-271쪽 또한 참조)
(이상, 발췌 끝)

 

5.

5-1. 다음의 파란색 글자들을 클릭하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문헌들 중에서 구들 검색 결과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나:

 

"birth of the church" "pentecost" site:vatican.va

 

5-2. 그리고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명동 대성당의 현재의 부지 매입 년도는 1880년이라고 합니다.

 

출처: http://samok.cbck.or.kr/content/PrintArticle.asp?idx=2871 [제목: 한국 사회 안에서 가톨릭 정신의 영향, 변기영(수원교구 천진암천주교회 신부, 사목지, 1992년 10월 165호]

(발췌 시작)
우리가 명동 대성당이 없는 지난 1세기를 상상해 보면 이 성당의 존재 가치를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성당은 프랑스 선교사들 특히 불랑 백 주교와 코스트 고 신부,뮈텔 민 주교, 이 3명의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대성당 건립 신심과 프랑스 신자들의 정성어린 성금 그리고 순교 선조들의 피로 물든 신앙을 전승받은 한국 신자들의 땀에 젖은 노력 봉사로 이루어졌으니,터를 매입(1880)한 지 약 7년 후(1886년)부터 전국 신자들의 노력 봉사로 약 7년 간(1892년) 터를 닦았으며,기공식(1892년) 후 약 7년(1898년) 후에 낙성식을 하였다.

(이상, 발췌 끝)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만약에, 이승훈이 포함되었던, 이벽(Yi Byeok, 李檗, 1754-1785년) 및 제1세대의 양반 선조(noble elders)이 지금의 명동 대성당 근처에 위치하였던 한의원이었던 명례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를 들어, 서울 대교구 안쪽이 아닌 다른 교구에서, 예를 들어, 충청도 [(2018년 10월 8일) 주: 당시에 경기도가 혹시라도 서울 대교구에 포함되었을 수 있어, 한 개의 예(example)로서 제시하였던 "경기도"를, 서울 대교구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충청도"로 교체함] 의 어느 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선교/복음화 활동을 수행하였더라면, 아마도 한국 천주교의 창립 시점이 1784년이라는 주장 자체가 서울 대교구 소속의 사제였던 최석우 몬시뇰님에 의하여 애초에 제시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할 경우에,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떠한 경우에도, 명동 대성당이라는 가시적 건물의 건축 부지 선정의 역사적 배경과 한반도 위에 첫 성령 강림(Pentecost), 즉, 진리의 영의 도래(the coming of the Spirit of Truth)에 의하여 발생하였던 비가시적인 한국 천주교의 창립 시점은 전혀 무관한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5-3. 다음의 파란색 글자들을 클릭한 후에 가지게 되는 화면의 왼쪽의 메뉴에 있는 글들을 클릭하면,

 

"변기영" site:http://samok.cbck.or.kr <----- 필독 권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발행의 "사목지" 잡지에 게재된, 최석우 몬시뇰님과 변기영 몬시뇰님의 한국 천주교 창립 시점에 대한 논쟁 중에 주고 받은 반박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위의 파란색 글자들을 클릭한 후에 가지게 되는 화면의 왼쪽의 메뉴에 있는 있는 글들은, 위의 제2-1항에 발췌해 드린,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위의 (#1) (##9) 에서 이미 고찰하였듯이 교리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다음의 최석우 몬시뇰님의 주장과 함께,

 

출처: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nh_035_0020&fileName=nh_035_0020.pdf [제97쪽 각주 34 전문]

(발췌 시작)

천주교성직자로 교회사가인 崔奭祐신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未信者가 가톨릭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聖洗聖事를 받는 길밖에 없다. 따라서 洪儒漢과 李檗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성세성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새 교회법이 예비자들에게도 종래 신자들에게만 주어졌던 장례식 같은 권리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법상의 권리이고 성세성사의 은총과 교회의 구원 은총에 까지 참여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홍유한이나 이벽은 아직 교회 안에까지 들어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멤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교회공동체가 될 수는 없었다…」走魚寺(天眞庵-필자추가)의 講學은 한국교회의 기원일 수 없다(崔奭祐,《韓國敎會史의 探究》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2쪽).

