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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II_부록10] 교회는 비유들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교리 교육 1991.09.18. 869_KH_JPII [하늘나라_요한바오로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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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09.18. [117.17.151.*]

2009-11-23 ㅣ No.879

 
 
 
+ 찬미 예수
 
아래의 번역문은 1992년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초판 발행이 있기 직전에 주신, 
"하느님의 나라", "하늘 나라", 그리고 "가톨릭 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일반 알현 교리 교육 강론 말씀입니다.
 
이 글은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늘 나라"가 사실은 "가톨릭 교회"라고 가르쳐 왔고 또 지금도 가르치고 있음을 국내의 가톨릭 교우님들께서 분명하게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을 드리고자 마련한 번역문들 중의 하나이오니, 지상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여정에 있어 핵심인 이 중요한 신앙적 진실을 여태 모르고 계셨던 교우님들께서는,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라도, 아래의 글을 차분히 차근 차근 잘 읽어 보실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면 생각보다도 많은 가톨릭 교우님들이 강생하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에 대한 교도권의 전통적 해석에 대하여 모르고 계시는 듯하여, 개인적으로 상당히 우울합니다.
 
"하늘 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와 "천당(heaven, 하늘)"의 차이점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재림의 날까지의 "가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하늘 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임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우리말로 번역된 자료들이 별로 없는 듯 하며, 심지어 굿뉴스 제공 가톨릭 대사전 및 용어 사전에도 잘못 언급하고 있기에, 누구나 손쉽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드리고자, 매우 고통스럽지만 부득불, 우선적으로, 이 가르침을 주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강론말씀들 몇 개를, 향후 약 한 달 동안, 시리즈의 형식으로 우리말로 번역하여 올려드릴 계획입니다.
 
다음의 번역문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두 번째 강론 말씀입니다.
 
주변의 분들에게 이 중요한 신앙적 진실/사실을 많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올려드리는 글들을 읽어 보라고 권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의 주소들을 클릭하시면 그동안 이 하늘 나라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제가 올려드린, 그리고 앞으로 제가 올려드릴, 글들을 손쉽게 읽으실 수 있겠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ingdom_of_heaven.htm <----- 필독 권고 

[주: 하늘 나라에 관한 졸글들의 전체 모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John_Paul_II4Kingdom_of_heaven.htm <----- 필독 권고  

[주: 하늘 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일반 알현 강론 말씀 모음]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question_and_answer <----- 클릭한 후에 살펴보십시오

[주:(저의 졸글들을 모아두는,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인터넷 주소]

 

 

제가 올려드리는 글들을 읽어 보라고 권고하실 때에, 위의 주소들을 함께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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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urch Is Revealed in Parables
General Audience, September 18, 1991
 
출처: The Church Is Revealed in Parables (클릭하십시오)
(1991년 9월 18일 General Audience)
 
 
교회는 비유들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일반 알현, 1991년 9월 18일
요한 바오로 2세
 
 
The Gospel texts document Jesus' teaching about the kingdom of God in relation to the Church. They also document how the apostles preached this teaching and how it was understood and believed in the early Church. The mystery of the Church as the kingdom of God is revealed in these texts. Vatican II says: "The mystery of the holy Church is manifest in its very foundation. The Lord Jesus set it on its course by preaching the Good News, that is,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In the word, in the works, and in the presence of Christ, this kingdom was clearly open to the view of men" (LG 5). In addition to everything we said in this regard during the preceding catecheses, today we will reflect further on the teaching that Jesus gave about the kingdom of God in his parables, especially in those which are especially concerned about explaining its significance and essential value.
 
복음서 본문들은 교회에 대한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증거를 제공합니다(document).  이 본문들은 또한 어떻게 사도들이 이 가르침을 설교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기 교회 안에서 이해되었으며 그리고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로서의 교회의 신비는 이들 본문들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룩한 교회의 신비는 바로 그 기초에 있어 역력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복음(Good News)을, 즉(that is)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교하심으로써 그 과정 중에 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위업(the works)들 안에서, 그리고 현존 안에서, 이 나라는 사람들의 시야에 분명하게 개방되어(open to) 있었습니다.”(LG 5). 이전의 교리 교육들 내내 이에 관하여 우리가 말하였던 모든 것에 더하여, 오늘 우리는 당신의 비유들 안에서, 특별히 이 나라의 중요성과 핵심 가치를 설명하는 데에 특별히 관련된 비유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주셨던 가르침에 대하여 더 묵상할 것입니다.
 
번역자 주: LG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인 ‘인류의 빛(Lumen Gentium)’을 말합니다.
 
Jesus said: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likened to a king who gave a wedding feast for his son" (Mt 22:2).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presents the kingdom of God as a royal--and therefore sovereign--undertaking by God himself. It also includes the theme of love, and precisely of spousal love: the son for whom the father is preparing the wedding feast is the bridegroom. The circumstances indicate his presence and allow us to understand who he is. This will appear clearly in other New Testament texts which identify the Church as the bride (cf. Jn 3:29; Rev 21:9; 2 Cor 11:2; Eph 5:23-27, 29).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복음서 22,2). 혼인 잔치에 대한 이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 당신 자신에 의한 왕다운 - 그러므로 최상의 - 인수(undertaking)로 나타냅니다. 이 비유는 또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그리고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그를 위하여 성부께서 혼인 잔치를 준비 중인 그 아들이, 바로 신랑입니다. 상황들은 당신의 현존을 암시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신부로서 식별하는 신약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요한 복음서 3,29; 요한 묵시록 21,9; 2코린토 11,2; 에페소 5,23-27.29).
 
