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곰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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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9-26 ㅣ No.5369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났습니다.

해마다 기일이면 나는 제상에 우툴두툴 제멋대로 생겨먹은 곰보빵을 올립니다.

조선 천지에 그런 법은 없다고 말리던 아내도,

제상에 웬 빵이냐고 경악을 금치 못하던 사촌들도,

곰보빵의 사연을 알고 난 뒤론 아예 제상 한가운데 곰보빵을 진설할 정돕니다.

너나없이 배곯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가난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공사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나는 동구 밖을 서성이며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멀리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얼마나 반갑던지.

"아버지!"

"오냐, 우리 아들 오늘도 아부지 마중 왔네."

철부지 아들이 진짜로 기다렸던 것은 아버지가 남루한 작업복 앞주머니에서 꺼내주는 곰보빵 하나였습니다.

"아하! 이거...? 옛다! 먹어라."

"와, 곰보빵이다!"

빵은 늘 찌그러진 모양이었지만 맛은 우리 집의 만년 간식인 감자나 고구마보다 열 배 백 배 좋았습니다.

"원 녀석... 체할라, 천천히 먹어."

그러던 어느 날 하교 길이었습니다.

공사장 앞을 지나다가 무거운 질통을 지고 벽돌을 나르는 아버지를 보게 됐습니다.

짐이 무거운지 아버지는 가쁜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 간식으로 나온 곰보빵 한 봉지.

아버지는 빵봉지를 손에 든 채 마른침만 꿀꺽 삼키다가 작업복 주머니에 넣곤 근처 수돗가로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셨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동구 밖까지 아버지를 마중 나갔지만 아버지가 작업복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찌그러진 곰보빵을 차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곰보빵은 질렸어요. 이제 아버지 드세요."

"응?"

그때 그 가슴 시린 기억이 지워지질 않아 철이 든 뒤부턴 생신 때에도, 어버이날에도 꼭 사 드리던 곰보빵.

더 이상 곰보빵을 드실 수 없게 된 지금, 나는 아버지의 제상에 곰보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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