(이상, 발췌 끝)

 

앞으로도 관심이 있으신 국내의 가톨릭 교우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읽혀야 하는, 대단히 소중한 자료들이라는 생각에 또한 안내해 드립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2년 5월 25일]

(이 글의 결론 1) 만약에 본글의 제1-1항에 발췌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79년 강론 가르침이 국내에 일찍 전달되었더라면(가정법 과거), 최석우 신부가 위의 제1-3항 (#1) 번역자 주 (2)제5-3항에서 지적한 바 및 발췌된 바와 같은 주장을 도저히 제시하지 못항였을 것임을, 이 긍릐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 만약에 (i) 본글의 본글의 제1-1항에 발췌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79년 강론 가르침, (ii) 위릐 게시자 주 1-1 제(2)항에서 말씀드린 1992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유관 항들을, 최석우 신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 교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제대로 학습하였더라면(가정법 과거), 1784년에 이승훈이, 이벽 성조의 명에 의하여, 이벽 성조를 포함하여 몇 명에게 주었던 ‘대세’(代洗)를, 우리나라 조선에 있어 천주교회의 탄생 근거로서 도저히 제시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3) 만약에 (i) 본글의 본글의 제1-1항에 발췌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79년 강론 가르침, (ii) 위릐 게시자 주 1-1 제(2)항에서 말씀드린 1992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유관 항들을, 그리고 (iii) 위의 제1-2항에 발췌된 2012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가르침 및 위의 제1-3항에 발췌된 2014년 6월 8일자 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 가르침 등을, 우리나라 조선의 초기 교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제대로 학습하였더라면(가정법 과거), 작금에 이르기까지, 1784년에 이승훈이, 이벽 성조의 명에 의하여, 이벽 성조를 포함하여 몇 명에게 주었던 ‘대세’(代洗)를, 우리나라 조선에 있어 천주교회의 탄생 근거로서 더 더욱 도저히 제시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2021년 5월 25일자 내용 추가 끝]

 

6.

끝으로, 마태오 복음서 28,19-20에 근거한 선교/복음화(evantelization)의 관점에서 고찰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시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0_Yi_Byeok.htm <----- 필독 권고

 

2015년 6월 24일 천진암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 미사에 즈음하여 이 글을 쓰다 

 

평신도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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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

 

출처: http://samok.cbck.or.kr/content/sub0106.asp?idx=5594&bookNumber=144 [주: 옛 주소]

https://cbck.or.kr/Documents/Samok?no=144&page=20 [새 주소이며, 첫 번째 글을 보라]

 

특집 - 한국 천주교회 기원 문제 1991년 1월호 (제 144호), 사목지

 

한국 천주교회 창립 1779년인가 1784년인가?

변기영 (천진암 성역화 위원회 주임신부)

 

천주교회의 엄연한 정통 교리를 따라서 살펴볼 때 한국 천주교회는 1779년에 창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연도를 1779년으로 보느냐,아니면 1784년으로 보느냐하는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보다 상세한 논술을 발표하기 전에 우선 이에 관계 된 분명한 역사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천주교회의 정확하고 엄연한 교리와, 이 정통 교리에 의한 사목자의 공명한 판단을 알아 본다.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이다.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하나뿐이고, 하나뿐인 이 천주교회가 세계 각처로 전파되고 확장되어 나갈 뿐이다(교회법 368조 참조). 

본래 ‘천주교회'라는 말의 의미는 "천상과 지상과 연옥의 모든 신자들이 천주를 모시고 하나로 뭉친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상의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로마 교황과 함께, 하나로 일치하고 있는 지상의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천주교회는 전세계에 '하나’뿐이다. '하나'뿐인 천주교회가 세계 각처에 전파되고 있는것 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니,'일본 천주교회'니 하는 말은, 나라마다 천주교회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뿐인 동일한 천주교회가 한국이나 일본에 전파되고 확장된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지상의 천주교회가 세계 각처로 전파되고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각 지방 단위 공동체를 교구니 본당이니 하고 부르는데,이러한 경우에는 성직자, 신도들,교회 조직 및 책임자의 설립결정 등의 제반 조건이 다 구비되어야 한다. 교회법상으로는 이러한 지방 단위 교회, 그중에서도 교구 설립을 온전 한 지방 교회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상례이다.

