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빗방울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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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9-22 ㅣ No.5355

 

아버지의 길고 치열한 다툼 끝에 엄마가 집을 나갔습니다.

그날은 폭풍우가 무섭게 휘몰아쳤습니다.

화를 삭히려는 건지, 잊으려는 건지, 아버지는 밤늦도록 애꿎은 소주병만 비워댔고 나는 이불 속에서 숨조차도 안으로 삼키며 누워 있었습니다.

"휴... 이놈의 팔자."

나는 왠지 아버지의 그 한숨과 푸념의 뜻을, 그리고 절망의 깊이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곯아떨어진 아버지의 초라한 몸에 홑이불 자락을 덮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밤 엄마도 없는 우리 집 천장에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낡을 댈 낡아 그냥 허물어져 버릴 것만 같은 천장,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폭우...

나는 급한 김에 집안의 큰 그릇이란 큰 그릇은 있는 대로 가져다 비받이를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비 새는 소리가 새벽같이 일어나 막일을 나가야하는 아버지의 신경을 몹시도 거슬리게 했나 봅니다.

"에이, 이놈의 집구석...지겹다 지겨워."

아버지를 괴롭힌 건 빗소리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집 나간 엄마 생각이 나서 더 견딜 수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던 나는 슬며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는 끔결 같은 음악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습니다.

"어? 웬 음악소리지?"

그리고 내가 밤새 해 놓은 걸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크고 작은 유리그릇들이 연주하는 빗방울 소나타.

비 새는 구질구질한 소리 대신 방안엔 음악소리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녀석, 니가 애비보다 낫구나."

아버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품이 그렇게 따뜻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빗방울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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