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라이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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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21 ㅣ No.943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철민이는 가지 않으려는 동엽을 애써 데리고 지윤이네로 갔다. 지윤이의 생일날

이었다. 철민이가 지윤의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저물지 않은 저녁이었

다. 지윤이는 철민이가 엊그제 사준 옷을 입고 있었다. 지윤이는 철민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라 동엽이를 반갑게 맞이 해 주었다. 지윤이의 생일에 초대 된 사

람은 철민이와 동엽이 둘 뿐이었다. 지윤은 현주도 초대할 생각이었으나 철민이

가 그러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현주가 오면 자기가 오지 않겠다는 협박성이었

다. 철민은 어색해지는 것이 싫었다. 철민은 가급적이면 현주와 지윤을 따로 생

각하고 싶었다.

"이거 철민이가 사 준 옷이다."

지윤은 동엽에게 입고 있는 옷 자랑을 했다.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예뻤다. 동엽

은 소리없는 웃음을 지어 줄 뿐 아무말 없었다.

 

지윤이가 지어 준 저녁을 먹고 셋이는 한 동안 어린 아이처럼 놀았다. 대학 들

어 와 따라 다녀 본 엠티에서 배운 유아적인 놀이들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

은 흘러갔다. 동엽이는 시간이 늦어지자 집에 갈 눈치를 보였으나 철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윤이도 집에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철민은 오히려

"야, 이제 우리 거국적으로 술이란 것을 마셔 보는 것이 어떻냐?"

라고 말했다.

"그래, 내가 수퍼에 가서 사올게."

지윤이도 그에 응했다. 철민은 꼭 자기가 주인인양 거실에 앉아 말했다.

"시간이 늦었다. 동엽이 니가 지윤이랑 같이 갔다 와라."

"내가? 니가 가지 않고?"

"그래 동엽아. 쟤는 놔두고 우리끼리 갔다 오자."

 

철민을 두고 동엽이와 지윤이가 밖으로 나갔다. 동엽인 지윤이와 단 둘이 있게

되자 어색했다. 수퍼에 도착할 때까지 동엽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수퍼에서 지

윤은 예전의 일을 기억이나 하는 것처럼 다른 맥주들을 제쳐 두고 700미리 병 맥

주를 샀다. 그리고 소주도 두병을 샀다.

"이거 다 마실려고?"

"넌 술 잘 못먹니?"

"아니, 그건 아니지만 시간도 늦었는데..."

"너네들 우리집에서 자고도 갔잖아. 오늘도 자고 가."

"흠, 넌 철민이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나 보다."

"부담? 부담이 왜 되는데?"

"아니다."

"뭐가?"

"부담이 전혀 없는 상대는 매력이 없는 것이라 하던데..."

"그런가? 그 얘기를 왜 하는데?"

"그냥."

"싱겁다 너."

"철민이에게 잘해 줘라."

"응?"

"걔가 아마 큰일을 저지른 거 같다. 자신은 아직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나중엔 힘들어 할거야."

"엉? 철민이가 무슨 큰일을 저질렀는데?"

"나중에 알게 되겠지."

동엽은 집안 문제로 상당히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자기 혼자 남몰래 생각 했던

것이 많았나 보다. 자신의 생활의 변화에 대해 어려웠던 것처럼 분명 철민이도

자신의 변화 된 생활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뭔데에?"

"흠."

동엽은 의미있는 미소만 지어 주었을 뿐 철민과의 비밀을 지켰다. 지윤은 입을

내밀어 답을 해 주지 않는 동엽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너 왜그래. 애매모호한 말들만 하고."

"생일 축하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도 생일 선물을 하마."

철민이는 동엽에게 지윤이의 생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냥 놀러

가자면서 데리고 간 것이었다. 그걸 지윤이는 알지 못했다.

"그래 다음에 꼭 사줘."

 

동엽과 지윤이가 아파트로 들어왔을 때 철민은 거실에서 졸고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들었지만 눈꺼풀은 겹쳐 있었다.

"그새 졸았니?"

지윤이가 다소 한심스런 표정을 지어 주었다. 지윤이는 아까 동엽이가 한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나 보다. 술을 마시면서 철민에게 큰일에 대해서 한 번도 말

하지 않았다. 지윤이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자기 집이어

서 그랬는지, 철민이가 계속 권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철민에게는 못 미쳤으나

동엽에게는 뒤지지 않을 만큼의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새벽 한시를 넘겼는데

도 계속 되었다. 그러다 지윤이가 그냥 거실에서 쓰러졌다. 철민이가 사준 옷을

그대로 입고 거실에 몸을 뉘인 채 그냥 잠이 들어 버렸다.

"야! 박지윤 자냐? 자는 모습 약한 모습."

지윤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게 내 버려 둬라. 우리도 이제 치우고 자자."

"그래야 되냐? 더 마시면 안돼냐?"

"술이 아마 없을거다."

"그렇냐? 너 계속 학교 다닐거지?"

"너 진짜 야구부에 가입한거냐?"

"그렇다."

"집에는 진짜 말하지 않을거냐?"

"그렇다."

"내가 대신 말해 줄까?"

"이 새끼가... 말하면 나 집에서 맞아 죽을 걸. 이왕 죽는거 너도 데리고 간다."

"그래도 그런 큰 일을 너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 맘에 걸린다."

