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기차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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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9-09 ㅣ No.5320

 

 

내가 화물열차 기관사로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부기관사는 기관사 시험에 볓 번이나 떨어져 이제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선배였습니다.

직급은 비록 낮았지만 그는 사려 깊고 너그러워 모든 후배들이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어렵게 입을 뗐습니다.

"저..우리 막내 말이야. 이번 방학 때 기관차에 꼭 좀 태워달라고 성환데.. 나참."

"아 그게 뭐 어렵습니까? 언제든지 데려 오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나?"

실제로 그건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후, 선배는 아홉 살 난 막내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야, 네가 윤재구나."

"얼른 인사해야지."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빠가 모는 기차를 타 보다니, 아이는 온 세상을 다 차지한 듯 기뻐했습니다.

"이제 정말 아빠가 모는 기차 타는거야? 헤헤..와..신난다."

"녀석..."

하지만 기차에서 부기관사의 일이란 단순하기 짝이 없어 그저 기관사 옆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창밖 경치에 눈을 팔고 있던 아이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종착역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번갈아 지켜보던 아이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빠, 근데.. 아빠는 왜 가만히 있어요?"

아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맸습니다.

"어... 어.. 그게 그러니까..."

나는 얼른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이 기차의 대장이란다. 대장은 그냥 시키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러자 아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습니다.

"아하.. 우리 아빠 최고다 최고!"

엉겹결에 기차 대장이 된 선배는 그 어린 아들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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