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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선교지에서선종한첫한국인평신도선교사-임연신(엘리사벳)-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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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05-13 ㅣ No.7527

[특집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 임연신씨의 삶과 꿈]<상>
804호
발행일 : 2005-01-01

피지에 지핀 선교, 불꽃으로 다시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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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11월5일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 공화국 수도 수바에서는 23살 한국 처녀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처녀 이름은 임연신(엘리사벳). 직업은 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선교사. 그러나 선교사로서 현지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지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장례미사 때 한 교포 여자신자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내 평생 한국어로 미사를 드렸으면 하고 소원했는데 엘리(엘리사벳의 애칭)가 이 소원을 들어주려고 죽었으니…." 한국인 교포 신자들이 몇 가정 있었지만 한국어 미사는 생각지도 못한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04년 12월 피지 한인 신자공동체는  26가정 60여명으로 불어나 있다. 이들 중 임연신 엘리사벳을 직접 본 신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임연신 엘리사벳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다. '피지를 사랑해 오래오래 살고 싶어 했던' 젊은 처녀 평신도선교사의 못다핀 꿈이 피지 교포신자들을 통해서 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 사연을 현지 취재를 통해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9시간이 지나서 도착한 섬나라 피지 난디 국제공항. 여기에서 다시 15인승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수도 수바까지 날아가는 데 40분 남짓 걸렸다. 마중 나와 있던 미국인 퀸(Edward Quinn) 신부와 함께 임 엘리사벳이 누워 있는 나시누 공동묘지로 향했다.

 임씨 무덤은 피지에서 선종한 다른 3명의 골롬반회 선교사 무덤과 나란히 있었다. 묘비에는 '골롬반 평신도선교사 임연신 1979년 2월19일 한국에서 탄생, 1994년 11월4일 피지에서 사망, 안식을 빕니다'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다른 선교사 묘비와 비교해 보니 엘리사벳의 사망연도가 제일 빠르다. 그녀는 피지에 묻힌 첫 한국인 선교사일 뿐 아니라 첫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였다.

 양계업을 하는 임용택(요셉, 73)ㆍ성성지(마리아, 66)씨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연신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당시 집안에서 신자는 연신씨가 유일했다. 이후 본당에서 성서모임과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신앙을 키운 그녀는 특히 대학시절 유아교육학을 공부하면서 경기도 성남 달동네 아기방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교사로서 소명을 키웠다. 그리고 1993년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실시하는 해외 평신도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동료 평신도선교사 2명과 함께 1994년 2월말 남태평양 피지에 파견됐다.

 약 8개월 동안 언어(영어와 인도어) 공부와 빈민촌 체험 등 현지 적응 실습을 한 후 엘리사벳은 10월 초 피지 수바시 나카시 지역에 있는 하트 마을(HART Villiage, 빈민들을 위한 집단 주거 정착촌)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본격적 현장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손만 대면 찢어지는 다 삭아버린 커튼, 시멘트만 발라져 있는 창고같은 주거공간, 새끼 손가락 길이의 바퀴벌레와 도마뱀 등 동물의 왕국이라는 점만 빼면 그런 대로 살 만하고 전기에 전화까지 갖춘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기도 하다…."(1994년 10월 8일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아버지 임용택씨와 함께 나카시 하트 마을을 찾았다. 모두 50가구로 이뤄진 하트 마을은 마을 전체에 전기가 들어오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분위기나 사람 사는 모습은 10년 전이나 차이가 없다고 길 안내 도우미를 자처한 교포신자 장기화(요셉, 49)씨가 전했다.

 엘리사벳이 살던 그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 주인에게 찾아온 사연을 설명하고 잠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한다. 바닥에 양탄자와 돗자리가 깔리고 소파 등 가구 몇 점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10년 전과 다름없다고 한다.

 엘리사벳과 함께 지냈던 주민들을 만났다. 엘리사벳과 음식도 나누면서 가깝게 지냈다는 마리 바카니씨는 "엘리사벳은 아주 활기차고 적극적 성격"이었다면서 "아이들을 좋아했고 주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회고했다. 10여년째 나카시 하트 마을 유치원교사를 하고 있는 토카사 타이티니씨도 "연신씨는 나를 도와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아주 헌신적이고 활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트 마을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이들과 지내면서 자주 통증을 호소하던 엘리사벳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황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잘 몰랐던 주민들도 나중에는 그게 병인 줄 알고 서둘러 병원으로 가라고 재촉했다. 급성 A형 간염이었다.

