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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연중6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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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0-02-18 ㅣ No.1033

2000, 2, 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마르코 8,34-9,1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그 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묵상>

 

  그리스도교를 나타내는 상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하루에도 수없이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제대 앞에 있는 대형 십자고상입니다. 회합실에도 십자가가 하나씩 있습니다. 집에 가도 방에 십자가가 걸려있고, 탁자 위에는 기도할 때 쓰는 탁상용 십자가가 있습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묵주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비단 그리스도 신자 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십자가는 낮설지 않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병원이나 교회의 십자가도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이제 십자가는 온 도시를 수놓는 중요한 장식품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지금처럼 무덤덤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식품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방법이었죠.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십자가 죽음의 처참한 고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여섯 시간 후에 벌써 숨지셨다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다. 보통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죽음과의 싸움은 훨씬 오래 걸렸다. 십자가 처형의 비인간적 가혹성은 바로 이 처형이 매우 느리며 몇 번이나 죽었다 깨어났다 한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경우, 순환의 고장(정상적 정력의 허탈)이 본연의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곧 기력이 핍진해지고, 그의 온 체중이 두 팔에 쏠리게 된다. 이런 현상은 얼마 안 가서 심한 혈행부전과 가슴을 조이는 호흡 장애로 연결된다. 그래서 죄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세워 본다. 이제 그렇게 함으로써 발 상처에 체중이 쏠리게 된다. 탈진 상태에 이르면 다시 축 늘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늘어지고 또 앞쪽에서부터 일으켜세우는 행동이 뼈아프게 반복된다. 두 발이 못박혔고 또 그것으로 인하여 몸이 적어도 얼마 동안은 받쳐지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죽음의 고통은-못을 박는 양식에 따라서 또 항목(抗木)을 사용하는지 않는지에 따라서 다르지만-하루 종일 걸릴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이 죽기를 원하면, 그들의 다리뼈를 부러뜨렸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체중이 팔에만 쏠리게 되면서 순환 고장 이상으로 매우 빨리 죽게 된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의 마지막 날], 이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4, 58-59쪽.)

 

  이처럼 십자가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고, 입에 담기조차 겁나는 처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이러한 처참한 죽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무기력하게 보이는 이 죽음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가 이제는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상징을 넘어서, 예쁜 악세서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십자가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 담긴 숭고한 의미를 간과하고 단지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고상을 바라 보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죽음을 묵상하는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바라보기만 할 뿐, 자신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 거부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단지 우리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그렇게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죽었으니, 너희는 나에게 감사하여라.'라는 뜻으로 그렇게 계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너희도 나처럼 그렇게 죽음으로써 참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온 몸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에 관한 첫 번째 예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무엇이 십자가의 삶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즉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고 사랑하는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치는 그 사랑의 행동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십자가가 무엇인가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 때문에 상처받을 사람을 생각하여 말을 삼가하는 것도 작은 십자가입니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시간에 벗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누군가를 만나주는 것도 작은 십자가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 자신의 수입을 나누는 것,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모함과 곤욕을 감수하면서 외치는 것, 등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작은 십자가로 수 놓아질 때, 우리 삶 전체가 하나의 십자가 삶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작가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보고만 있을 거룩한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안고 지고 가야 할 숭고한 사명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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