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아버지와 미루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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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여유가 생겨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집에 내려갔습니다. 12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사남매를 다 도시로 떠나보내고 어머니는 홀로 고향에 남아 땅을 일구며 살고 계셨습니다. "아이고, 이 먼 데를 왔나... 자, 자 이거 묵자." 고단한 들일에 한 치, 외로움에 한 치, 이마의 주름이 더 깊어진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서울 가서 함께 사시면 좋을 텐네.... 하지만 어머니는 백 번을 고쳐 물어도 아버지가 묻혀 계신 이 땅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온 가족이 부산한 준비를 마치고 차에 타려는데 10리 길이나 걸어가야 하는 곳을 어머니가 굳이 걸어가자시는 것이었습니다. "야들아, 날도 좋은데 그냥 걸어가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훠이훠이 사립문을 나섰고 우린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처음에는 신나하던 아이들이 먼저 지쳤고 아내도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휴,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응?... 휴." 그 말을 들었는제 앞서가시던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어머니! 여기서 잠깐 쉬어가죠."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우린 길가 미루나무 그늘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느이 아부지 살아계실 땐 이 근동이 다 우리 땅이었는디... 니들 가르치느라고 야금야금 떼 팔았지.... 이 나무들도 다 아부지가 심으신거여."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언제나 나무를 심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진 왜 하필 열매도 안 열리는 미루나무를 심으셨지?" "꼭 열매를 맺어야 나무는 아닌겨...." 어머니는 미루나무를 만지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느이 아부지가 이 나무를 심으면서 뭐랬는지 알어?" ’나무들아, 어서어서 자라서 우리 애들이 이 길을 걸을 때,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거라.’ 아무 대꾸도 못한 채, 애꿎은 나무 허리만 쓰다듬는 내 손을 어머니가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느이들이랑 이 미루나무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나무가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팔 벌리고 서 계신 길. 길은 더 이상 멀지도 힘겹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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