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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 코베르티노의 성요셉 사제♬10.Puer Natus In Bethle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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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9-17 ㅣ No.1370



 

축일: 9월 18일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사제, O.F.M Conv.

St. JOSEPH of Cupertino

San Giuseppe da Copertino Sacerdote

17 June 1603 as Joseph Desa at Cupertino

- 18 September 1663 at Ossimo

Canonized:16 July 1767 by Pope Clement XIII  

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OFMConv

비행사와 천체 연구가들의 주보 성인

                    
 

요셉(1603 - 1663)은 이탈리아 꼬베르띠노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곤경에 있었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나 천성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꼰벤뚜알회에 입회가 허락되었다.

신학 공부에 매우 곤란을 겪으면서 어렵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깊은 관상 생활을 하였다.

믿을만한 직접 목격자들은 그가 공중에 떠서 탈혼 상태에 자주 빠지곤 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 23 세는 그를 비행사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많은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다가 오시모에 있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이탈리아의 코페르티노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은 젊어서 구두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17세 때에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에 입회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그 다음에는 카프친 프란치스꼬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8개월 후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그로뗄라의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마부 노릇을 하는 한편 3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에서 살았다.

이윽고, 1625년에 그는 수련자로 허락받았고, 너무나 지식이 부족하고 공부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628년 사제로 서품되는 영광을 입었다.

신학을 공부할 때, 평소 학업은 부진하고 어려웠으나,

막상 시험장에서는 뛰어난 답변으로 시험관들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비행조종사들의 수도성인

그는 탈혼, 기적 그리고 초자연적 은총 등으로 유명해 졌다.

그는 7번이나 공중에 뜨는 경험을 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8세 조차 그의 성덕과 성실성에 탄복하여 그를 아씨시로 보냈다.

아씨시에 은거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명성이 전 유럽으로 계속 퍼져나가자,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삐에트라모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포쏨로네로 옮겨다녔다.

1657년 그는 오시모 수도원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귀향하여 살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1767년에 시성되었고, 공중 여행자와 비행조종사들의 수도성인이고 시험을 앞둔 이들의 수호자로 불린다.

 

 

코베르티노의 성요셉의 강론집 "말과 생각에서" 중에서

하느님의 사람은 세가지 특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함, 그분을 끊임없이 찬미함,

앞장서서 좋은 일을 하여 이웃에게 모범이 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며 부유합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으면 매우 비참하고 불행합니다.

하늘의 새가 먹이를 얻으려 땅에 잠시 내려 앉았다가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날개짓 하는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종도 이와 같이 곡 필요한 만큼만 땅에 머물고

즉시 영으로 하늘에 올라 하느님을 기리고 찬미해야 합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www.ofmconv.or.kr)

  

 

성인은 누구나 다 현세에서 하느님과 일치한 생활을 한 분들인데,

주님께서 당신과의 일치를 위해부르신 길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성인은 사람의 주목을 끌지 않는 평범한 생활로서,

어떤 성인은 기적, 탈혼, 오상 등으로써 주님과의 일치를 도모했다.

이는 하느님의 성소에 관한 것으로 누가 좋고 누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며,

요셉은 후자에 속한 분으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 특수한 길로써 성인이 된 분이다.

 

 

그는 1603년 6월 17일 남 이탈리아의 마을인 쿠페르티노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가난해 요셉은 어려서부터 구둣방의 직공으로 일을 하게 되었으나

곧 몸이 쇠약해졌으므로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성모님의 은혜로 다시 건강을 회복한 요셉은 감사의 뜻에서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17세 때에 꼰벤투알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8개월 후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모 친척들은 이를 매우 수치로 생각하며 요셉을 밥벌레라고까지 욕하며 냉대했다.

그러나 요셉은 잠시나마 그 수도원에서 겸손, 희생, 인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일체를 인내하며 얼마간 요양한 후,

이번에는 규율이 조금 부드러운 그로텔라의 꼰벤투알수도원에서 마부노릇을 하는 한편

제3회원이 되어 덕을 닦게 되었다.

 

평수사인 요셉은 수도원에서 가장 천한 일이라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성의껏 잘했기 때문에 장상의 눈에 들게 되어 성직자로서의 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지금부터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퍽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의 노력은 참으로 눈부신 바가 있어

서품 자격 시험에서 그는 항상 좋은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25세인 1628년에 사제로 서품되는 영광을 입었다.

