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성당 게시판
마더 데레사의 이야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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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의 이야기(1) -그 한없는 단순함-
생전에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던 마더 데레사. 1997년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유해는 장례식 기간동안 유리 관에 넣어져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건 150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몸과 주름 투성이 얼굴, 그리고 평생의 거 친 일로 괭이처럼 굽은 손과 발, 다 타서 녹아 내린 한 자루 양초처럼 볼 품 없는 몸이었다. 우리는 왜 이러한 평범하고 초라한 여인을 그 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
마더 데레사는 자유의 메달과 노벨 평화상 등 수 많은 상을 받았다. 이 모든 영예는 그의 역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 면이다. 그의 진실은 환호 속에서도 본래의 성질을 잃지 않으며 조용 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고 있다.
마더 데레사는 천재도 아니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대 학을 간 적도 없고 성서 외에는 책도 많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는 철학자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수 없이 많은 수상 연설과 강연을 통 해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늘 새로 운 것이 없고 비슷했다. 심지어 마더 데레사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게 확신을 심어 줄 만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더 데레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몸과 마음 을 치유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많은 영혼을 변화시켰다. 마더 데레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단지 그에 관한 글을 읽었을 뿐이지만 많은 사람 들이 뭔가를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더 데 레사를 이 시대의 지도자, 진정한 영적 스승이라 부르기도 하고 있다.
① "우리가 받은 소명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 글로 복음을 실천하는 단어로 옮겼다. 그는 성령이 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접근할 수 있고,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증명 했다.
②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생전에 마더 데레사가 가장 즐겨하던 말이다. 마더 데레사는 늘 자신이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③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 님을 사랑하라" 이 말씀은 마더 데레사의 마음을 온전히 소유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받아드리게 된 것이었 다.
④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 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이에 대해 추 호의 의심이 없었으며, 어떤 망설임도 없었고, 절대적이고 완전한 신뢰 를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에 따라 그의 일생은 늘 겸손하고 정직하고 단순했다.
지극히 단순했던 마더 데레사의 삶은 그 자체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 동을 주었고 영감을 불어넣어 더 나은 세상, 즉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길에 나서도록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참된 지도자는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실제로 앞장서 나아간다. 그 것들이 우리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활력 을 주는 것들과 접촉하면서 변화되어 간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의 변 화는 ’정서적인 깨달음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 면 지적인 깨달음으로는 사람을 한 치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자기 모습에 대하여 "변화를 가져 와야지"하는 정서적 깨달음을 통해서 생 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정서적 주관성이 객관적 지식을 압도한다는 말이다. ⑤ "나의 작은 길은 영적 어린이의 길, 하느님의 사랑을 절대 신뢰하며 그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길 입이다."(리지외의 성녀소화 데레 사) 마더 데레사의 본명은 ’아네스 곤히야’였으며 ’곤히야’는 ’꽃봉오리’를 뜻하는데, 아네스의 두 볼이 통통하고 발그레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다. 1928년 로레로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인도 캘커터로 가서 3년간 영어와 뱅골어를 배우며 수런을 받고 데레사 수녀가 됐다.
첫 서원에서 아네스는 보호 성인으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선택했 다. 아네스는 하느님에게 아이처럼 모든 것을 온전히 내 맡기고 영적 인 어린이와 같은 기쁨 속에 살았던 소화 데레사에게 특별하고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몇 년 후에는 종신 서원을 한 후 교장이 되었다.
데레사 수녀는 틈틈이 빈민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수회 줄리앙 앙리 신 부를 도왔다. 1946년 9월 10일 캘커타를 떠나 히말리아의 라질링 행 열차를 타고 정기적인 피정을 가는 길이었다. 그날 그는 혼잡한 기차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을 도와 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후일 사랑의 선교회가 ’계시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제서 야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알았지만, 나는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불명확했지만 「그의 삶을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 들였다.」
이 부르심, 소명은 분명했지만 또한 어려운 것이었다. 방법도 모르고 조직도, 규칙도, 머리를 누일 수도원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 는 상황이었다. 데레사 수녀가 알고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은 ’다 모른다’ 는 것뿐이었다. 데레사 수녀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알았지만, 어떻게 거기에 가야 할 지는 전혀 몰랐다. 그의 새로운 소명을 둘러싼 복잡하고 오랜 진통과 논의 끝에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수녀 신분을 유지하면서 수도원 밖에 서 일할 수 있다는 허락이 떨어졌으며, 1948년 8월 17일 데레사 수녀 는 거친 천으로 만든 사리 세 벌과 작은 십자가와 묵주만을 들고 수도 원을 떠났다. 데레사 수녀는 그의 ’작은 길’로 걸음을 옮겼다.
(생활 성서에서 다음 달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