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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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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호 [pete3200] 쪽지 캡슐

2004-09-13 ㅣ No.6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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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영세 - 카페회원님을 글을 나눕니다.

엄마의 영세

지난 8월 8일 예비자 제 16기생 영세식 때 금년에 80세이신 어머니가 영세를 받으셨다.

아버님과 형수님 돌아가실 때 대세를 드리고 아직까지 영세를 안 받으신 어머니에게 수 십 년 동안 성당 나가시자고 졸라도 성격이 워낙 강하셔서 안 나오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시골 형님 댁에 계시다 지난 추석 때 막내아들인 필자의 집으로 오시자 금년 봄 예비자 16기에 입학하셔서 이번에 영세를 받으시는 경사가 생겼다.

 

이번 호에는 필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한번 써 볼까 한다. 옛날 다른 어머니들도 다들 힘들게 사셨지만 우리 어머니도 참으로 힘들게 사신 분 중 한 분이다. 2남 5 녀 중 끝에 여동생 하나를 두고 정선 땅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열 다섯 살에 스물 두 살 인 3대 독자 아버지에게 평창으로 시집오시면서 고달픈 인생 여정이 시작되셨다.

시집을 오니 남편이 어렸을 때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와 남편 두 분이 사셨는데 이미 시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臼?집안 살림을 못하셨고 남편은 술꾼이었다.

 

무척이나 엄하셨던 부모 밑에서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이미 저고리 짖는 법이라든지 길쌈이라든지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배워 오신 어머니는 기울어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팔을 걷어 부쳤다.

품앗이를 하고 삵 바느질을 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지만 돈만 생기면 남편이 가지고가 술과 골패(놀음?일종)로 탕진을 하여 점점 빚만 늘어갔다.

동네 사람들한테 남편은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지만 정작 집에서는 폭군이고 성격이 모지셨다.

 

결혼 할 때가 일제 치하 말기였는데 건강한 젊은이들을 무조건 징용으로 끌고 가자 징용에 가지 않으려고 바늘로 자신의 왼쪽 눈을 찌를 정도로 남편의 성정은 모지셨고 돈만 생기면 사람들 술을 사주어서 사람들은 좋아하였지만 술값을 안주면 집에선 폭력을 일삼는 폭군이셨다.

조금 가지고 있던 땅 뙈기는 이미 시집오기 전에 술값에 다 넘어가고 시집 온 지 몇 년만에 살던 집까지 술값에 넘어가게 되자 친구들도 다 멀어지고 첫 아이는 울며 보채는데 먹은 게 없으니 젖도 안나오고 미음을 쑤어 먹일 래도 쌀이 없었다.

빚이 자꾸 늘어나 평창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자 충북 단양군 김산에 있는 먼 친척집 동네로 이사를 왔다.

김산으로 이사를 와서 먼 친척집 소작농을 하며 남의 집 품앗이를 하며 생활하니 남편도 마음을 잡고 일을 열심히 하여 제법 자리가 잡히고 생계가 나아졌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생활이 조금 여유가 생기자 남편은 또 다시 옛날의 병이 도져 술과 골패로 주색잡기를 일삼았다.

첫 아이를 낳은 뒤 두 번째 아이가 생기지 않자 3대 독자이던 남편은 술만 취하면 아이 못 낳는다고 어머니를 구박했다.

첫 아이 낳고 오 년이 지나도 두 번째 아이가 안 생기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자진해서 남편에게 작은 부인을 구해 주었다.

안채에 작은 부인을 상전처럼 모시고 남의 집 논매고 밭 매며 뼛골 빠지게 일하며 작은 부인이 아이 같기만을 원했으나 작은 부인도 들어온 지 오 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도 생기지 않고 남편이 허구 헌날 술만 먹고 집안 재산도 거덜이 나니 작은 부인도 가버렸다.

 

작은 부인이 가고 바로 어머니에게 태기가 생겨 낳은 아이가 바로 필자이다.

이미 큰아이는 11살이라 철이 다 들었고 새로 아이가 태어났으나 남편은 계속 술만 먹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결국은 또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은 김산 에서도 빚잔치를 하고 다시 강원도 정선군 함백이란 곳으로 쫓기듯이 이사를 갔다.

당시 함백엔 어머니의 오빠가 살고 계시고 탄광만 들어가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는데 징용 안 갈려고 왼쪽 눈을 바늘로 찌른 남편이 탄광에 들어가실 수 없음은 당연했다.

함백으로 가서도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산서 함백으로 이사갈 때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필자의 형은 그 길로 학교를 못 다니고 함백가서 신작로 수로 원이나 막노동을 하며 살림을 보탰다.

절골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어머니의 오빠가 짖던 화전을 물려받고 남의 땅 도지를 내어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의 허리는 펴질 날이 없었다.

 

남편은 황소로 밭을 갈다가도 멀리 신작로에서 "어이 손씨 한잔하러가지?" 하면 밭 갈던 쟁기에 소 고삐를 그냥 걸어놓고 시장으로 내려가서 일 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안 올라오셨다.