 

한국의 경우,1831년 조선 교구 설립을 지방 교희로서의 온전한 한국 천주교회 출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교구 설립 이전에, 여러 박해를 거치며 목숨을 바쳐 천주교를 믿은 우리 선조들의 천주교회 내에서의 위치와 자격을,우리 는 부정하거나 축소해서는 안되고,이와 동시에 조선 교구 설립 이전의 한국 천 주교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기회에 한 가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1794년 말에 성직자 로서는 최초로 주문모 신부가 한국에 파견되는데,그 당시 북경 교구 관할이었 던 우리 나라의 입장에서,이 사실을 단순히  북경 교구에서의 신부 파견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본당 승격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 교회 역사서에서는 1794년을 조선본당' 또는 '서울본당' 또는 '명동본당,설정의 해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구나 본당이 설정되든 안되든,이와 관계 없이, 전세계의 천주교회와 일치하여 신앙으로 하나가 된(레오13세 회칙,Praeclara gratulatioms, 20 Junii 1894 참조) 신자가 한 명만이라도 있으면, 그러한 신자가 생긴 지방에는 이미 천주교회가 들어간 것이고 따라서 그 지방에 천주교회가 생겨난 것이다. 한 나라 지역의 천주교회사를 말할 때,그곳의 교구 설립사나 본당 설립사 또는 세례성사 거행사를 말하지 않고, 그곳 주민들의 천주교 신앙사를 말한다,

 

결국, 교구나 본당이 설정되기 이전이라도,어느 한 지역에 생긴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천주교회 일원이므로, 전세계에 하나뿐인 천주교회가 그 지역에까지 전파되어 존재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고,이들의 존재로 인하여 그 지역 천주교회가 출발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어느 미신자 마을에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예비 신자가 한 명만 생겨도, "천주교회가 그 마을에까지 들어갔다”고 사회적으로 자타가 말하고 있으며, 교회적으로도 이는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교회 헌장제2장참조). 결국, 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도에 대한 문제는 한국에 천주교회가 언제, 어떻게 생겼느냐, 다시 말해서 "한국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생겼느냐” 하는 문제이지, 그것이 결코 한국내의 교구나 본당의 설정 연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천주교회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겼느냐 하 는 문제는, 다른 말로 말하면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를 언제부터 믿기 시작했느냐?” 하는 질문이며, “언제부터 생겼느냐?”보다는 "어떻게 생겼느 냐 ?"가 세계 교회로 하여금 우리에게 관심을 갖도록하는 일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이냐를 알려 주는 '한국인들의 천주교 신앙사'의 출발을 놓고 한국 천주교회의 창 립 연도를 거론하는 것이지,한국 천주교의 교구 설립사나 본당 설정사가 문제 가 되는것이 아님은 상식적인 얘기다.

 

결국,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도 문제는,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해가 언제인가를 말하는 것인데,이것이 1784년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세로부터 시작되었는가,아니면 그 이전에,국내에서 있었던 1779년의 천진암 강학회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며,따라서 영세 전에 천주교를 믿는 예비 신자들의 천주교 신앙도 천주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지,즉 그들도 천주교 신자로 취급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이 문제에 대해서 교회에 대한 의미부터 좀더 자세히 풀어 가며 알아보기로 하자.

 

1.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연도,즉 한국에 천주교회가 생겨난 해가 언제인지를 말하기 전에,먼저 '천주교회’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서에서는 '천주교,와 ‘천주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천주교는무엇이뇨?”
"천주교는 천주 친히 세우신 참 종교니라.”
"천주교회는 무엇이뇨?”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 단체니 볼 수 있고,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니라.”

 

천주교 신앙으로 일치하여 세계 교회와 하나가 된 천주교 신자가 한 명이라도 생긴 지방에는,이미 그곳에까지 천주교회가 전파되고 확장된 것이고,따라서 그 지방 천주교회가 생겨난 것이다.

 

천주교회란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의 단체라는 데 대하여 천주교회 자체가 밝힌 이 정의를 반대하거나,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가 언제부터 생겼느냐 하는 데에는 1779년과 1784년의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해에 천주교 신자 단체가 한국에 생겼다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 아니라,이승훈 선생의 영세 이전에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자생적으로 한국에 생겼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회 일각에서 인정하지 않는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779년,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에서의 강학회를 계기로 하여,‘천주공경가', '십계명가’,'성교요지,등을 지어 부르며,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바치고, 요일이 아직 없던 시절에,음력으로 매월 주일을 정해서 지키던 학자들, 즉 이벽,권일신,이승훈,정약종 등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을 천주교 신자들이라고 인정하는데 반대하는 주장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세례받기 전의 예비 신자들,특히 200여 년 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시기에 있어서, 1784년 이승훈 선생 영세 이전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주도한 학자들,즉 이승 훈 선생 자신을 포함한 이벽 선생 등을 천주교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으냐 하는 것이 사실상 문제가 되는 것이다. 1784년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 세 이전에,국내에서 5~6년 동안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한국 교회 창립을 주도했던 이분들을,비록 세례받기 전이긴 하더라도,천주교 신자들로 인정한다면,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출발 및 창립 연도를 1779 년으로 정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784년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세 이전의 국내 신자들을 영세받기 전이라 하여 천주교 신앙인으로, 나아가서 천주교 신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연도는 이승훈 선생이 영세한 1784년이 될 것이다. 결국,문제의 핵심은 이승훈 선생 영세 이전의 국내 예비 신자들을 천주교 신자로 인정하느냐,하지 않느냐 하는 것 이다·

