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눈꺼풀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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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0-02 ㅣ No.5402

 

1995년, 세계적인 패션잡지의 편집장이 뇌졸증으로 쓰러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 조미니크 보비.

병마는 그가 이룬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뇌와 신경체를 잇는 신경망이 끊어져 말할 수도, 먹을 수도, 혼자 힘으로는 숨을 쉴 수 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왼쪽 눈꺼풀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봄에서 여름으로 게절이 바뀌었지만 증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싸움이 계속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문안을 온 친구들이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처럼 눈을 깜박여서 의사를 소통하고 책도 써 보는게 어떻냐고 제안했습니다.

"쉬워, 쉽다니까... 자넨 눈만 깜박이면 된다구!"

안 그래도 자신의 슬픔과 가족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서슴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뒤, 그와 눈꺼풀 재화를 나눌 대필자가 정해지고, 얼마나 걸릴지 가능은 한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문장을 마칠 때는 눈을 아예 감는 걸로 하죠."

두 사람의 합의에 따라 알파벳과 단어, 문장들을 자주 사용하는 순서대로 재배열한 뒤 눈 깜박이는 횟수를 정했습니다.

문장 하나를 만든느 데 하룻밤을 꼬박 새기 일쑤인 고난의 작업.

"맞죠? 벌써 한 줄이나 썼네."

눈이 충혈되다 못해 경련이 일 지경이었지만 그는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여보, 오늘은 그만해요. 시간은 많잖아."

충혈된 눈에 약까지 넣어가며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사이 요령이 생기고 속도가 붙었습니다.

"좋아요, 제목은 뭘로 하죠?"

마치 퍼즐이라도 풀듯 그가 단어의 첫글자만 깜박여도 나머지를 척척 맞출 정도였습니다.

"잠수복과 나비? 멋지다!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요!"

<잠수복과 나비> 라는 제목의 책이 완성된 것은 1년 하고도 3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직장생활에 관한 진솔한 마음이 담긴 그 특별한 책은 단 열흘만에 17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 혼자서는 흐르는 눈물조차 닦을 수 없던 남자는 1997년 3월 마침내 그를 가두고 있던 잠수복을 벗어던지고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하늘나라로 날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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