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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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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옥 [yimariaogi] 쪽지 캡슐

2007-05-23 ㅣ No.7545


 

      어머니 - 글 : 법정스님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었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내 손에 꼬깃꼬깃 접어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뵈었다. 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 드렸다.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 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꺽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 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영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친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中에서 ♬ ~ 마음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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