 

2. 일반 예비 신자들도 분명한 천주교 신자들이다

 

수세(水洗) 전(前) 예비 신자들을 천주교 신자들로 인정하는 것은 천주교회의 엄연한 교리이다. “성신의 감도를 받아 교회에 결합되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 한 예비신자들은, 이 소원 자체로서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자모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품에 안아 감싸 주고 있다”(교회 헌장 14항),

 

이 문제에 대하여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에서 명백하게 답해주고 있다. 교회 헌장이란 교회가 교회 자체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선언한 헌장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세계에서 모인 2,500여 명의 주교들이 교황과 함께 공의회 제2회기 중에 연구와 토론을 거쳐 교회 헌장 제2장 제14항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성신의 감도를 받아 교회에 결합되려는 명맥한 의사를 표명한 예비 신자들은,이 소원 자체로서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자모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품에 안아 감싸 주고 있다”(교회 헌장 14항).

위 헌장의 라틴어 원문은 훨씬 더 강하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Catechumeni qui, Spiritu Sancto movente, explicita voluntate ut Ecclesiae incor-porentur expetunt, hoc ipso voto cum ea coniunguntur; quos iam ut suos dilectione curaque complectitur Mater Ecclesia"(Concilium Vaticanum ,Constitutiㅇ Dograatica de Eccle-sia, 1964, 21, Nov. Lumen Gentium, caput Ⅱ,De Populo Dei, articulus 14.).

 

이것은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정의하고 밝힌것으로서 신앙 교리이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일반 예비 신자들도 이미 천주교 신자들임을 교회는 못박아 선언하고 있다. 하물며, 성직자도 없고,성당도 없고, 신자들도 없어서 세례만 받지 못했을 뿐, 이미 천주교 신앙인들이었던 한국 천 주교회 초기 선구자들은 더 더욱 분명한 천주교 신자들이었음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더 이상의 질문도 논의도 필요치 않은, 엄연하고 정확한 천주교회의 교리를 따라, 이승훈 선생 영세 이전의 국내 학자들은 천주교 신앙인 들이었음을 우리는 의심할수가 없다.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와 '성교요지’ 를 지어서 부르고,요일이 없던 시절에 음력으로 주일을 정해서 지키고,세례를 받아 오도록 북경에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의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였던,아니, 교회 창립 활동에 몰두하였던 우리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에게서,그 당시로서 더 이상의 어떤 의사 표시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승훈 선생을 북경으로 파견하기 이전의 국내 선각자들의 신앙 행위는, 그들이 바로 천주교 신자들, 즉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사도 19,1-7참조)임을 입증하고 남음이 있다.

 

3.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해는 1779년이다

 

