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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선교지에서선종한첫한국인평신도선교사-임연신(엘리사벳)-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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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05-13 ㅣ No.7526

[특집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임연신씨의 삶과 꿈]<하> 2007.05.13 13:14
 
[특집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임연신씨의 삶과 꿈]<하>
805호
발행일 : 2005-01-09

희생으로 틔운 싹, 풍성한 결실의 그날 향해 무럭무럭
   피지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1994년 11월5일 수바 타마부아 성당에서
엄수된 임연신 엘리사벳의 장례미사 때 엘리사벳을 기억하고 그 무덤을
돌보며 엘리사벳이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피지 골롬반회를 대표해서 인사했던 프랭크 호레 신부는
'추모 글'에서 이렇게 썼다.

 "연신이의 갑작스럽고도 슬픈 죽음으로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운동은
선교의 진가가 완전히 드러나는 진리의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연신 엘리사벳의 추모 책자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중에서)

 엘리사벳이라는 씨앗은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될까.
첫번째 결실은 엘리사벳의 부모였다.
1년 남짓 지난 1995년 12월3일  두 사람은 엘리사벳이 세례를 받고 활동했던
서울 불광동성당에서 요셉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받은 다음날 임용택씨는 하늘나라에 있을 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너의 행적을 더듬는 동안 아빠 엄마는 너의 삶이 옳았음을 깨닫고 가톨릭에
귀의하는 것이니, 이 또한 너의 큰 소망을 이룸이겠지.
명복을 빌며 세례를 받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
(평화신문 360호 95년 12월17일자 보도)

 땅에 떨어진 씨앗은 피지에서도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계기는 엘리사벳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한 골롬반 선교사들이 제공했다.
엘리사벳이 묻힌 지 3년이 지난 1997년 어느날 수바에 있는 남태평양 지역 연합
가톨릭 신학교(PRS) 교수로 있던 도날 신부가 한인 교우 몇 사람에게
한인 신자공동체 모임 결성을 제안한 것이다.

 모임에는 김한중(에드워드, 54)ㆍ장기화(요셉, 49)ㆍ윤연상(수산나, 64)씨
가정과 평화봉사단으로 현지에 파견됐던 정기화(데레사)씨가 참여했다.
김한중씨와 장기화씨는 엘리사벳이 피지에서 지내면서 친분을 맺은 몇 안 되는 한인 신자들이었다.  
정기화씨는 엘리사벳의 병이 악화되자 임종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간호사였다. 엘리사벳을 집에 초대하려 했던 윤연상씨는
엘리사벳의 상태가 악화되는 바람에 식사도 한번 함께 하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다. 이들은 엘리사벳에 대한 기억이
나름대로 각별한 이들인 셈이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의 골롬반회 선교사가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사제품을 받은 직후인 1956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에서 사목한 퀸(Edward Quinn) 신부였다.
엘리사벳이 피지에 왔을 때 지도신부이기도 했던 퀸 신부는 한인공동체
지도신부를 맡았다. 퀸 신부는 피지 골롬반선교사들 가운데서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사제기이도 하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공동체는 매달 정기적으로 골롬반회 피지본부에서
 만나 퀸 신부가 집전하는 한국어 미사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면서
조금씩 커져갔다. 현지 성당에 나가던 신자들도 매달 한국어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인공동체에 합류했다.
엘리사벳의 5주기가 되던 1999년에는 한인공동체가 15가정으로 불어났다.

 신자들은 엘리사벳의 기일에는 미사를 봉헌한 후 함께 묘지에 가서 위령기도도 함께 바쳤다.
엘리사벳을 몰랐던 신자들도 몇 해전 한국에서 젊은 여자 평신도선교사가 피지에 와서 가난한 현지주민들과 더불어 살다가
23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0년 대희년은 엘리사벳의 삶과 정신이 또 한번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이웃 호주 골롬반회가 대희년 달력에 20세기에 기억할 만한 인물이나 사건으로 마더 데레사, 동서독 통일, 교황 요한 23세,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제시하면서 엘리사벳을 11월의 인물로 올린 것이다.

 달력에는 엘리사벳에 대해 "피지 원주민과 인도인 이주민간 화해에 앞장선 한국 평신도선교사"라면서
 "인간 본연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언제까지나 존중되고 존경받을 것"이라고 기록됐다.