장마철에 미처 베지 못한 보리가 땅에 쓰러져 싹이 퍼렇게 올라와도 남편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소 풀 먹이로 다니고 학교 들어가선 소 꼴 베고 아침에 소 죽 끓여 주고 학교 갔다 와서 감자 캐어서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 비탈에 긴 지게 목발이 걸려 넘어지곤 하였다. 어머니는 무거운 감자자루나 강냉이 자루를 하두 머리에 이고 다녀 머리카락이 얼마 안 남았다.

 

그렇게 여자 혼자서 살림을 꾸려가자니 어머니는 자연히 강해지시고 나름대로 열심히 사시려고 애를 쓰니 남다른 자존심과 고집이 생겼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아주 점잖으시고 구 학문을 많이 하셔 족보 필사를 하실 정도의 한문 달필이시고 신라 39대 경순왕 시절 효자 손 순이 시조라고 필자를 무릎 꿇리고 양반과 효성을 강조 하셨지만 술만 취하시면 완전히 폭군으로 변하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새끼 농사만 지으면 되지 공부는 가르쳐 뭐 하느냐고 학교를 못 가게 하였으나 어머니는 큰애도 초등학교 중퇴시켰는데 막내까지 그럴 수 없다며 아버지의 반대와 주정 속에서도 악착같이 학교를 보냈다.

 

필자의 어렸을 때 기억은 아버지는 술 주정밖에 없고 어머니는 맨 날 밭에서 일만 하고 때리고 패는 무서운 엄마로밖에 기억에 없다. 너만 안 낳았으면 벌써 팔자를 고쳤거나 뒷산 소나무에 목매달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필자는 성장을 하였다.

어머니는 정말 강한 여장부셨다. 그런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다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 땅을 만평이나 사실 정도로 어머니는 강하셨다.

그렇게 사시기에 어머니는 표정이 없었다.

고생만 하시던 형수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서럽게 우신 것 외에는 어머니의 우시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술병으로 6년 동안을 누워 계시다 돌아가셔도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 하여도 어머니는 안 가신다.

또한 웃는 모습도 거의 본적이 없다. 손주들 태어났을 때나, 학교 졸업할 때 등 몇 번밖에 웃는 모습을 못 보았다.

너무도 강하시어 울기도 웃지도 않으시는 어머니는 얼마 전까지도 고추 따고 밭 매며 악착같이 돈을 벌고 남의 집일을 하시고 집에 오시면 신세 한탄만 하셨다.

그러니 시골집에서 형님과 새로 들어온 형수님과 관계가 평탄 할 리가 없다. 한 바탕 하시고 나면 필자네 집에 오시지만 우리 부부는 맞벌이라 울 마마는 새벽에 들어오고 어머니는 경로당 가셔도 시골처럼 재미가 없고 지루하시니 얼마 못 계시고 다시 시골로 가시곤 했다.

 

많은 세월이 흘러 필자도 50줄에 접어들었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두렵고 무서움 그 자체였다.

아직까지도 아내 세실리아는 어머니 앞에서 겁이나 고개도 제대로 못 든다. 온 동네서 호랑이라고 소문이 난 어머니도 이제 팔십이 되셔 기력이 많이 쇠하여지셨지만 성격은 누그러지시질 않으시고 성당에 나가자고 말씀드려도 '지지리 복도 없는 내가 성당 나가 뭐 하느냐'고 말씀을 안 들으셨다.

몇 년 전 이 대식 신부님께서 전교주일날 내 가족 중에 전교 못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 전교주일까지 앞으로 1년 동안 열심히 기도해 보라 그러면 주님께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 하셨다.

 

그때부터 어머니 전교를 위해 몇 년을 열심히 기도를 해도 주님은 들어주실 기미를 보이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도보다는 그냥 말로만 자꾸 나가자고 하면서 안 나오시는 어머니를 원망했던 것 같다.

그 동안 아주 오신다고 하여 필자가 가서 짐 보따리 싣고 왔다가 얼마 못 계시고 가시곤 하시던 어머니가 형님과 형수님과 크게 전쟁을 한번 치르시고 작년 추석에 필자가 모시고 와서 아직 계신다.

오신 뒤에도 워낙 고통 속에서 생활하시며 사신 분이라 고집이 세셔서 성당 가시자면 또 시골로 가실까 보아 선뜻 말을 못 드리고 기도만 하였다.

그러다 올 봄에 예비자 초대하기 얼마 전 넌지시 말씀 드렸더니 "한번 가볼까?" 하시며 선선히 대답하셨다.

교리를 다니시는 동안 어머니에게 별로 성당에 대하여 말씀을 안 드렸다.

어머니 성격을 잘 알기에 공연히 잘못 말씀드려 안 나가신다고 하실 까 보아 그냥 필요한 기도문 확대 복사하여 드리고 지켜만 보았다.

얼마쯤 다니신 뒤에 성호 긋는 방법을 말씀드렸더니 성당에서 그렇게 안 배웠다며 언짢아 하셨다.