“한국에 천주교회가 언제부터,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에서 한 국인들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느냐?” 하는 질문이며,전세계 교회 와 우리 모두의 관심사는 "언제부터 믿기 시작하였느냐?”가 아니라,"어떻게 믿기 시작하였느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세 이전에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출발하여. 진리 탐구와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우리 선조들은, 1779년을 전후하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계기가 되는 강학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고, 이 땅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인으로서의 기도를 바치고 주일을 지키고 하였으니,더 이상 1779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연도로 정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다른 나라 천주교회와 달리, 자생적으로 출발하여 기묘히 시작되었음(1925년 9월 26일 79위 시복 복자측일 본기도 문)을 말할 수 있는 것은, 1779년의 국내 모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며, 1784년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세를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과 창립으로 정할때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인정하여 온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특수성, 자발성 등의 성격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천주교회의 시작은 선교사들이 원주민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 후 최초 경축 미사 때 교황 성하께서 공식 강론을 통하여 말씀하신 아래와 같은 내용은 갑자기,즉흥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그렇게 하실 수도 없고), 이하에 설명하겠지만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천주교회의 전통 교리와 교회관에 입각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온 교회의 목자이신 로마 교황 성하의 사목적인 선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1984년 10월 14일 주일에,로마 성 베드로 대 성당에서의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 경축 미사 때 하신 말씀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민족 구원의 이러한 역사는 바로 진리 탐구로 향하는 인간 이성의 본성적인 열망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 들 -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당시 북경 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특히 새로운 교리 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 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 년부터 1835년까지 56년 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이 없이 一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아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ㅡ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족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Corea.la fede fu recata-caso unico nella storia?spontaneamente dai Coreani stessi. II cammino dei Coreani verso la fede infatti e cominciato grazie all' iniziativa autoctona di alcuni laid. Tale cammino ci fa comprendere di quanta importanza, ai fini della salvezza eterna, sia rivestita l'aspirazione naturale della ragione umana alia verita. Fu infatti, come sappiamo, una leale ricerca della verita a spingere quei laid·?era un gruppo di letterati e "Filosofi" ? a prendere contatti, non senza gravi rischi, con Pechino, laddove avevano sentito parlare della presenza di uomini, alcuni dei quali cattolici, che avrebbero potu? to illuminarii sulla nuova fede da essi conosciuta mediante i nuovi libri. Questi laici, uomini e donne, giustamente considerati i "Fonda-tori della Chiesa" in Corea, per ben 56 anni, dal 1779 al 1835,senza l'aiuto di sacerdoti-tranne la presenza assai breve di due sacerdoti cinesi- hanno diffuso il Vangelo nella loro Patria fino alFarrivo dei Missionari Francesi nel 1836,ed hanno offerto e sacrificato la vita per la loro fede in Crista〈 L'osservatore Romano, 1984,10.14.))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성하께서는,전통적인 사도 베드로의 어좌에서 하신 이 공식 강론을 통하여,3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해 주셨다.

 

첫째는,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이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자발적으로 이룩되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해 주신 것이다.

 

둘째는,한국에서 가톨릭 신앙 생활의 공동체를 최초로 이룩하고,한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한,이 최초의 한국 평신도들을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에 대한 평가와 호칭에 있어서,국내 교회 일각에서까지 주저하던 바를 교황 성하께서 정확히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을 1779년으로 잡으시고,그 후의 한국 천주교회 역사 연대를 1779년을 기점으로 하여 계산하시며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 교황 성하의 공식 강론 말씀을 따라 기쁜 마음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1779년으로 재확인하는 바이며,우리 한국 천주교회를 세우신 선조들에 대하여,‘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이라고 칭하여 온 사실을, 더욱 힘있게 재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5. 1779년이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인가,아닌가 하는 문제는 교회 역사가들만이 다루어야 할 고유 분야가 아니고, 교리 신학자들의 견해를 들어 신앙 교리와 사도적 전통을 따라, 교화 사목자가 판단할 사항이다

 

1779년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에서의 강학회를 전후하여,'천주공경가’ ‘십계명가’,‘성교요지’ 등을지어 부르며,음력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고,세례를 받고 오도록 이승훈 선생을 북경에 파견하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은, 비록 물로 세례받기 전이지만, 이미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자생적인 천주교 신앙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어느 선교사 신부가 어느 나라에 도착하여,그 원주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 신자들이 생겨서,그 나라 교회가 설립되는,가장 정상적이며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러한 선교 활동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 단순히 교회 역사가들에 의해서 기록됨으로써, 그 나라 교회의 창립 연도가 정해진다. 이러한 경우에는,교회 역사가들의 기술만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처럼,성직자들에 의해서 정상적으로 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시작하지를 않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신앙인들이 자발적으로,자생적으로 천주 공경에 관한 신앙 행위를 하면서,교회를 시작한 경우에,즉 예비 신자들이 교회를 창립한 경우,이들의 활동을,물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들의 정상적인 활동과 똑같이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교회 역사가들만의 분야가 아니고 교리 신학자들이 취급해야 할 분야이며, 나아가서 교회의 사목자들이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이 경우, 교회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정직하게,단순하게, 축소나 과장이 없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며 기술해야 하고,이것을 교리 신학자들이나 혹은 전례 신학자들이 검토한 후 이들의 의견을 들어 교회의 사목자가 판단하고 선언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에 관하여,교회 역사가들이 기록한 바를 교회 사목자이신 교황 성하께서 확인하여 발표하신 것은,지극히 합당하고 거룩한 사목자의 선언이었다. 특히,교황 성하께서는 2차에 걸친 한국 방문 기간에 수차에 걸쳐 말씀하시는 가운데,세례받기 전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신앙 활동과 작품 등을 들어 인용하시며 말씀하심으로써,영세 전 우리 선조들의 신앙 생활을 공인하신 것이다. 이것은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한 천주교회의 엄연한 교리이며 전통이고 명확한 사목적 원칙이다.