 피지는 원주민과 인도인 이주민이 약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 상권 등 경제력은 인도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피지 원주민들과 심심찮게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다.
빈민촌에 들어간 엘리사벳은 이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피지 한인공동체도 꾸준히 성장해 신자 수는 2004년 말 현재 모두 26가구 60여명으로 늘었다.
매월 한차례 공동체 미사가 있는 날이면 골롬반회 지부본부는 잔칫집이 된다.
신자들은 미사가 끝난 후에는 각자 집에서 마련해온 음식을 나누며 신앙 안에서 형제애를 돈독히 한다.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있으면 함께 걱정하고 서로 도와준다.
이덕환(바오로) 한인공동체 회장은 "피지에서 살다가 이웃 호주나 뉴질랜드로 떠난 신자들도
못잊어 할 정도로 가족같은 분위기가 우리 공동체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인공동체가 극복해야 할 어려움도 만만찮다.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의 내적 성숙을 도모할 신앙교육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퀸 신부는 연로해서(76살) 미사와 성사 집전 외에 다른 일을 더 하기가 쉽지 않다.
웬만한 해외 한인공동체에는 있게 마련인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조차 아직 없다.

 500여명의 한인교포 가운데 1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신자들을 더 찾아 공동체에 합류시키는 일도 해야 한다.
이들 중 현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냉담 중이거나 개신교 교회에 가는 이들도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2003년에는 통신교리 책자를 문제를 함께 푸는 형태로 만들어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실시해
6명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엘리사벳을 추억하면서 틈날 때마다 빈민촌을 찾아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을 나누기도 한다.

 태권도 사범으로 피지에서 18년째 살고 있는 장기화씨는 "엘리사벳이 계기가 돼 시작된 피지 한인공동체는
퀸 신부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퀸 신부님이 활동을 못하시게 되면 그때가 정말 걱정"이라고 말했다.

 퀸 신부 역시 이 점을 우려하면서 "피지 말을 배우는 것이 어렵겠지만 이곳에 한국인 평신도선교사가 온다면
엘리사벳이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인 공동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사벳의 희생으로 싹을 틔워 자라고 있는 한인공동체. 아직 가냘프지만 풍성한 결실을 맺을 그날을 향해
더욱더 깊이 뿌리내리기를 빌어본다.

피지=이창훈 기자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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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선교사 임연신씨 넋 피지 한인공동체로 꽃피워
557호
발행일 : 1999-12-12

1994년 선교활동중 선종

한 젊은 평신도 해외 선교사가 못다 이루고 간 꿈이 5년 만에 현실로 소박하게 피어나고 있다. 남태평양 피지의 가톨릭 한인공동체다.

피지는 지난 94년 골롬반회의 평신도 선교사 임연신(엘리사벳)씨가 파견돼 선교활동을 펴다가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진 곳. 임씨는 7개월간의 현지 적응을 위한 연수를 마치고 10월초 빈민촌으로 들어가 지역민들과 함께 지낸 지 불과 20여일 만에 급성간염에 걸렸고, 손쓸 겨를 없이 그해 11월4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해외 선교중에 사망한 첫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였다.(평화신문 제307호 94년 11월20일자 보도)

당시 피지에는 한인 신자공동체가 두 가구뿐이었다. 이들은 현지에서 한국어로 엄수된 장례미사에 참례해 “내 평생 소망이 한국어로 미사를 드렸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연신이가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죽었나 보다”고 울먹였다. 그때까지도 비신자였던 임씨의 부모 임용택(67)·성성지(61)씨는 1년후 요셉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딸의 5주기를 맞아 지난 11월초 피지를 찾은 임씨 부부는 깜짝 놀랐다. 단 두 가구에 불과했던 한인 신자공동체가 15가구로 불어났고, 이들은 매달 한번씩 한국어로 미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사 집전 사제는 30여년 전 소록도 등지에서 12년간 사목했던 미국인 에드 퀸(71)신부다.

임용택씨는 “5년 전 연신이의 장례미사 때 교우 아주머니의 울먹이던 소리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한인 신자공동체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면서 “딸 아이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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