"잘하면 돼. 하여간 등록금 빌려 줄테니까 일학년은 꼭 마치고 군대 가라."

"알았어. 고맙다."

 

철민과 동엽은 남은 정신으로 거실의 술병과 음식들을 치웠다.

"잘도 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구만."

"널 많이 믿나 봐."

"그게 무슨 말이냐? 얘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철민과 동엽은 일단 지윤을 거실에 홀로 둔채 전에 자기들이 잤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폈다. 더운 여름날이라 덮는 것이 필요 없었다. 술에 대해서

는 철민이가 가장 쌨나 보다. 동엽은 이부자리를 펴자 마자 몸을 뉘이더니 스르

르 눈이 감겼다. 철민이도 그 옆에 누웠다.

"동엽아 자냐?"

"응."

"진짜?"

동엽이는 잠이 들었다. 철민이도 잠이 살핏 들었으나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

지 벌떡 일어 났다.

거실에 나가 보았다. 거실의 맨 바닥에 지윤이가 아무런 잠자리 도구 없이 입은

옷 그대로 누운 채 잠이 들어 쿨럭 거리고 있었다.

"야, 박 지윤."

"응?"

철민이가 지윤이를 흔들어 깨웠다. 깨우는 데 제법 힘이 들었다.

"니 방 들어가서 자."

"응."

지윤은 대답은 했으나 그 자리에 다시 누워 버린다. 철민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야, 니 방 들어가서 자라니까."

철민은 다시 지윤을 흔들어 깨웠다. 지윤이가 일어 나더니 헛기침을 한 번 쿨럭

거렸다. 그리고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윤이의 속이 많이 안 좋았나 보다. 지윤은 화장실 변기 뚜겅을 열더니 바로

지금까지 먹었던 술이랑 음식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철민이는 지윤이가 토하

기 위해 화장실로 간 줄 몰랐다. 그래서 따라 가지 않았다. 그러다 토하는 소리

를 들었다. 철민은 그제서야 화장실로 가 지윤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둘 다 몰

랐을 테지. 술을 먹고 차운데서 잠이 들어 잠이 든채로 토하다 숨을 거두는 사람

들이 생각 보다 많다는 사실을... 철민은 어찌 보면 지윤이의 생명을 구해 준 셈

이다. 갔다 붙이면 어디든 못 갔다 붙이겠냐.

"많이 먹을 때 알아 봤다."

"니가 먹으라 권했잖아."

"권한다고 덥썩 받아 먹냐?"

"너 나뻐 씨."

지윤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술을 먹은 탓도 있겠지만 변기 앞에서

철민에게 추한 모습 보인 것 때문에 지윤이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이제 좀 괜찮냐?"

"응."

"그럼 나가자."

 

철민이는 지윤이를 거실에 앉혀 놓고 속을 진정시킬 겸 찬물을 떠 가지고 왔다.

지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야 자지 말고 물 좀 마셔라."

지윤은 가슴을 토닥거리며 물을 마셨다. 철민이는 지윤에게 들어 가서 자라고 권

했지만 잠시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앉아 있던 지윤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철민이도 그런 지윤이의 옆에 앉아 있다 꼬꾸라 졌다.

 

아침 일찍 동엽은 약간의 쓴 웃음과 함께 홀로 사라져 버렸다.

지윤이 보다는 철민이가 일찍 잠에서 깼다. 그의 기억은 동엽이에게 이부자리를

펴주었을 때까지만 존재하고 있었다.

"야, 박지윤."

철민은 정신을 차리자 마자 자기 팔하나가 아주 저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

민은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한 쪽 팔에는 지윤의 머리를 받친 채.

"야, 박지윤. 빨랑 일어 나."

지윤은 철민의 몸뚱아리에 자기의 등을 붙이고 한쪽으로 누워 있었다. 철민의 팔

을 밴 채로 말이다.

지윤은 눈을 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너... 너"

지윤은 눈을 떠자 마자 본 것이 철민의 손이었다. 자신이 배고 있던 철민의 팔

에 달린 손. 반대 방향으로 누웠다면 철민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지윤은 벌

떡 일어 났다.

철민도 팔이 자유로와 지자 바로 일어 나 앉았다. 그리고 대꾸했다.

"뭐?"

"내가 왜 니 팔을 배고 니 옆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 또 딴 짓 한 건 아니지?"

"또? 내가 무슨 딴 짓을 해 임마. 팔 아파 죽겠거만."

지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 나 자기 방으로 들어 가 버렸다. 많이 부끄러

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철민이도 동엽이가 자던 방으로 들어 갔다.

"야 박 지윤."

"왜?"

철민이가 바로 거실로 나와 지윤이의 방을 보고 외쳤다.

"동엽이 못 봤냐?"

"내가 어떻게 알아."

"동엽이 없는데."

"나 몰라. 동엽이 아침에 갔나 봐. 우리 둘이 그러고 있던 거 봤을거야."

지윤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답을 해 주었다. 철민이는 그런 지윤의 눈치

를 살피며 동엽이 처럼 몰래 지윤의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철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지윤이에게 오늘 일 만큼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 좋은 쑥

스러움. 그 부끄러움으로 철민은 잠시 지윤이가 여자로 생각 되어졌었다. 그래

서 지윤이 몰래 아파트를 빠져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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