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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도대체 천주교는 누구를 위한 종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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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61.106.106.*]

2006-04-25 ㅣ No.4140

 

  † 하느님이 이성현님을 오로지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성현 형제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우리가 부족하기에 고민거리도 참 많은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민거리를 잘 돌아보고 주님 보시기 좋도록 가꾼다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로 이어짐을 믿습니다.

 

여기에서의 주님은 우리 안의 깊은 나이신 그분임을 우리는 익히 듣고 체험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영원 무궁하신 당신의 은총안에서 오로지 세상 사람들과 지고 지순한 친교를 나누며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느 누구에게도 선교의 그것으로 가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데로 잘 안 될 때가 많다는 것도 우리가 주지하는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는 형제님으로 하여금 현재의 의미었어야 할 고통, 고심등으로 우리가 복음을 나누려 하기에 주님께서 도와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이루어짐을 믿게 됩니다.

 

차 한잔을 마시더라도 과거의 맛을 버리고 늘 새잔을 기울인다는 자기 암시에 익숙해 진다면 신선한 새 차를 마실 터인데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서 그 신앙도 늘 그리 쇄신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이 모든 일이 잘 풀릴텐데 우리는 때때로 정말 많은 십자가를 주렁 주렁 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무엇을 '앎'이란것도 고통이 수반 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여 때때로 내가 하느님을 큰 바보로 만들어야 했기에 쌍날칼 같으신 하느님께서는 나의 무디어져만 가던 양심 앞에서 천상 천하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로 치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묵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새날이 오면 누구에게나 함께 하시어 나를 사랑하시기에 무엇을 청하지만 우리는 보기 좋게 딱지를 놓거나 오히려 화를 내거나 공적인 자리만 아니면 그러한 하느님을 번쩍 들어서 패대기를 쳐버리고 싶은 실수를 반복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결국 제가 그런 하느님을 내 자아로 해석하던 습관에 젖어 있기에 그러는 실수와도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나의 욕심이 하늘을 찌르기에 하루에도 열두번씩 하느님을 배반하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믿습니다'의 한마디 고수로서 목에 칼을 받은 선지자들의 희생이 내 몫이라 우기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반복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질투의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당장 쓰시고자 하는 도구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함께 나누어달라 청하시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가지고 먼저 '보고, 듣고, 믿는 과학적 단편 사고에 젖은 황우석 박사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어 큰 몫으로 써 주실지도 모를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우리의 단편적 사고에 젖을 수 있기에 이러한 물질, 편법등에 젖은 위험한 비복음적 생명 복제 행위가, 그것도 만레사 님께서 자상하게 설명해주신 매우 위험한 임상 실험등으로써, 더우기 초창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하는 '배아 줄기세포' 사건이 어느덧 썰물처럼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환자와 직접 맞닿는 '임상실험 단계'중으로써, 생명 윤리에 입각하여 그 윤리성에서도 문제가 없는 성체(어른의 몸체라는 뜻) 줄기세포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아직도 다수의 우리 자아는 앞서 말씀드린 그 것처럼 이 좋은 문제성에 무관심하기도 하는데 형제님의 그것으로 하여금 이것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은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무섭다는 무관심이 아닌, 복수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잊혀짐이 아닌, 그것을 위하여 형제님 경우는 분명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에 적지 않은 분심을 허락하심이라 믿습니다. 따라서 형제님이 원하시는 데로 일단 싫은 사람들이 나타나더라도 내가 그들에게 움직이는 선교맨이 될 수 있도록 그저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바꾸게해달라시면 좋을듯 합니다. 아마도 이런 단순 무식하려는 방법은 의외로 쉽게 허락하실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우리의 그것으로 하여금 또다시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실수등의 걱정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염치없는 우리는 새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날 군에서 신병 훈련 받을 때의 그 노력보다 십분의 일만 견지하더라도 잘하면 이번 하루는 늘 지고 지순함으로 깨어나 있으라는 명령도 받고, 또 그것에 화답하는 나를 바라봄으로써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수확은 이제 시간 문제라며 결과에 치우친 귀납적 사고보다 열매를 바라보게 해주시는 과정론의 연역적 사고를 허락해 주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짧은 제 생각이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묵묵히 그러한 생명 수호를 위하여도 성체줄기 세포를 연구해 왔고, 이것이 인공수정 허락론과 어떤 관계인지 묵상할 것인가, 아니면 더 주님께 의탁할 것이가는 형제님의 당면 과제이기도 한듯 한데, 더불어 수도 사제와 달리 교구 사제는 도시의 사목을 위하여 푸른돈도 필요하기에 가난 성소를 하지 않는걸로 알고 있는데 형제님이 고심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신부님의 그것이 황우석 박사의 그것과도 같은 맥락으로서 함께 즉각 즉각 봉헌할 수 있는 신심으로 변모하기를 청해봅니다.