사제가 된 후 첫 미사를 지냈는데, 그는 이때에 탈혼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탈혼 상태는 그 후도 가끔 있었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서 기도할 때 혹은 십자가의 옆구리의 상처만 보아도 즉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탈혼 상태에서는 몸이 곧 공중에 뜨면서 외부와의 감각이 전혀 중단되고

오직 하느님과의 교감 상태, 환희를 느끼는 것인데,

그럴 때도 장상이 부르면 즉시 정상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특별한 은혜를 받음과 동시에 미래의 사정에 통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런 신기한 특은을 받은 요셉에 대한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영성지도와 기도를 청하고,

때론 병의 치료와 많은 위로를 받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전에 프로테스탄트였던 독일의 브라운 슈와이히의 공작 요한 프리데리코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1650년에 요셉이 아시시에서 지낸 미사에 참여하고 감동을 받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항상 바른 신앙을 보존하려는 교회는 요셉의 그런 평판을 듣고

혹 민중을 유혹하는 기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엄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요셉은 대단히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그로텔라에서 아시시로 보냈다.

아시시에 은거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명성을 전 유럽으로 계속 퍼져나가자,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피에트라로싸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포쏨로네로 옮겨다녔다.

 

1657년에 그는 오시모 수도원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다시 이동되었으나

조금도 불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에 대한 유혹도 깨끗이 풀어져 고위 성직자를 비롯한

교황 우르바노 8세까지 그의 겸덕을 칭찬하고

하느님의 특은을 받은 성인으로 인정하며 그의 기도와 지도를 청하겠끔 되었으므로,

이에 그의 명성은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요셉의 나이가 60이 되자 생전의 극기와 열렬한 활동으로 무리를 해 병에 걸리게 되었고,

죽은후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묻어주기를 장상에게 부탁하고 잠자듯이 고요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쿠페르티노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셉(Josephus)은 젊어서 제화공의 도제로 들어갔다가 17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그 다음에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8개월 후에 쫓겨났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눈치가 없고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그는 그라텔라의 콘벤투알 수도원에서 마부 노릇을 하는 한편 3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동안이나 이 수도원에서 살았다. 이윽고 1625년에 그는 수련자로서 허락을 받았고, 너무나 지식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628년에 사제로 서품되는 영광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곧 탈혼, 기적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총 등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7번이나 공중에 뜨는 경험을 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조차 그의 성덕과 성실성에 탄복하여 그를 아시시(Assisi)로 보냈다. 아시시에 은거해 있는 동안에도 그의 명성은 전 유럽으로 계속 퍼져나갔기 때문에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피에테로사(Pieterossa)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포솜로네로 옮겨 다녔다. 1657년 그는 오시모(Osimo) 수도원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귀향하여 살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1753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공중 여행자와 비행 조종사들의 수호성인이다(가톨릭홈에서)







 

 

 

 

 

♬10.Canto Gregoriano-Puer Natus In Bethlehem

 

 

 

 

 

 

 

San Giuseppe da Copertino Sacerdote

18 settembre
 
Copertino (Lecce), 17 giugno 1603 – Osimo (Ancona), 18 settembre 1663

Giuseppe Maria Desa nacque il 17 giugno 1603 a Copertino (Lecce) in una stalla del paese. Il padre fabbricava carri. Rifiutato da alcuni Ordini per «la sua poca letteratura» (aveva dovuto abbandonare la scuola per povertà e malattia), venne accettato dai Cappuccini e dimesso per «inettitudine» dopo un anno. Accolto come Terziario e inserviente nel conventino della Grotella, riuscì ad essere ordinato sacerdote. Aveva manifestazioni mistiche che continuarono per tutta la vita e che, unite alle preghiere e alla penitenza, diffusero la sua fama di santità. Giuseppe levitava da terra per le continue estasi. Così, per decisione del Sant'Uffizio venne trasferito di convento in convento fino a quello di San Francesco in Osimo. Giuseppe da Copertino ebbe il dono della scienza infusa, per cui gli chiedevano pareri perfino i teologi e seppe accettare la sofferenza con estrema semplicità. Morì il 18 settembre 1663 a 60 anni; fu beatificato il 24 febbraio 1753 da papa Benedetto XIV e proclamato santo il 16 luglio 1767 da papa Clemente XIII. (Avvenire)

Patronato: Aviatori, Passeggeri di aerei, Astronauti


Etimologi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A Osimo nelle Marche, san Giuseppe da Copertino,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onventuali, che, nonostante le difficoltà affrontate durante la sua vita, rifulse per povertà, umiltà e carità verso i bisognosi di Dio.


