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노란 모과

인쇄

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9-16 ㅣ No.5339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나는 잘 사는 친구네집 마당에서 탐스럽게 익어 가는 노란 과일에 끌려 날마다 그 담장 밑을 맴돌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일 맛을 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바로 그 노란 과일을 보물처럼 들고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와! 모과다. 나 한입만 주라."

"나도 나도."

가난했지만 자존심 하난 강해던 나는 그저 바라볼 뿐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과는 내 차례까지 오지도 않은 채 땅에 버려졌습니다.

"에, 뭐야. 퉤퉤.:

나는 아이들이 다 돌아간 후 슬그머니 그 잇자국이 난 과일을 주워들곤 누가 볼새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렇게나 군침을 흘리던 노란 과일, 얼른 한 입 베어 맛을 보고 싶었지만 아파서 누워 계신 엄마한테 먼저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깨끗이 씻어 들고 들어가 엄마 앞에 내밀었습니다.

"엄마, 이거 친구가 줬는데 엄마 드세요, 헤헤."

엄마는 내 성화에 못 이겨 모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맛있게 드셨습니다.

"음, 맛있구나."

"정말? 헤헤."

그리곤 아파서 입맛이 없다며 모과를 내려놓으셨고 철부지 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낚아챘습니다.

"오빠, 나두 나두."

"자, 누나 먼저 한 입 먹어."

그토록 먹고 싶던 과일.

마침내 콱 깨무는 순간, 떨떠름함이라니.

"누나 왜 그래. 맛없어?"

나는 비로소 그것이 생으로 먹기는 힘든 과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땐 모과한테 속은 기분이 들어 억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픈 엄마한테 그렇게 맛없는 과일을 주워다 드린 내 자신이 죽도록 미웠었는데....

어린 딸 무안할까봐 맛있다며 먹어 주신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금도 모과만 보면 그 가난한 추억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아려옵니다.

 



4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