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11월의 바람은 청아하다

인쇄

김정이 [pear] 쪽지 캡슐

2001-11-08 ㅣ No.5089

11월의 바람은 청아하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가을을 좋아했었다.

 

사람의 일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찌는 듯한 여름을 마감하며 선선한 바람에 자신의 열매를 성숙시키는나무들처럼,

 

우리네 한 생도 이즈음 가을 문턱의 언저리 어디엔가 닿아있는 것은 아닐지......

 

 

 

봄과 여름을 지나온 나무가 태양이 전해준 뜨거운 열기와 찬란한 빛을 기억한 채,

 

날이 갈수록 서늘해지기만 하는 가을 바람 속에서 자신의 잎사귀를 불태워 가듯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에 서있는 중년의 흔들림들이

 

그저 가을 바람에 자기 몸을 내 맡긴 나무처럼 평화롭기를 기도해본다.

 

 

 

 

11월의 강가에 나서면 떨어지는 기온만큼 짙어 가는 물빛하며,

 

그 만큼 높아가는 파아란 하늘하며,

 

그 하늘과 강물 사이를 이어주는 바람이 모두 하도 맑고 청아해서 바라보고 있는 눈꼬리가 시려온다.

 

 

 

짙푸른 녹음에 무성하던 나뭇잎을 하나 둘 떨구어 내는 비움의 나무로부터 내 인생의 자세를 되짚어 본다.

 

젊었던 날, 내 몸뚱아리 하나에 온전히 싣고 왔던 열정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순된 질서에 치여서 어쩌면 그 짙푸름을 잃어버린 회색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랬을지언정 그 날들의 기억 속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작고 소중한 빛을 나는 간직하고 있다.

 

 

 

현대의 회색빛 도시에 서서 가을을 익혀가는 나무들처럼

 

첫눈이 오기 전에 낙엽을 떨구어내는 새로운 생명을 예견하는 비움의 자연을 배우고 싶다.

 

어쩌면 삭막하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는 늦가을의 풍경은

 

내 40년동안 지녀온 온갖 편견과 교만의 아집을 비워내는 일이

 

쓸쓸한 그림자 하나를 만들어 내는 일처럼 허허로운 감상을 가져다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새삼스럽게 낙엽을 떨구어 내는 나무가 안쓰러워 보이는 까닭은 이제는 다가올 내리막 길에 대한 삶의 막연한 두려움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밤중에 내리시는 하얀 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귀와

 

그 배경뒤로 간헐하게 울려주는 세상의 작은 소리들을 볼 수 있는 청한 눈은,

 

아마도 인생의 사계중에 혹독한 겨울 바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지....

 

쌩한 겨울바람속의 푸근한 햇살을 드리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해선

 

결실과 비움의 혼돈을 잘 견디어 내어야 하겠지...............

 

 

비움과 나눔의 배려에 충실한 사소하지만 위대한 자연의 여유로운 청아함을 배우고 싶다.

 



3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