In this parable instead, there is a clear indication of who the bridegroom is. It is Christ, who establishes the Father's new covenant with humanity. This is a covenant of love, and the kingdom of God itself appears as a communion (community of love), which the Son establishes through the Father's will. The feast is the expression of this communion. In the context of the economy of salvation described by the Gospel, it is not difficult to see in this wedding feast a reference to the Eucharist: the sacrament of the new and eternal covenant, the sacrament of the marriage of Christ and humanity in the Church.
 
그 대신에 이 비유 안에는, 이 신랑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암시가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성부의 새 계약을 인류와 체결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계약은 사랑의 계약이며, 그리고 하느님 나라 그 자체가 하나 됨(친교, 통공, communion)[사랑의 공동체(community of love)]으로 나타나는데, 이 하나 됨을 성자께서는 성부의 의지를 통하여 설정하십니다. 이 잔치는 이 하나 됨의 표현입니다. 복음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는 구원 경륜(the economy of salvation)이라는 문맥 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성사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인류와의 혼인 성사인, 성찬례에 대한 암시를 이 혼인 잔치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Although the Church is not mentioned as the bride in this parable, other elements in the context recall what the Gospel tells us about the Church as the kingdom of God. Thus, the divine invitation is universal: "The king said to his servants, 'Invite to the feast whomever you find'" (Mt 22:9). Among those invited to the Son's wedding feast some of those who were chosen first are missing. Those were to have been guests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the old covenant. They refused to go to the feast of the new covenant, giving various excuses. Then Jesus had the king, the master of the house, say: "Many are invited, but few are chosen" (Mt 22:14). Many others are invited in their place and they fill the banquet hall. This detail makes us think of another parable of warning which Jesus taught: "I say to you, many will come from east and west, and will recline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at the banque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the children of the kingdom will be drive out into the outer darkness" (Mt 8:11-12). Here one clearly sees how the invitation becomes universal. God intends to make a new covenant in his Son not only with the Chosen People, but with all humanity as well.
 
비록 이 비유에서 교회가 신부로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 문맥에 있어 다른 요소들은 복음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로서의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바를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초대는 다음과 같이 보편적입니다: “임금은 자신의 종들에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라고 자신의 종들에게 말하였다”(마태오 복음서 22,9).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자들 중에서 첫째로 뽑힌 자들 중의 어떤 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전통에 따라 손님들이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 계약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집의 주인인 이 임금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오 복음서 22,14). 많은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로 초대를 받으며 그리고 이들이 연회장을 채웁니다. 이 상세한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던, 또 하나의 경고의 비유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8,11-12). 여기서 우리는 이 초대가 어떻게 보편적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선택된 백성뿐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인류와도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새 계약을 맺으려고 하십니다(int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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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위의 우리말 번역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8,12에서, 'the children of the kingdom'에 해당하는 표현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로 번역한 것이 번역 오류라는 엮은이의 지적은 여기에 있으니 클릭하여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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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xt part of the parable indicates that definitive participation in the wedding feast is tied to certain essential conditions. Entering the Church is not enough to guarantee eternal salvation: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Mt 22:12), the king asks one of the guests. At this point the parable seems to pass from the people of Israel's historical refusal of their election to the personal conduct of anyone who is invited and to the judgment which will be made in his regard. The parable does not give a precise meaning to this "garment." But it can be said that the explanation is found in all of Christ's teaching. Especially in the Sermon on the Mount, the Gospel speaks of the commandment of love which is the principle of divine life and perfection, modeled on the Father: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Mt 5:48). It is a matter of that new commandment which, as Jesus taught, consists in this: "As I have loved you, so you also should love one another" (Jn 13:34). Therefore, it seems possible to conclude that the wedding garment, as a condition for participating in the feast, is precisely this love.
 
