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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성모 마리아 - 산고 (産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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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홍 [clemenskim] 쪽지 캡슐

2012-09-15 ㅣ No.760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 산고 (産苦)
    글 : 전삼용 요셉 신부님 ㅣ 수원교구
    
    일제 강점기 때 여학교를 다니며 일본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라 하시며 한 할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성주가 성을 짓고 싶어 했는데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던 것입니다.
    
    이에 평민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모진 고통을 참아 낸 것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게 힘을 준 것은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옆에 자신을 위해 희생해주고 고통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진정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저도 대학 시험 볼 때 교문을 붙잡고 기도를 드리시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수학 시험을 망쳤어도 나머지 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대학에 한 번에 붙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사실 
    제가 떨어지라고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축구나 야구도 홈경기가 유리한 것은 응원해 주는 편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성적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분만하는데 남편도 따라 들어가게 한다고 합니다. 
    아내만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자식을 낳으면 되지만 
    남편도 그 고통에 동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아내의 고통이 물리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남편이 옆에 있음으로 인해 어차피 받아내야 할 
    고통을 더 힘내서 참아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는 것은 어머니이지만, 
    사실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함께 낳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낳는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실 때 이미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당해야 할 고통을 함께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 발타살이라는 신학자이자 추기경님은
     “골고타 언덕에서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했는데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이 정말 신비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뜨겁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공동 구속자로 보는 견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딸로서, 
    신부로서, 또 어머니로서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일한 구원자는 그리스도라는 명제에 어긋나기 때문에 
    또 여러 신학자는 이런 견해를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의 고통은 구원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남편이 산고를 겪는 아내 옆에 있다고 해서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없는 것처럼 성모님의 수난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단 일점일획도 더하지 못했습니다. 
    성모님이 당신 희생의 공로를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조금이라도 더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충하는 
    무엇으로 보기 보다는 마치 옆에 선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힘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에 힘을 주는 동반자의 역할로써 보아야합니다. 
    
    그렇더라도 ‘공동 구속자’란 말이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공동’이라 함은 
    무엇을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만 라틴어 어원으로는
     ‘공동(co-)’이란 뜻은 영어로 with, 즉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집전할 때 공동 집전자가 성체를 축성하는 것이 
    집전 사제가 축성하는 것에 단 일점일획도 더해지지 못하지만 
    그 사제들을 ‘공동 집전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공로가 인류 구원을 위해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지만, 
    성모님은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두 분은 골고타에서 산고의 고통을 겪으시고 
    한 분은 그 고통으로 죽으시고 한 분은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으로 우리가 탄생하였으니, 
    마치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사무라이가 된 사람처럼 
    우리도 그분들의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분들이 원하는 참다운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새로 태어난 교회의 상징인 요한에게 
    ‘어머니’로 내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의 어머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만이 아니라 
    성모님의 산고의 고통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들임을 잊지 말고 
    그 분들의 희생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산고 (産苦) 2
    
    순교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들이 최양업 신부님입니다. 
    수리치골 산속에 숨어살다 발각된 프란치스코는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와 함께 심한 고문과 회유를 동시에 받습니다. 
    특히 이성례 마리아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투옥되어 
    더욱 고통이 컸습니다. 어린 젖먹이 스테파노는 
    고문으로 인하여 고름이 나오는 젖을 빨다가 아사하고 맙니다.
    
    아기가 죽자 이성례 마리아는 신앙보다 남은 네 명의 아이들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성례 마리아가 최양업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알려져 
    다시 투옥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제 발로 하느님과 남편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되돌아가려는 생각 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성모님과 천주님을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떨어지지 말고 맏형이 올 때까지 
    용인 큰아버지에게 가서 살아라.”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노끈으로 서로 칭칭 동여매고 
    구걸을 하며 어머니 옥 수발을 듭니다. 그들은 구걸한 
    음식들을 형리들에게 주어 어머니께 전달해달라고 합니다. 
    한 번은 시커멓게 된 잔치 떡 하나가 옥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서로 먹고 싶어 주물럭거리다가 결국 어머니께 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둘째 아들 야고보를 부릅니다. 
    
    “이제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절대로 
    어미의 죽는 모습을 보지 말고 용인으로 가라.”
    
    당시 목을 칠 때에도 뭉툭한 칼로 다섯 번 이상 쳐서 
    목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단칼에 죽는 것도 큰 행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알고 있기에 휘광이를 찾아가 동냥으로 모았던 
    돈과 쌀을 주며 죽을 때 아프지 않도록 어머니의 목을 
    한 칼에 잘라달라고 청합니다. 휘광이도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갑니다. 
    
    다음 날 네 자식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용산의 당고개 형장에 몰래 숨어들어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단 칼에 목이 잘리는 것을 보고는 아이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옷을 하늘로 집어던지고 손뼉을 치며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엄마 목이 단칼에 떨어졌다! 이제 우리 엄마는 천당에 가셨다!” 
    
    만약 이성례 마리아가 끝까지 배교를 했다면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았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순교를 했기에 아이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죽음 없이는 새로운 어떤 생명도 탄생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탄생할 때도 항상 순교자들의 피를 필요로 했습니다. 
    피 흘림 없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라 칭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를 나으셨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성모님은 골고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고의 고통을 겪습니다. 
    어머니가 그 고통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먼저 성자의 고통이 없었다면 성모님도 존재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에는 
    이 두 분의 순교의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구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피를 흘려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열 두 사도 또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순교를 하였습니다. 
    (요한도 뜨거운 기름에 들어갔다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누구나 교회가 탄생하는 산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사탄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순교하는 것을 
    우리는 ‘선교’라 부릅니다. 말로 생명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희생하여 새로운 생명을 전해주는 것이어야 선교입니다. 
    마리아의 고통, 이는 생명을 주는 희생이고 우리도 이웃을 위해 
    그렇게 희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출처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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