Ascolta da RadioVat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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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il francescano spagnolo s. Salvatore da Horta (1520-1567) che creava molti problemi ai suoi confratelli per i continui prodigi che operava, così anche s. Giuseppe da Copertino, li creava con il suo levitare da terra e per le continue estasi.
Giuseppe Maria Desa, figlio di Felice Desa e di Franceschina, nacque il 17 giugno 1603 a Copertino (Lecce) in una stalla del paese.
Il padre, maestro nella fabbricazione dei carri, era persona di fiducia dei signori locali, che a Copertino possedevano un castello; aveva sposato Franceschina di famiglia benestante, industriosa e pia, che aveva portato una discreta dote in ducati; insomma le condizioni economiche erano soddisfacenti.
Poi il padre Felice, per fare un favore ad un amico, fece da garante per un affare di mille ducati; a seguito del fallimento dell’amico, Felice fu denunziato e perse la causa, dovette vendere la casa e perse il lavoro, finendo in miseria con tutta la famiglia.
Proprio quando stava per nascere il sesto figlio Giuseppe, andarono ad abitare in una stalla dove vide la luce il nascituro.
Dopo poco tempo il padre morì per il dispiacere e la vedova rimase sola con i sei figli senza l’aiuto di nessuno; d’altronde la miseria era grande in tutto il Salentino, i poveri contadini erano gravati dei più assurdi balzelli come per esempio, cinque grana per ogni albero, a causa dell’ombra che faceva sulla terra.
La povera vedova e i figli, vissero anni durissimi, Giuseppe Desa, incapace d’imparare il mestiere del carpentiere o dello scarparo, faceva il garzone in un negozio, dove si trovava meglio che a casa, anzi specifichiamo nella piccola stalla adattata ad abitazione umana.
In paese lo chiamavano “Boccaperta” per la sua abituale distrazione; in aggiunta, il creditore del padre ottenne dal Supremo Tribunale di Napoli, che Giuseppe unico figlio maschio di Felice e Franceschina, una volta raggiunta la maggiore età, fosse obbligato a lavorare senza paga, fino a saldare il debito del defunto genitore.
In pratica gli si prospettava una vita senza speranza, da considerare una vera e propria schiavitù; l’unico modo per sfuggire a questa desolante prospettiva era farsi sacerdote o frate.
Sacerdote non era possibile, in quanto Giuseppe non sapeva niente di lettere e istruzione, forse frate andava bene, perché occorrevano braccia per lavorare e su questo non c’era difetto.
La scuola che aveva cominciato a frequentare, la dovette lasciare quasi subito, a causa di un’ulcera cancrenosa che lo tormentò per cinque anni e di cui guarì grazie ad un eremita di passaggio che la massaggiò con dell’olio.
A quasi 17 anni, lasciò la madre e bussò alla porta dei Frati Francescani Conventuali, convento detto della ‘Grottella’ a due passi da Copertino, dove un suo zio era stato padre Guardiano, ma dopo un periodo di prova fu mandato via, per la sua poca letteratura, per semplicità ed ignoranza”.
Passò allora dai Francescani Riformati, ma anche questi dopo un po’ lo rifiutarono, si diresse allora dai Cappuccini di Martina Franca, era il 15 agosto 1620, allora erano esigenti in fatto di cultura, vi restò otto mesi, ma per la sua inettitudine procurava continui disastri, aggravati da improvvise estasi durante le quali lasciava cadere piatti e scodelle, i cui cocci venivano attaccati alle sue vesti in segno di penitenza.
Nel marzo 1621 fu rimandato a casa, sostenendo che non era adatto alla vita spirituale né ai lavori manuali. Aveva una incapacità naturale e una preoccupazione soprannaturale, ma mentre la prima era evidente, la seconda sfuggiva a tutti.
Uscito dal convento rivestito con pochi stracci, perché aveva perso una parte del suo abito da laico, fu scambiato per un poco di buono, assalito dai cani di una vicina stalla e quasi bastonato dai pastori; fu respinto dallo zio paterno e persino la madre lo maltrattò, rimproverandogli di essersi fatto cacciare dal convento e che per lui non c’era posto.
Grazie all’interessamento dello zio materno, Giovanni Donato Caputo, riuscì dopo molte insistenze a farsi accettare di nuovo dai Conventuali della ‘Grottella’, esponendo il suo caso per sfuggire alla condanna del Tribunale; i frati presero a cuore la situazione e lo ammisero nella comunità, prima come oblato, poi come terziario e finalmente come fratello laico, aveva 22 anni e si era nel 1625.
