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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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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샤 [moon8484] 쪽지 캡슐

1999-10-11 ㅣ No.661

저는 오늘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제 기억에 그 친구는 총명했고 공부를 잘해서 학업성적이 늘 우수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머니도 둘, 아버지도 두분 이었는데요,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각기 또 다른 새로운 분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친구네 집은 외가댁 분위기와 친가 쪽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어요. 외가는 가난했고, 친가 쪽은 부유했습니다. 경제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학벌이나 문화적 배경(?), 교양적인 수준까지 어린 그 친구가 느끼기에도 너무 많은 대조가 되었죠.

아버지는 아주 점잖고 멋진 신사인데 비해 어머니는 조금 무지한 분이셨어요. 저도 한번 그분들을 뵌 적이 있었는데, 정말 저 두 분이 부부일까? 하는 생각이 들던 게 사실입니다. 어머니가 좀 과격하셨던 것 같아요. 말씀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욕설이 즐비했고, 몸가짐도 거치셨고......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모두 잘 가꾸시질 못한 분 같았습니다. 어쨌든 그럭저럭 살다가 아버지에게 급기야는 다른 여자가 생겼고 두 분은 이혼을 하셨답니다.

처음엔 아버지랑 같이 살았는데, 친가 쪽에서 이 친구를 늘 못마땅하고 거추장스럽게 여겼대요. 조금만 잘못해도 친어머니를 들먹이며 꾸중하셨고, 결국은 새어머니에게서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나자 자신은 다시 친어머니에게 돌아가야만 하게 되었더랍니다. 그때 친어머니는 벌써 다른 남자분과 살고 계셨고요. 그러다 보니 이 친구는 아버지를 무척 원망하게 되었다 하더군요. 아버지가 자신과 엄마를 버렸기 때문이라고요......

그때부터 친구는 열심히 공부해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던 저는 그 친구를 보면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친구가 맘 고생하는 걸 지켜보면서 얼마나 힘들까 안쓰러워 하기도 했고, 반면 별 문제없는 환경에서도 공부는 뒷전이고 맨 날 뭔가에 불만이 가득 차 투덜거리기나 하는 절 비교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2 겨울방학 즈음해서 그 친구가 친아버지 댁으로 등록금인가 보충수업 비인가를 받으러 갔었을 때였습니다. 친구는 거기서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이복동생 둘과 함께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새어머니는 친어머니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주 멋진 여성이었고 그 친구가 늘 꿈꾸던 단란한 가정이 바로 지금 아버지가 살아가고 계시는 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고 죄인처럼 계시는 걸 본 친구는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내가 아버지였어도 그랬을 것 같아" 라고 하더군요.

아버지를 향한 분노로 공부를 택했던 이 친구는 그 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다가 그만 대학입시에서 떨어지고 몇 차례 재 시도를 해 보았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지 않아 그대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지금 그 친구는 제 곁에 없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친구의 이야기는 절 늘 고민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 그래서 용서한 결과가 그의 진로를 멈추게 한 걸까요? 원한 때문에 공부를 하는 건 옳지 못하고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무엇 때문이라도 경쟁에서 승리하는 걸 기피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 당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던 그를 보며 감동(?) 받았듯이 말입니다. 그가 학생 본분을 다해 열심히 공부한 일이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를 용서하고도 학업에는 별지장이 없었겠지만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아주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어머니가 어느 정도 집안 격에 맞게 좀더 자신을 가꿀 줄 알았더라면,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무지한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거나 또는 자식 때문이라도 그냥 살았더라면...... 저는 이런저런 만약의 가정을 생각해 보지만 현실은 이 모든 것을, 억지를 닮은 이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1더하기 1이 반드시 2일 수만은 없는가 봅니다.

때로는 그것이 3이나 4, 또는 0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우리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교육은 더 이상 1더하기 1이 2라고 우기지 말아주십시오. 3이나 4, 또는 0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교육으로부터 너무 많이, 너무 오래 속아왔다는 배반감을 느낍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좀 흥분을 했나 봅니다.)

용서해야 할 일과 용서해서는 안 될일 그 것을 판별하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우리가 용서해야할 많은 것들에 대해서 좀더 차분히 생각 해 보아야 겠습니다.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일, 건강하게 성장하는 일,  참된 용서는 바로 그 건강한 모습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일침은 아마도 건강한 이해와 용서가 될 때까지를 말씀하신 게 아닐까요? 이제부터라도 건강한(?)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공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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