6. 천주교회에 관한 종합적이며 간결한 고찰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 선생이 외국인 선교사한테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부터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의 특수성이 위축되고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든지 외국 선교사의 활동으로 그 지역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교회에 대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를 간결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원래,천당과 연옥과 지상의 세 곳에 자리한 하느님의 백성을 모두 통틀어서 천주교회로 알아들어야 한다.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요,연옥의 교회는 단련받고 있는 교회요,지상의 교회는 나그네로 순례하는 교회이다. 천주께서는 천상과 지상과 연옥에 산재한 당신 백성을 모두 다스리고 계시니, 이것이 본래 의미의 천주교회이다.

 

다만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상에 있는 천주교 신앙인들의 단체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런데 지상의 교회는 성직자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을 중심으로,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다. 지상에 있는 이 천주교회의 지역 교회는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중심으로 자역별로 조직되어 있으니 이것이 곧 교구이며 이 교구는 주교가 임명한 본당 신부를 중심으로 구역별로 조직되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본당이다.

 

한 나라나 민족 안에서의 천주교회가, 보다 완벽하게 창립된것을 거론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교구가 설립된 사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나 겨레의 천주교회사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그 나라나 겨레의 신앙사를 말하는 것이지, 교구 설립사나 본당 설정사를 말하지는 않는다. 즉 그 나라나 겨레 안에 천주교 신앙을 가진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것을 따지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시기를 정할때, 1779년 천진암 강학회를 전후하여 음력 주일을 제정해 지키고,'천주공경가’, '십계명가’, '성교요지’ 등을 지어 부르던 때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백지화할 수 없는것이 천주교회의 엄연한 교리요, 전통이요, 사목 방침이다.

 

7. 천주교회 내의 3가지 세례,즉 수세, 혈세, 화세에 대하여

 

세례에는수세(水洗), 혈세(血洗), 화세(火洗)의 3가지가 있다. 수세로 천주교 신앙인이 되는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수세를 받게 되는 것이므로’ 신앙은 세례에,특히 수세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천주교 신자들이 받게 되는 성사인 세례에 관한 천주교회의 교리를 다시 한번 밝힐 필요가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 문답에서 밝히고 있는 세례에 관한 교리는 다음과 같다. 즉 세례에는 3가지가 있으니, 수세와 혈세와 화세이다. 첫째,수세는 주로 정상적인 상황에서, 즉 ,성직자가 있고, 시간이 있고, 신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거행되는 성사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수세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러나 이 수세는 때때로 허위나 불완전의 위험성이 없지않다. 예를 들어, 천주교를 신앙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이,정치적으로나 사업상 또는 결혼하기 위해서 교리를 배워 수세를 받을 수가 있다. 교회 역사상 한때는 갓난아기들에게 주는 수세의 타당성이 문제된 때도 없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진실한 원의가 없이 거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코 수세가 불필요하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이론은 아니다.

 

둘째, 수세를 받을 수 있는 후보자는 있는데, 수세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또는 줄 수 없는 환경일 때, 수세를 받지 않은 천주교 신앙인이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리며 순교하게 되는 경우에, 즉 세례받지 않은 천주교 신앙인이 순교하 는 경우, 이런 이를 수세를 받은 이와 똑같은 영세 신자로 교회는 인정하게 되는데,이러한 사람의 영세를 혈세라고 부른다. 즉 천주교를 신앙하면서도 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신앙이 없으면 순교할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앙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혈세도 때때로 좀 불완전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예비 신자가 박해를 당하여 천주교 신앙을 고백해도 죽고 고백하지 않아도 살아날 희망이 없어서 아무래도 죽을 수밖에 없을때, 천주라는 신이 계시든 안계시든 간에, 만일 계시다면 천당에나 가고자 신앙을 선택하는 경우,그 마음의 상태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신앙의 상태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혈세가 어느 정도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는 좀 의문시될 수도 있다.