이 비유의 다음 부분은 이 혼인 잔치에 최종적 참석이 어떤 핵심 조건들에 묶여져 있음을 암시합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오 복음서 22,12) 라고 임금은 손님들 중의 한 명에게 묻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 비유는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거절로부터 초대받은 자 누구든지의 개인적 처신으로 그리고 이 초대받은 자와 관련하여 내려질 심판으로 이동합니다. 이 비유는 이 ‘예복’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모두에 있어 발견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산상설교에서, 복음은 사랑이라는 계명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계명은, 다음과 같은 성부의 말씀에 의거하여 설계된, 거룩한 삶(divien life)과 완미(完美, perfection)의 원리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서 5,48).(*)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듯이, 다음의 말씀에 있는 바로 이 새 계명에 대한 일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서 13,34). 그러므로 이 혼인 예복은, 이 잔치에 참가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정확하게 이 사랑을 말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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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완전한" 으로 차용(借用) 번역된 표현은, 대신에, "완미한(perfect)" 로 차용(借用)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즉, "완전(完全)한(complete)" 과 완미(完美)한(perfect, 완전하고 결함이 없는)"의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번역자 주: 여기서 "혼인 예복"이 나타낸다는 사랑은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 즉, 애덕(charity, caritas, 아가페)를 말하며,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님이 제시한 바로 이 동일한 결론을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8주일 복음 말씀인] 마태오 복음서 22,1-14에 대한 해설에서 나바르 성경 주석서는, 정확한 출처의 제시와 함께, 또한 언급하고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ot_2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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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fact is confirmed by another great parable which concerns the final judgment and so has an eschatological character. Only those who practice the commandment of love through the spiritual and corporal works of mercy toward their neighbor can take part in the feast of the kingdom of God: "Come, you who are blessed by my Father. Inherit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Mt 25:34).
 
이 사실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이기에 따라서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위대한 비유에 의하여 확인이 됩니다. 자신들의 이웃을 향한 자비에 기인하는 영적 및 신체적 일들을 통하여 사랑이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자들만이 하느님 나라라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오 복음서 25,34).
 
Another parable helps us understand that it is never too late to enter the Church. God's invitation can be addressed to a person even at the last moment of life. This is the well-known parable of the workers in the vineyard: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landowner who went out at dawn to hire laborers for his vineyard" (Mt 20:1). He later went out several times at different hours of the day, until the last hour. Each of them was given a salary in which, beyond the limit of what was owed in strict justice, the landowner wished to show all his generous love.
 
또 하나의 비유는 교회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너무 늦은 것이 아님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심지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있는 개인에게도 향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포도밭에서의 일꾼들에 대한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오 복음서 20,1). 그는 나중에, 마지막 시간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다른 시간들에 있어 여러 번 나갔습니다. 일꾼들 각자는 품삯이 주어졌는데, 이 품삯에 있어, 엄정한 공평성(strict justice)에 따라 요구되었던 바의 범위를 넘어, 포도밭 주인은 자신의 관대한 사랑을 모두에게 보이는 것을 원하였습니다.
 
In this regard, the moving episode comes to mind which was recounted by the evangelist Luke about the "good thief" who was crucified next to Jesus on Golgotha. The invitation was given to him as an act of mercy by God, as the thief said, almost breathing his last: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He heard from the mouth of the Redeemer and bridegroom, who had been condemned to death on a cross: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Lk 23:42-43).
 
이와 관련하여, 복음사가 루카에 의하여 기록된,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곁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선한 도둑’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 초대는, 이 도둑이, 자신의 최후의 숨을 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에, 하느님에 의한 자비의 행위로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는, 십자가 위에서의 사형을 선고받았던, 구세주(Redeemer)이시며 신랑이신 분의 입으로부터 다음을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서 23,42-43).
 
Let us cite another one of Jesus' parables: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treasure buried in a field, which a person finds and hides again, and out of joy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Mt 13:44). Analogously, there is the merchant in search of fine pearls: "When he finds a pearl of great price, he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it" (Mt 13:45). This parable instills a great truth in those who are invited: to be worthy of the invitation to the bridegroom's royal feast it is necessary to show that one understands the supreme value of what is being offered. Hence, there must be a willingness to sacrifice everything for the kingdom of heaven, which is worth more than everything. No earthly good is comparable to it in value. One can abandon everything, without loss, in order to take part in the feast of Christ the bridegroom.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서 한 개 더 인용하고자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서 13,44). 비슷하게,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 있습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오 복음서 13,46).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초대를 받은 자들에 대한 커다란 진리를 서서히 가르쳐 줍니다: 이 신랑의 성대한 잔치(royal feast)에 초대 받을만하기 위하여서는 제시되고 있는 바의 지고한 가치(the supreme value)를 우리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하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가치에 있어 어떠한 세속적인 좋은 것(the earthly good)도 이것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무런 손실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Jesus indicated the essential condition of detachment and poverty, with all the other conditions, when he called blessed "the poor in spirit," "the meek,"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cf. Mt 5:3, 10). He also indicated this when he presented a child a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He said: "Unless you turn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Whoever humbles himself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Mt 18:2-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들’을,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행복하다고 부르셨을 때에(마태오 복음서 5,3.10), 모든 다른 조건들과 함께, 초연함(detachment)과 청빈(poverty)의 핵심 조건에 대하여 은연 중 나타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께서 어린이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세우셨을 때에, 이것을 또한 은연중 나타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오 복음서 18,2-4).
 
Along with Vatican II, we can conclude that in the words and actions of Christ, especially in his teaching through parables, the "kingdom was clearly open to the view of men" (LG 5). In preaching the coming of that kingdom, Christ founded his Church and showed her inner, divine mystery (cf. LG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행위들 안에서, 특별히 비유들을 통한 당신의 가르침 안에서, “이 나라가 사람들의 시야에 분명하게 개방되어 있었음”(LG 5)을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오심에 대하여 설교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창립하셨으며 그리고 이 교회의 내면적, 거룩한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LG 5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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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번역: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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