Addetto ai lavori pesanti e alla cura della mula del convento, Giuseppe ben presto espresse il desiderio di diventare sacerdote, sapeva appena leggere e scrivere, ma intraprese gli studi con volontà e difficoltà; quando dovette superare l’esame per il diaconato davanti al vescovo, accadde che a Giuseppe, il quale non era mai riuscito a spiegare il Vangelo dell’anno liturgico tranne un brano, il vescovo aprendo a caso il libro domandò il commento delle frase: “Benedetto il grembo che ti ha portato”, era proprio l’unico brano che egli era riuscito a spiegare.
Quando trascorsi i tre anni di preparazione al sacerdozio, bisognava superare l’ultimo e più difficile esame, i postulanti conoscevano il programma alla perfezione, tranne Giuseppe; il vescovo ascoltò i primi che risposero brillantemente all’interrogazione e convinto che anche gli altri fossero altrettanto preparati, li ammise tutti in massa, era il 4 marzo 1628.
Per la seconda volta fra Giuseppe, superò l’ostacolo degli esami in modo stupefacente e fu ordinato sacerdote per volere di Dio.
Si definiva fratel Asino, per la sua mancanza di diplomazia nel trattare gli altri uomini, per la sua incapacità di svolgere un ragionamento coerente, per il non sapere maneggiare gli oggetti, ciò nonostante nel corso della sua vita ebbe tanti incontri con persone di elevata cultura, con le quali parlava e rispondeva con una teologia semplice ed efficace.
Un professore dell’Università francescana di S. Bonaventura di Roma, disse: “L’ho sentito parlare così profondamente dei misteri di teologia, che non lo potrebbero fare i migliori teologi del mondo”.
Ad un grande teologo francescano che chiedeva come conciliare gli studi con la semplicità del francescanesimo, rispose: “Quando ti metti a studiare o a scrivere ripeti: Signor, tu lo Spirito sei / et io la tromba. / Ma senza il fiato tuo / nulla rimbomba”.
Possedeva il dono della scienza infusa, nonostante che si definisse “il frate più ignorante dell’Ordine Francescano”; amava i poveri, alzava la voce contro gli abusi dei potenti, ai compiti propri del sacerdote, univa i lavori manuali, aiutava il cuoco, faceva le pulizie del convento, coltivava l’orto e usciva umilmente per la questua.
Amabile, sapeva essere sapiente nel dare consigli ed era molto ricercato dentro e fuori del suo Ordine. Dopo due anni di terribile aridità spirituale, che per tutti i mistici è la prova più difficile a superare, a frate Giuseppe si accentuarono i fenomeni delle estasi con levitazioni; dava improvvisamente un grido e si elevava da terra quando si pronunciavano i nomi di Gesù o di Maria, nel contemplare un quadro della Madonna, mentre pregava davanti al Tabernacolo; una volta volando andò a posarsi in ginocchio in cima ad un olivo, rimanendovi per una mezz’ora finché durò l’estasi.
In effetti volava nell’aria come un uccello, fenomeni che ancora oggi gli studiosi cercano di capire se erano di natura parapsicologica o mistica; il fatto storico è che questi fenomeni sono avvenuti e in presenza di tanta gente stupefatta, che s. Giuseppe da Copertino non era un ciarlatano né un mago, ma semplicemente un uomo di Dio, il quale opera prodigi e si rivela ai più umili e semplici.
Comunque frate Giuseppe costituì un problema per i suoi Superiori, che lo mandarono in vari conventi dell’Italia Centrale, per distogliere da lui l’attenzione del popolo, che sempre più numeroso accorreva a vedere il santo francescano.
Di lui si interessò l’Inquisizione di Napoli, che lo convocò per capire di che si trattasse e nel monastero napoletano di S. Gregorio Armeno, davanti ai giudici, Giuseppe ebbe un’estasi; la Congregazione romana del Santo Uffizio alla presenza del papa Urbano VIII, lo assolse dall’accusa di abuso della credulità popolare e lo confinò in un luogo isolato, lontano da Copertino e sotto sorveglianza del tribunale.
Fu sballottolato da un convento all’altro, a Roma, Assisi, Pietrarubbia, Fossombrone e infine ad Osimo (Ancona).
Aveva familiarità con gli animali, con cui conversava e come si era identificato in fratel Asino, così identificava gli altri uomini nelle sembianze dell’animale che meglio simboleggiava le sue caratteristiche di vita.
Nel 1656 papa Alessandro VII mise fine al suo peregrinare da un convento all’altro, destinandolo ad Osimo dove rimase per sette anni fino alla morte, continuando ad avere estasi, a sollevarsi da terra e ad operare prodigi miracolosi.
Morì il 18 settembre 1663 a 60 anni; fu beatificato il 24 febbraio 1753 da papa Benedetto XIV e proclamato santo il 16 luglio 1767 da papa Clemente XIII.
Riposa nella chiesa a lui dedicata ad Osimo; festa liturgica il 18 settembre.


