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성당 게시판

연중 제31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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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michaelhun] 쪽지 캡슐

1999-10-30 ㅣ No.318

                       연중 제31주일(가해. 1999. 10. 31)

                                             제1독서 : 말라 1,14b-2,2c. 8-10

                                             제2독서 : 1데살 2,7b-9. 13

                                             복   음 : 마태 23,1 - 1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앙상해진 나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우리에게 낭만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모습들입니다.  떨어진 낙엽을 밟으면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계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더 나은 생활, 더 좋은 옷, 더 좋은 집, 더 좋은 신랑감이나 신붓감, 더 좋은 사회적 위치.  사실 높은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부인 저도 어쩌면 인정받고 더 좋은 위치에 있고자 그래서 모두가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가끔 존경하고 싶은 분들을 볼 때면 저 분은 아무리 자리가 바뀌어도 지금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리가 바뀌면 그 전의 삶은 잊어버리고 나뭇잎이 가을에 변하듯 변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직장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전보다 더 바쁘고 분주하게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랫사람들에게 상사로서 일과 생활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 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사회가 일에 대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다 중요시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책임감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요즘 학교가 학교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말들 합니다.  학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수업시간에 자고 있는 학생들을 깨우지 못하고, 학생들의 보복이 무서워 야단도 못 친다고 합니다.  수업을 도저히 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수업을 듣기보다는 거울을 보거나 몸단장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하니 이런 말은 듣는 어떤분들은 학교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학교가 학교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임금과 부모와 스승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선생님을 자신의 스승처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부모님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지만, 몇몇 부모님들은 선생님께 대한 존경의 표현보다는 험담이나 비하시키는 말, 선생님을 마치 가정교사처럼 생각하는 표현들.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의 모습으로 선생님에게 돈을 주었으니 나의 자식이 잘되도록 책임을 지도록 강요하고, 간섭하는 모습들.  자녀의 지금의 생활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녀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학교를 죽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당 지하실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우리 본당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하실 계단과 대성당 앞 계단에 침과 함께 너부러져 있는 그 많은 담배꽁초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 아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과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선생님을 존경하고 교육을 시켜 나간다면 우리는 학교를 그리고 사회를 밝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학교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가 되고 사회의 문제가 가정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언행의 일치된 모습과 성실함과 생활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극진히 생각하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고,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이 사랑으로 일치된 모습으로 전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도리어 많은 사람을 넘어 뜨리"고 있는 사제들과 비교하게 합니다.  말라기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사제들이 하느님의 법과 레위와 맺은 계약을(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정의와 가치의 본질을) 깨뜨리고 무시하여 사회적 차별을 만들어 결국 그들 자신이 많은 이들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믿음을 전제로 주신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 서로간에 맺는 약속이면 공동체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깨뜨리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시킨 사제들의 태도를 말라기 예언자는 책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가르쳐야 할 사제들과 율법교사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행일치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말입니다.  더욱이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사회분위기에서는 더욱 많이 가지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더욱이 완벽하게 살수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하느님께 간구하며 도움을 청하는 겸손한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번 한 주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행일치와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겸손되게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부모가 가정에서 언행의 일치된 생활과 겸손과 존경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배워서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힘이 들고 어렵겠지만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분명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변화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 되이 무릎 꿇고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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