그렇게 교리를 받으시며 성격 강하시고 고집이 센 호랑이 같던 어머니가 종이 호랑이가 되어갔다.

아니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 서서히 천사가 되어 가셨다.

 

전에는 이쁜 옷을 사드리면 속으론 좋으면서도 "금방 죽을게 이까짓 건해서 뭐해" 하시고 식당에 모시고 가면 멀쩡히 잘 잡숫고는 "엄마 맛있어요?" 하면 "내가 언제 이런 거 좋아했어? 그저 김치 뿌다구가 젤이지" 하시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주 작은 일에도 "고마워" 하시는 말을 자주 하신다.

어머니에게 고맙단 말을 다 들어보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몇 십 년을 버티시다 80노구를 이끄시고 나 가셔선 '너무 늦게 나가서 하나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외우지도 못하겠다시며, 5년만 일찍 나갔어도 다 알아들을 텐데' 하고 속상해 하시며 교리를 한번도 안 빠지시고 집에선 기도 연습도 하시고 성호 긋는 연습도 하신다.

드디어 지난 8월 8일 어머니는 영세를 받으셨다.

영세는 받으셨으나 어머니는 아직도 주님의 기도도 못 외우시고 성호도 잘 못 그으신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생전에 학교 문턱에도 한번 못 가보신 어머니시지만 어렸을 때는 장화 홍련 뎐이나 유 승렬 뎐, 배 비장 뎐 같은 옛날 이야기책도 자주 읽어 주시곤 했다.

 

하지만 삶에 찌들어 글을 안 읽으신 지가 몇 십 년이 되셨는데 나이 80인 지금 와서 꼭 기도문을 줄줄 외워야 신자가 되는가?

교리 다니시면서 점점 남에 대한 원망이 없어지고 이웃을 배려하시고 노인정 다녀오셔서 남을 칭찬하는 횟수가 늘어가며 작은 일에도 고마워 하며 자주 감사를 표현하시는 변화된 모습이 진정한 신자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학교 갔다와서 일 안하고 성당 간다고 "그놈의 교회가 밥을 주냐? 옷을 주냐?" 하시며 참 많이도 혼내시던 어머니가 영세를 받으시고 너무 기뻐하신다.

영세식 끝나고 어머니 대모님과 몇몇 분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하고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제일먼저 하시는 말씀이

"에비야, 나 오늘 평생 원 풀었다."

"엄마 영세 받으니 그렇게 좋아요?"

"그래, 영세 받은 것도 좋은데 꽃다발 한번 받아 보는 게 원이었거든? 근데 오늘 두 개나 받았잖어"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시며 이번에 받은 꽃다발과 묵주, 미사 보 등 선물을 어린아이처럼 자랑하시며 무척 좋아하신다.

그러고 보니 어버이날 가슴에 꽃 달아드린 것 외에는 정식으로 어머니에게 꽃다발을 드린 적이 없다.

생신이나 환갑, 진갑잔치에서도 잔칫상이나 케이크는 차려드리면서 정작 꽃다발은 안 드렸다.

 

한평생을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우리는 어머니가 꽃다발을 받고 싶어하시는지 몰랐다. 꽃다발은 그저 젊은이들이나 좋아하는 사치스런 것이지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니고 금방 시들어 버리는 그 비싼 꽃다발을 어머니가 좋아하실 줄 몰랐다.

 

아∼∼한 평생을 남편 잘못 만나고 자식 키우시느라 고생하시어 눈물도 모르시고 웃음도 모르시던 어머니도 여자였다.

 

아직 까지 늙으신 어머니에게 꽃다발 한번 안 해주신 분들 더 늦기 전에 어머니에게 커다란 꽃다발 한아름 선물하세요.

늙으신 어머니도 꽃을 무척 좋아하신 답니다.

어머니도 여자랍니다.

고생만 하신 어머니께서 이번에 새로 태어나심으로 이제는 한 여성으로서 웃음도 지으시며 점점 성모 어머님을 닮아 가시고 주님의 은총 속에서 그 동안의 고통을 위로 받으시고 남은 생을 주님께 의지하여 행복하게 사시다 주님 곁으로 가셨으면 하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아 본다.

 

오래 전에 이 대식신부님이 전교 못한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꼭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주님께서는 나처럼 열심히 기도 안 해도 들어주셨다. 여러분, 가족 중에 전교 못한 부모님이나 남편 혹은 아내가 있으면 말로만 나가자 하며 속 끓이지 마시고 주님께 완전히 맡기고 기도해 보세요.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 해주시고 미사 안내 해주시고 매주 토요일이면 전화 해주시고 교리 가르치신 봉사자 님들과 신부님 수녀님, 대모님, 소 공동체 반원 분들, 레지오 단원, 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 내 모든 시련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우리 주님.♬

 

넘 길죠? 죄송합니다.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공이

 

'고덕동 전례부' 카페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cafe.daum.net/koduk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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