Autore: Antonio Borrelli

 

 


Spunti bibliografici su San Giuseppe da Copertino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Chiappinelli Wanda, San Giuseppe da Copertino, Shalom, 2008 - 320 pagine
Danza Bonaventura, San Giuseppe da Copertino, San Paolo Edizioni, 2003 - 68 pagine
Sebasti Goffredo, Il caso Giuseppe da Copertino, SugarCo, 2003 - pagine
Mattellini Giuseppe C., Giuseppe da Copertino. Uomo santo, Edizioni Messaggero, 2003 - 160 pagine
Danza Bonaventura, Giuseppe da Copertino, Edizioni Messaggero, 2003 - 128 pagine
De Concini Ennio, Il frate volante. Vita miracolosa di san..., San Paolo Edizioni, 1998 - 162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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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5-06-04
 



 

 


JOSEPH of Cupertino
 
Also known as
Joseph of Copertino; the Gaper (derogatory term from his childhood); the Flying Friar; Joseph Desa
Memorial
18 September
Profile
Joseph's father, Felice Desa was a poor carpenter who died before the boy was born. Creditors drove his mother, Francesca Panara, from her home, and Joseph was born in a stable. Starting at age eight, he received ecstatic visions that left him gaping and staring into space. He had a hot temper, which his strict mother worked to overcome.

Apprenticed to a shoemaker. At age 17 Joseph applied for admittance to the Friars Minor Conventuals, but was refused due to his lack of education. He applied to the Capuchins, was accepted as a lay-brother in 1620, but his ecstasies made him unsuitable for work, and he was dismissed. Abused by his family, he continued his prayers, and was accepted as an oblate at the Franciscan convent near Cupertino. His virtues were such that he became a cleric at 22, a priest at 25. Joseph still had little education, could barely read or write, but received such a gift of spiritual knowledge and discernment that he could solve intricate questions.

His life became a series of visions and ecstasies, which could be triggered any time or place by the sound of a church bell, church music, the mention of the name of God or of the Blessed Virgin or of a saint, any event in the life of Christ, the sacred Passion, a holy picture, the thought of the glory in heaven, etc. Yelling, beating, pinching, burning, piercing with needles - none of this would bring him from his trances, but he would return to the world on hearing the voice of his superior in the order. He would often levitate and float (which led to his patronage of people involved in air travel), and could hear heavenly music.

Even in the 17th century, there was interest in the unusual, and Joseph's ecstasies in public caused both admiration and disturbance in the community. For 35 years he was not allowed to attend choir, go to the common refectory, walk in procession, or say Mass in church. To prevent making a spectacle, he was ordered to remain in his room with a private chapel. He was brought before the Inquisition, and sent from one Capuchin or Franciscan house to another. But Joseph retained his joyous spirit, submitting to Divine Providence, keeping seven Lents of 40 days each year, never letting his faith be shaken.
Born
17 June 1603 as Joseph Desa at Cupertino, diocese of Nardo, near Brindisi in the kingdom of Naples, Italy
Died
18 September 1663 at Ossimo, Italy of a rapidly developed but severe fever; buried in the chapel of the Conception, Ossimo
Name Meaning
whom the Lord adds (Joseph)
Beatified
24 February 1753 by Pope Benedict XIV
Canonized
16 July 1767 by Pope Clement XIII
Patronage
air crews; air travellers; aircraft pilots; astronauts; aviators; flyers; paratroopers; students; test takers
Readings
Clearly, what God wants above all is our will which we received as a free gift from God in creation and possess as though our own. When a man trains himself to acts of virtue, it is with the help of grace from God from whom all good things come that he does this. The will is what man has as his unique possession.

-Saint Joseph of Cupertino, from the reading for his feast in the Franciscan brev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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