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울성당 게시판

내가 죄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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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구 [cygnus209] 쪽지 캡슐

2001-09-16 ㅣ No.1758

미 테러 참상에 부치는 시

 

                         내가 죄인입니다

                                                      박기호 신부

 

오, 오 어쩌나 어쩌면 좋을거나.

영화도 게임도 아닌 어유, 저 일을 어쩌나

작별의 키스도 나누지 못하고 묻혀져 가는 생명들

무너지는 산, 거꾸로 흐르는 강물에

꿈과 사랑과 찬양이 곤두박질 치며 통곡하네

하느님의 숨결이 콘크리트에 잔해에 턱 막혀버리네.

 

누구의 죄인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고백하라 고백하라!

 

예, 예 접니다. 제가 하늘과 세상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마음과 생각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미움을 접어 날린 종이 비행기가 폭격기가 되어

굿 모닝, 좋은 아침을 종말로 불태워버렸습니다.

 

아, 마음과 현실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가 이리도 큰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마음 생각은 생각인 줄만 알았지

머리카락 하나까지 모두 세어두신 하늘 아래

팥알만큼 한 생각 한 조각도 숨길 수 없음을..

그래서 마침내 저 고운 목숨들을 빼앗을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하늘과 세상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형제들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하면서도 지난날에

항공모함 공군기가 사막의 도시들을 무차별 공습할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뛰어가다 함께 쓰러져간

모슬램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때에 아무런 슬픔도 연민도 느낄 수 없었단 말입니다.

 

심야의 하늘에 불빛을 그리며 크루즈 미사일을 쏘아 보내던  

걸프전의 CNN 중계를 전자 오락 보듯 했을 뿐

그 한 발의 폭격마다 처참하게 죽어간 한 생명의 현장을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마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러고도 내가 성한 사람입니까? 나는 장님입니다.

 

팬텀기와 장갑차 앞에 부지갱이와 소총을 들고 몸을 던져

풀잎처럼 쓰러져간 이슬람 전사의

가슴에 사무친 한을 보지 못했고

이미 그렇게 죽어가던 형제들의 죽음에는 눈을 감았으면서

이제 텔레비전 앞에 안타까움의 눈을 떼지 못하다니

오, 저는 죄인입니다. 내 죄가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테러에 희생된 영혼을 위해 정부는 추모의 사이렌을 울리고

교회는 기도회를 열고 정치인들이 모이고

길거리에 분향소가 서고 국화꽃이 바쳐지고

제국의 대통령은 숭고한 생명과 자유를 외치며 전쟁을 선포하고

우방들이 참전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더욱 나를 고발합니다.  죄인이라 고발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불러

맨하탄과 걸프만을 피로 가득 넘치게 하리니,

"그때에 모든 맏아들이 흘린 피가 파라오의 땅을 적시리라."

이제 그것을 내가 모른다 하면

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카인도 지으시고 아벨도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형제입니다.

이스라엘도 만드시고 팔레스타인도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형제입니다.

펜타곤 장교도 낳으시고 텔레반 병사도 낳으셨습니다. 그들은 형제입니다.    

흑인도 낳으시고 백인도 낳으셨습니다. 그들은 형제입니다.

백두산도 만드시고 한라산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아버지의 형제들입니다.

 

아, 저기 폭격기 지나간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길다란 구름 사이로 사막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곁에 아직 주검도 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도 보입니다.

그들은 막 내린 공연장의 분장실에 앉아

서로의 피를 닦아주며 웃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는 곳에서는

고통도 눈물도 원한도, 그리고 죽음의 공포도 없는

오직 화친과 공평. 공존과 상생이 있을 뿐.

 

오, 크신 분이여

모든 것을 멈추게 하소서.

사람은 모두 형제이며 함께 살도록 만드셨음을 관철하소서.

인샬라, 옴마니 반메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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