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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삶(법정스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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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영 [yoinyung] 쪽지 캡슐

2002-09-12 ㅣ No.1797

 

 

 

** 가난한 삶 **

 

신앙생활은 끝없는 복습이다.

신앙생활에는 예습이 없다.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다.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종교적인 체험이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나고,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인가?

참고 견디어 나가는 세상이란 뜻이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되면 삶의 묘미는 사라진다.

 

’보왕삼매론’은 말하고 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이다.

몸이 건강했을 때 생각해보지 못했든 일들을

병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내가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는 얼마나 충만하게 살아왔는가?

스스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옛날, 농사를 지으며 흙을 딛고 살든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흙의 교훈을 몸소 익힐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며

여러 가지 편리한 시설 속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력은 자꾸 떨어진다.

그것은 흙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대지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허약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하지 않는가,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가 바로 그 뜻이다.

우리가 이 고해의 세상,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드라도

밝을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삶의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치게 된다.

잘난 체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되고

마음이 사치해진다.

그래서 보왕삼매론은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을 삶의 과정으로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서는 안되고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올 때에

남이 넘겨다 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고 했다.

장애가 없는 건 어디에도 없다.

한평생 세상을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이 있다.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는가,

그러므로 인생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러한 경주이다.

해탈이란 무엇인가?

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으로나 밖으로나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것을 해탈이라 부른다.

그러니 장애라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그 발판이다.

그와 같은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 없다.

 

또 성인은 말씀하기를

작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고 하셨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데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모두가 입만 열면 경제 타령만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그런 일에만 치우쳐있다.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가 큰그릇을 만들어 놓지 않고,

욕심껏 담기만 하려고 한 결과이다.

이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증거이다.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에 이익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소욕지족],

적은 것으로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넉넉해진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다.

각자 그 꽃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이 말했듯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 없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어내는

그와 같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바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바란다.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세계,

참고 견딜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막다른 길이라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전 생애의 과정에서 볼 때

그것은 마땅히 통과해야 할 하나의 관문이다.

한 생애를 두고 그런 관문이 한 두 개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고비가 있다.

그와 같은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정신적인 연륜이 쌓여간다.

육체적인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운 관문을 거칠 때마다

정신적인 나이가 쌓여 가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눈이 열린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진다.

 

눈앞 일만 가지고 너무 이해관계를 따져서는 안 된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큰데 있지 않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조그만데 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자작나무의 잎에도 행복은 깃들어 있고,

벼랑 위에 피어있는 한 무더기의 진달래 꽃 속을 통해서도

하루에 일용할 정신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 행복의 씨앗이 깃들어있다.

빈 마음으로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로써 만족해야지,

둘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된다. 그건 허욕이다.

그러니 하나로써 만족할 수 있어야한다.

행복은 그 하나 속에 있다.

둘을 얻게되면 행복이 희석되어서

그 하나마저도 마침내 잃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다 언제 잘 살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런 어려운 시대에는 작고 적은 것으로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악 중에서도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은 없고,

재앙 중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으며,

허물 중에서도 욕망을 다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죄악이라는 게 무엇인가?

분수에 지나친 욕망인 그 탐욕에서 온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탐욕이 생사윤회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탐욕은 자기 분수 밖의 욕심이다.

노자는 뒤이어서 말한다.

따라서 넉넉할 줄 알면 항상 풍족하다.

결국은 만족하면서 살라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함께 일뿐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그것을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좋은 일만 있다면 사람이 오만해 진다.

어려울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라.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서 기쁨을 느껴라.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 보라.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이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이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라는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사해이고 현실이다.

우리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 켜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 존재이다.

 

따라서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교훈이 있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수천, 수만 송이의 꽃이 잇따라 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한 집안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자식 한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평온하면 메아리가 되어 모든 식구가 다 평온해진다.

그러나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 보라,

그 마음은 그대로 아버지한테 전달되고

또 자식들에게도 옮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 가지에 이상이 생기면

나무 전체에 이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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