 

셋째, 정상적인 상태에서 수세를 받을 수도 없고 또 박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혈세를 받을수도 없는 경우에,세례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하고 분명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예비신자들이 받는 세례의 효과를 화세라고 부르며, 이렇게 비상시기 하에서 화세를 받은 사람들은, 수세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든가 혈세를 받아야 할 상황아 오면, 수세나 혈세로 자신이 받은 화세를 입증하고 공식화하는 것이 정상적인 결과이다. 천진암 강학회의 학자들이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고, 십계명가를 지어 노래하며,성교요지를 지어 부르고,음력 주일을 제정하여 지켰을 정도인데, 특히 북경 천주교회와의 연결을 수차례 시도하다가 마침내 이승훈 선생을 세례받고 오도록 북경에 보내어 성공을 거두게 될 정도였는데, 이분들이 화세를 받기 위하여 더 이상의 무슨 열망과 무슨 어떠한 표현과 노력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상 천진암 강학회의 학자들은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모두 수세를 받았으며,박해가 일어나자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피를 흘려 순교하는 혈세까지 받았으니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은 화세와 수세와 혈세를 받은 가장 완벽한 영세자들이다. 따라서 이분들의 신앙 생활과 신앙 활동을, 마치 칼로 나무를 자르듯 수세 전 활동,수세 후 활동 등으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모두를 상호 보완적이며,발전적이며 연속적인 상태에서 고찰하며 평가해야 할 것이다.

 

즉,세례성사로 천주교회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천주교회 안에서 세례성사가 베풀어지는 것이며,세례성사로 신앙인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례성사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세례성사가 지방 천주교회 창립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우선하는 것이며,신앙 있는 신자들이 생김으로 인하여 출발되는 교회의 존재가 세례성사에 선행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8, 교회와 신앙과 세례의 상호 관계

 

교회는 수세보다 더 크고 수세에 선재하는 것으로서,교회가 수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세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교회가 수세를 베푸는 것이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또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더욱이 구원받기 위해서 세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례 중에는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가지가 있는데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요청되는 수세를 수세 이상으로 중요하고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으로까지 여기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교회 안에는 7성사가 있는데 그중에 수세는 입문적이고 필요하고 중요한 성사일 뿐이지 ‘수세=교회’라든가또는 ‘수세=신앙’이라고까지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수세보다는 신앙이 앞서는 것이며, 수세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가 수세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수세란 교회 안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중요 성사 중 하나이지,수세로써만 교회가 생기고 수세로써만 신앙이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수세받기전이라도, 천주교회에 입회할 분명한 뜻이 있고,이뜻을 표시한 예비 신자는 이미 천주교 신앙인임을 교회는 선언하고 있다. 더욱이 자모이신 교회는 신앙인이 일부러 수세를 안 받는 것이 아니고,물리적 불가능 때문에 불가피하게 수세를 받을 수 없는 환경에는 그 효과를 대신 줄 수 있는 화세라는 것도 있게 하였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교회 내의 분열을 꾸짖으시며 유일하게 수세를 들어 말씀하신다. 즉,당파 구성의 핑계로까지 이용되는 듯한 형식주의적인 수세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에 처음 갔을 때,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었다(사도 19,1-7). 그는 고린토 지방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1고린 1,17).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나는 클로에의 집안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 는 바울로파다,'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고린 1,10-17a).

 

결국 천주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고,신앙이 있어야 신앙심으로 인하여 세례를 받게 되어 있지,세례를 먼저 받아야 천주교를 신앙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신앙은 세례에 선행하는 것이고 신앙을.확고히하고, 강화하는 한 결과로서 세례를 받는 것이므로, 천주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세례전의 예비자들을 천주교 신앙인으로 인정하고 천주교회 일원으로,천주교회 자녀로 공인하고,사랑하고, 보살핀다는 것을 확인하고 선언한 것이다. 즉 천주 교회는 형식주의와 외형주의를 중요시하는 무슨 사회나 협회가 아니라 본질과 정신과 내용을 중요시하는 종교 단체이기 때문이니, 영세자들이 모였다고 모두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로,마르크스나 스탈린이나 그 공산당원들이 대부분 영세자들인데 반하여 그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9. 기념 행사 거행으로 역사적 사실이 달라질 수는 없다

 

