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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논술문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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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jhp94] 쪽지 캡슐

1999-10-09 ㅣ No.1449

<삿갓 논술 모의고사>에서 떠 온 문제입니다.

아랫글을 참고하여 "정보화시대에도 글쓰기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논술하시오.

 

<팔만대장경>을 기억하라 --이진우(계명대 교수·철학)(96.5.29 문화)

 “변화된 사회에서 스스로 변화하는 전통만이 살아 숨쉴 수 있다.”

세계적 석학인 하버마스의 이 말이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요즈음 자꾸 머리에 맴도

는 것은 나름의 까닭이 있다. 하버마스와 같이 지낸 3일 동안 내가 진정 배운 것은

‘철저히 묻는 자세’였다. 나는 대구에 있는 관계로 외국 손님들을 종종 가까운 해

인사와 불국사로 안내한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적 표정과 신적 자비심이 조화를 이루

는 석굴암의 본존불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예외였다. 거

듭되는 그의 질문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 훨씬 더 많은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해인사 방문의 절정은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인 종림 스님과의 장시간에 걸친 대화

였다. 하버마스가 종림 스님에게 던진 세 질문이 내게는 ‘정보 시대에 글쓰기의 전

통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라는 화두에 접근할 수 있는 세 단계 걸음으로 여겨졌

다. 첫째 질문은 지극히 간단하다. "왜 대장경을 만들었는가?"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대장경판은 몽골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작했다. 고려 시대

에 두 번 만들어진 대장경판이 공동선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버마스의 다음 질문은 다소 엉뚱하지만 예리했다. "불교적 진리탐구는 참선과 명상

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왜 불경을 그렇게 철저하게 편집하였는가?" "언어와 문자를

배제하는 명상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글쓰기는 모순되지 않는가?" 하버마스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명상을 통해 얻은 직관적 진리가 옳은지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와 담론을 통해, 즉 글쓰기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에,

문화적 의미를 담은 글 없이는 어떤 전통도 계승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마지막 질문은 좀더 신랄했다. "대장경판에 담겨 있는 사유와 글쓰기의

철저함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가?"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불교적 명상과 글쓰기

의 철저함이 서양의 전통에 뒤지지않는다는 하버마스의 첨언이 위안이 되기에는 나의

충격이 너무나 컸다. 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의 철저화와 글쓰기의 문화화

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가. 불경의 가장 완벽한 수집과 편집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연구의 토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대장경은, 오직 8만이라는 숫자만을 내세울 뿐 그 내

용은 잊혀진 ‘망각의 기록’에 머무른다. 그러나 대장경은 한편으로 우리의 역사 해

석과 문화적 창조성을 담고 있는 ‘기억의 기념비’이기도 하다.

 기록은 그것이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과거의 해석을 담고 있을 때 의미있다. 기록이

생명력이 있으려면, 지금은 잊힌 과거의 해석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나 기념비가 우

리에게 역사적 의미와 창조력보다는 단순한 과거 사건만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망각

의 기념비’이다. 기념비는 역사 속에서 침묵을 강요 당한 것을 상기시킬 때 비로소

제 값을 발휘한다. 기념비가 망각된 것을 일깨울 때, 기록은 비로소 창조의 자원이 된

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우리는 곳곳에 기념비를 세우려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도 망각의 기념비를! 짧은 시간에 현대화를 이룩했다는 기념비, 우리도 무엇인가

를 할 수 있다는 기념비, 정보시대만큼은 앞장서 이끌겠다는 기념비, 63빌딩, 압구정

동, 인터네트. 이들은 모두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잊겠다는 망각의 기념비들이 아닌

가. 매일매일 쌓여가는 수많은 글들, 이들은 또한 모두 읽고 기억하기보다는 읽고 잊

기 위해 쓰인 글들이 아닌가?

 하버마스가 우리에게 남긴 화두, 그것은 “대장경판을 기억하라!”이다. 잊히지 않을

글을 쓰고, 의미 있는 기념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에서 망각된, 아니 망각

하도록 강요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기록 속에 죽은 문화 유산을 우리의

삶에 의미 있게 재생시키는 작업이다. ‘기록’만을 위한 활동을 잠시 멈추고 기념비

속에 숨은 뜻을 ‘명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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