 

정말 제가 현재로서 그렇게 못하지만, 가장 가까운 내부의 적으로부터 그것도 주님이 가장 믿는 내가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얻는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무조건 평상심의 그분 또는 나머지 물과 물같은 유형의 상대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즉 그렇게 되기를 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형제님은 지금 그렇게 되길르 청하고 계십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되기를 청합니다. 사탄이 내게 너 그러다가 초대 순교자들처럼 칼 의연히 받을 수 있어?라고 물으며 피하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대 순교자 역시 하느님이 선정하실 몫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픗이 알기에 걱정없다며 큰 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렇게 나아갑시다. 하느님을 더 닮아 우리도 그 신부님처럼 가장 갖고 싶은 것 모두 갖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능력을 달라 계속 땡깡도 부려봅시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무려 2006년동안 당신의 피와 살로써 말씀하시는 성경 말씀보다는 악마의 속삭임에 젖어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자 당신의 살과 피로써 거룩한 죽음을 맞으시고자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야말로 은하수가 모인 은하계를 지나 전혀 새로운 은하수만큼이나 수많은 또다른 은하계들도 지배하시고 왕하시는 하느님 안전에 겨자씨 만큼이나 작은 힘으로나마 주님의 그 성총을 나눌 수 있도록 한다면 더이상 바램이 없기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이웃들에게도 회개함으로써 그 겨자씨 만큼이나마 생각과 말과 행위로써 회개하고 보속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청해봅니다.

 

미사때에 말 뿐 아니라 생각과 행위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잘 안될 때 다만 평화의 도구가 되고자 나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사료됩니다.

 

하여 살아있는 고요로써 갯세마니 동산에서 홀로 고통 받으시는 주님의 고통을 자는척 하면서 훔쳐 보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아무튼 살아있다는 것도 이만 저만의 의미깊은 고통이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 잘 해결 되리라 믿습니다.

 

어느새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집중으로 다시 초대하시는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립니다. 여기서의 예배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모두 함께 올리는 미사이기를 기대합시다. 아멘.

 

본론은 짧고 사설만 왕창 늘어놓은것도 같네요. ^-^;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거죠? 사실 글을 쓰는 저도 그동안 많은 부분을 형제님과 동감해 왔답니다. 하지만 어쩌나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다만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성총에 그저 염치 없고 뻔뻔 스러운줄 알면서도 이처럼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 최상책인줄을 알잖습니까?

 

매달리는 방법중 하나를 권고해드리겠습니다. 이곳 굿뉴스의 성경쓰기를 열람해보십시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동안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온갖 비복음적 사고에 의하여 그 긴 성경을 어떻게 읽거나 쓸 수 있는가? 하던 나의 자아의 모든 봉헌이 이제 시간 문제라며 전혀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완전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쓰고 나누는 평화로써 너무 잘하려는 것도 아닌 못하는 것도 아닌, 내가 찾던 장엄하고 멋진 곳에서의 주님이 아닌, 어눌하고 감사로운 마음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의 성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굿뉴스 성경쓰기 정말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더군요. 한절, 한절 쓰면 곧바로 자연스러운 평화의 녹색으로 변모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열면 하느님의 칼라인 푸른색으로 받아주십니다. 이 어찌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아이디어가 아니겠습니까?

 

벗들과의 선의의 경쟁도 참 즐거운 일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좋은 대화도 열려 있기도 합니다. 변모할 필요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지며 저마다의 모든 달란트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완전하신 주님의 말씀속에서 다만 평화의 도구이길 원하는, 나는 나다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은총만을 믿으려는 나를 위한 식별력도 허락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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