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머뭇거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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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5-02 ㅣ No.4813

 

머뭇거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여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사랑에 빠진 수십 억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그가 조금 특별한 이유는, 그가 예순 다섯의

할아버지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좀 독특해서라고 할까요.

윤형근 할아버지는 지금 중국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집 근처 산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

합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낯선

외침 소리를 듣게 됩니다.

"중국어 잘하려고 매일 아침 운동하면서 발음 연습을 해요.

그래야 중국어가 잘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중국어가 나오

지 않아요."

산꼭대기 나무 그늘에 이르자, 할아버지는 맨손체조를 시작

하며 벤치 위에 라디오를 내려놓습니다.

그가 굳이 아침마다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

니다. 산꼭대기에서는 중국의 라디오 방송이 잘 잡히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가 무엇을 위해 중국어에

뒤늦게 빠져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1994년 중국 연변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참 그

넓은 땅덩이에서도 사람 사는 거 힘든 건 마찬가집디다.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이민족으로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자식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어를 쓰고 있다는 것에

놀랐죠.

근데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서 못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듣고 내가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해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단 한 번의 중국 여행으로 결심하게 된 중국어 공부.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할아버지 마치 불도져처럼 밀어붙

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베이징 광보대학에서 1년 6개월 간 어학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제 중국어로 웬만한 회화가 가능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절대로 그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집에 있는 200여 권이 넘는 중국어 서적이 그를

증명합니다.

 

요즘도 할아버지에게 중국어는 매 끼니 반찬 중 하나

입니다.

밥 한술 뜨고 중국에 책을 힐끔힐끔 보니 말입니다.

그런 할아버지와 살다 보면 할머니는 할머니는

날마다 도를 닦는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짜증나죠. 어떤 때는 중국어에 미쳤다 싶기도 하고.

테이프도 어찌나 똑같은 걸 몇 번 씩이나 반복해서

듣는지 저는 아주 ’중국’ 자가 들어가는 건 다

싫어졌어요. 그래도 한편으론 자기 인생 잘살려고

저렇게 노력하는데 제가 식구로서 도와 줄 수 있는

건 도와 줘야겠다 생각하죠."

사실 할아버지는 며칠 후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 곳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구체적이 계획을 가지고

말입니다.

오늘은 떠나기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 한 명과 모교에 들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할아버지가 만난 동창은 아무리 봐도 채 스무 살이

안 돼 보입니다. 할아버지를 보고 달려 나오는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카뻘 정도라고 하면 될까요?

알고보니 할아버지는 바로 올해 초 46년 만에 고등

학교를 졸업한 늦깎이 학생이랍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너무 멀어 학교 앞에서 자취까지

하며, 막내 아들보다 어린 동급생들과 2년을 공부

하고 받은 그의 고등학교 졸업장.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

며 후회없이 배음에 열중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졸업장보다 배움 그 자체

였기 때문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 수 없이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던 할아버지.

그 뒤 농사꾼으로, 빌딩 경비원으로 열심히 살아

왔지만 할아버지는 늘 한쪽 가슴이 헛헛했습니다.

그런데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나니 더

이상 머뭇거릴 일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늙어서 고등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

걱정했지만, 할아버지는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물론 자식들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장을 받던 날의

가슴벅참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또 상을 펴고 공부를 시작

합니다.

그때마다 그는 다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그 순간의 감격을 그대로 기억해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늘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중국

속담을 되뇌어봅니다.

 

"천천히 가는 것을 두려워 말고,

   가다가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라."

 

그가 주저하지 않고 늦깎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던 힘, 그리고 멈추지 않고 매진해 나갈 수

있는 그 용기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배움의 길 위에서 결코

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인생은 머뭇거리기엔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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