기념 행사 거행으로 과거 역사가 달라질 수는 없다. 기념 행사 거행 연도 (1984)를 기점으로 하여,교회 출발 연도를 거꾸로 계산해 올라가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 역사는 불변적이고 고정적이지만, 이를 기념하는 현재와 미래의 각 종 행사는 늘 가변적이고 유동적일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오래전부터 샤를르 달레 신부의「한국천주교회사」에 의거해 서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수세를 받은 해를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기점으로 삼았고,1884년에는 불랑 백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 100주년 기념을 하였으며,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200주년 기념을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일각에서는 한국 교회 창립 연도를 1784년으로 확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기념 행사를 했으니,이 기념 행사에 의해서라도 할 수 없이 과거 역사를 정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인데 이러한 원칙은 합당치 못하다고 본다. 기념 행사로 역사를 바꾸거나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과거의 역사로 미래의 기념 행사가 달라지거나 바뀔 수 는 있어도 반대로 기념 행사로 인하여 과거 역사를 바꿀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100주년 200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한 연도를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 교회 기원을 거꾸로 계산하여 올라가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도를 정해야 한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자료가 새로 발굴되기 시작하는 것이 1980년대 전후이기 때문에, 100주년 기념과 200주년 기념을 1884년과 1984년에 거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며, 후대인들이 볼 때에도 오늘의 우리 세대를 탓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200년 수난의 길을 걸어 온 한국교회가 200주년을 계기로하여, 자신의 역사를 명확히 정립하게 되었다는것 만으로도, 1984년을 전후한 200주년 기념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행사로 역사를 좌우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역사에 의해서 기념 행사가 좌우되어야하고 재조정 되어야 할 것이다,

10.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미래의 역사는 임의로 창조해 나갈 수 있으나, 과거의 역사는 후대의 노력으로 밝히고 빛낼 수 있을뿐 달리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미루면, 다음 세대나 또 그 다음 세대에 가서는 분명히 바로잡힐 것이다.

 

이상 간결히 밝힌 바와 같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한 정통 교리에 따라 비추어 볼 때,한국 천주교회는 1779년 천진암 강학회로 교회 창립의 계기를 맞았으며 1784년 북경에서의 이승훈 선생 영세로 교회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창립사의 자료 발굴이 미흡하던 시대에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정해졌던 1784년의 교회 기원관은 1779년으로 바로잡아 나가야하며,교회의 최고 사목자인 교황 성하께서 이미 선언하시고 인용하신 한국 천주교화 창립 선조들의 신앙 생활과 활동을 우리는 결코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존경하고 본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빛나는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평가로 인한 왜곡된 교회 역사관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며,우리 시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외면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교회의 최고 사목자이신 교황께서 인용하고 공인하신 현시점에서, 오히려 국내 교회 일각에서 이를 반대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끝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며 이 논고를 마치고자 한다. 천진암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단들을 상대로 몇 차례 조사를 해본 결과, 신자들의 약 70%가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가 세웠다고 아직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김대건 신부는 1821년생이고,이벽 선생은 1754년생으로 67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고 알려 줘도, 또 이벽 선생한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권일신 선생의 제자인 이존창이 충남 고향 땅에 돌아가서, 그곳에서 관리 노릇을 하다가 은퇴한 김진후라는 노인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는데,이 노인의 증손자로 태어나는 어린이가 바로 김대건 신부라고 설명해 주어도,그래도 한국 천주교회는 "우리 김대건 신부가 세웠다”는 생각을 바꾸기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역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꾸어 바로잡아 놓은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역사적 사실과 명확한 정통 교리를 부정할 수 없으며,부정해서도 안될 일이므로,또 이를 달리 바꿀 수 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안하면 다음 세대나 또 다음 세대에 가서는 반드시 바로잡힐 일이므로 우리는 자모이신 교회가 사도적 전통과 신앙 교리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를,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을 본받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미래의 역사는 임의로 창조해 나갈 수 있으나,과거의 역사는 후대의 노력으로 밝히고 빛낼 수는 있어도,달리 바꿀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무색하게 만드는 일은 매우 삼가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즉, 엄연한 역사를 명백한 교리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선언해 주시는,위에 인용한 교황의 공식 강론 말씀을 우리는 다시 한번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교회법전,1989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1969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

3)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문답,1982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

4) 공동번역 신약성서,1977년 대한성서공회 발행.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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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44시간(자료 조사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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