 20여일만인 10월26일 병원에 실려간 엘리사벳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엄마, 나 아파, 엄마 보고 싶어"라는 전화 소리에 놀라서 달려간 부모를 보고도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11월4일이었고, 엘리사벳의 나이 23살이었다. 그녀는 해외선교활동 중에 사망한 첫 한국인 평신도선교사로 기록됐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피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엘리사벳의 장례식은 이튿날 수바 타마부아 성당에서 골롬반회원들과 피지 현지 주민들과 한국교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됐고, 그 육신은 그녀가 오래 살고 싶어 했던 사랑하는 피지에 안장됐다. 이 소식은 일주일 후 서울 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에서 추도미사가 봉헌되면서 평화신문(307호, 1994년 11월20일자)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1년 후 연신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딸의 5주기를 맞아 피지를 찾은 부모는 깜짝 놀랐다. 5년 전 딸의 장례식 때는 한국인 신자 가정이 두세 가구에 불과했는데 그 사이에 어느새 15가구나 되는 한인 신자 가정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고, 게다가 매달 한국어로 미사까지 드리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난 2004년 12월 한인 신자 공동체는 이제 26가구 60여명으로 불었다. 이들은 매달 한번씩 골롬반회 피지지부 본부에 모여 한국어로 미사를 드리고 친교를 나눈다. 지난 11월에는 골롬반회 할아버지 선교사들을 위한 공연을 펼쳤고, 지난해엔 처음으로 예비신자교리를 실시해 6명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피지 한인 신자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돼 오늘에 이르렀을까.

피지=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사진설명)
1. 수바 나시누 공동묘지에 있는 임연신 엘리사벳 묘와 생전 임씨모습(오른쪽 작은 사진).          2. 임용택씨가 나카시 하트마을에서 딸과 함께 지냈던 주민들과 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뒷 건물이 임씨가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유치원. 현재는 마을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피지 한인 신자 공동체(회장 이덕환 바오로)가 12월12일 수바 골롬반회 지부본부에서 한국어로 주일미사를 봉헌한 후 고국 신자들을 향해 힘차게 '아자!'를 외치고 있다. 뒷줄 가운데 사제가 지도신부인 퀸 신부.

 

 

[신간] 내가 선택한 가장 소중한 것

 

 

 

896호
발행일 : 2006-11-19

스물세살에 하느님 품에 안긴 선교사 비망록
내가 선택한 가장 소중한 것
이창훈 엮음
/가톨릭출판사/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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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내 알지 못하오나, 나는 당신 것이오이다. 당신을 내 이해하지 못하오나, 당신은 나를 내 운명에다 축성해주셨으니, 당신이여, 당신이여…. 내 봉헌을 새롭게 하소서."

 불과 '스물세살'이었다. 선교지 피지에 도착한지 8개월, 가난한 이웃들 곁으로 다가가 사도직 현장에서 살기 시작한 지 한달만에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꽃조차 슬퍼 눈물을 흘릴'(두보의 시 '춘망') 비통한 소식에 아버지, 어머니는 한달음에 피지까지 날아갔다. 그러나 변변한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한 채 셋째 딸은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겼다. 바로 '해외 선교지에서 선종한 첫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로 기록된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임연신(엘리사벳, 1971~94) 선교사다.

 1993년 해외 평신도 선교사 프로그램에 참여, 이듬해 3월 선교지 피지에 파견됐다가 그해 11월4일 극빈층 집단 주거지 하트 마을에서 선종한 임 선교사의 일기와 삶의 여정이 한권의 책에 묶였다. 이창훈(알폰소) 평화신문 기자가 엮은 선교비망록 「내가 선택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복음화의 작은 겨자씨가 됐다. 임 선교사 선종 당시만해도 미신자였던 아버지 임용택(73)씨와 어머니 성성지(67)씨는 1년 뒤 요셉,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고, 1994년 두 가구에 불과했던 피지 한인 신자공동체는 10주기 때에는 26가구 60여명으로 불어났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씀 그대로였다.

 선교 비망록은 1992년 숭의여전을 졸업한 뒤 성남 달동네 애기방 실무자로 살며 성소를 키우던 당시 일기와 묵상(1부), 피지에서 부모와 동료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2부), 임종과 장례미사에 관한 글과 추모사,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글(3부)로 이뤄져있다.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젊은이 내면과 선교지의 생생한 모습은 오늘 이 시대 '힘들기만한' 선교 현장에서 살아가는 선교사들, 더불어 성소를 키우는 예비 선교사들과 신앙인들 모두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될 '힘 있는' 선교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세택 기자sebastiano@pbc.co.kr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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