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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성공회로 넘어가고싶은데 세례랑 대부 대모 중복되지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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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철 [121.161.84.*]

2013-09-09 ㅣ No.10265

+ 찬미 예수님 +

자매님은 견진까지 받으셨는데 교리를 어떻게 배우시고 세례를 받으셨는지요? 먼저 자기 성찰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성체가 뭔지? 견진이 뭔지? 미사를 왜 드리는지?  묵상해 보세요. 참고로 한번 읽어 보세요."

 영세(領洗) : ‘거느릴 영, 씻을 세’ - 세례를 받음 또는 그 세례. 한국 천주교 초기 때부터 사용되어 오는 말이다. () 성세성사

신자가 세례 받는 일을 가리킬 때는 ‘영세 받다’가 아닌 ‘영세하다’로 써야 한다.

 견진성사(堅振聖事) : 성세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 시키고 증거케하는 성사.  

성세성사(聖洗聖事) : 성세 또는 세례 - 물로 씻는 예식으로 이루어지는 세례, 즉 수세는 가톨릭 교회의 성사이며 可見的 교회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단체에 入籍하는 입문성사(入門聖事, 성세, 견진, 성체) 중 최초로 받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세를 받아야만 비로서 교회의 기타 성사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성사이다. 성세라는 관문을 통함으로써 영세한 자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교회의 모든 성사들이 그렇듯이 이 성세성사도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설정하신 은총의 표지이며 이 표지가 상징하는 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미쳐진 죄(罪)와 인간 각자가 스스로 범한 죄(本罪)와 그 벌까지 온전히 사함을 받고 영신적으로 재생되어 하느님의 자녀(義子)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되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 사람으로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성세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머무르시는 궁전이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참돤 자녀로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영원한 사랑의 속삭임의 생활을 영유하게 된다.

이 성세야말로 인간이 의화(義化) 됨을 표징하는 외적 표지로서 법적인 의미로서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단체에 입적됨을 표시한다. 이는 마치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가 자기 부모로부터 성명을 받아 호적에 올려짐으로써 한 인간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성세로써 이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결속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성령의 힘으로 제사와 경신례를 올리며 그리스도와 운명을 함께 하며 일생을 그리스도 교인 차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영구적 보증으로서 인호를 받는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성세관이다.(이하생략, 한국 가톨릭 대 사전 참조)

성체(聖體)란 무엇인가? : 성체는 신약의 성사로서 살아계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 형태 안에 참으로 실제로, 실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는 형태에 불과하고 실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의 영혼과 모든 속성, 즉 인성과 천주성 까지도 빵과 포도주 형태 안에 현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체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현실로는 빵과 포도주이면서 실체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즉 성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실체로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를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라 한다.(이하생략, 한국 가톨릭 대 사전 참조)

 

+ 마태오 복음 16, 18절에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교회들이 아님)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선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레를 받음) 봉행해야 합니다.

* 천주교는 예수 친히 세우신 참 종교입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참 계시의 종교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무량하시며, 전지, 전선 하신데 교회를 하나이상 세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교회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의 예를 들어 본다면,

 

*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회 혁싱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다.

이 사건 자체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1,500여년동안 전승, 보존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파고 하였고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여러 갈래의 분파로 분열 시켰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과 교회 밖에서의 개혁으로 구분된다.  

-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가톨릭 종교 개혁으로서 가톨릭 교회쇄신(Catholic Reform) 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 - Rrfomation)이라고 일컬어지고 있고,

- 교회 밖에서의 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서 단순히 종교개혁( Rrfomat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개신교 탄생을 초래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칭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에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에 따른 유럽 대륙에서의 종교개혁, 즉 츠빈글리의 종교개혁,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 칼빈의 종교개혁 등이 있다.

 

1. 루터의 종교개혁 :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교황 율리오 2세가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1507년에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대사 설교가 필요 하였다.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대사 위원회가 설립되어 설교 지침서가 발간되었고 설교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지침서는 대사에 대한 교리를 약술하였고 반면에 모금 목적을 위해 대사를 과찬하여 상품화 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하도록 오도하였다.

 

* 루터가 거주하는 비텐베르크에서는 대사 설교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교우들이 이웃 지방에서 활동하던 요한 테첼의 설교를 듣고 대사부를 사오는 광적인 소란에 충격을 받고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일련의 신학명제(95개조의 명제)를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그의 주교와 동료 교수들에게 발송하였다.

이는 후에 출판 업자들에 의해 간행되어 세상에 나옴으로써 문제화 되었다.

 

1518년에 이르러 루터의 명제는 신학자들로부터 반박을 받았고 그는 수도원 참사회에 소환 되었으며 로마에서 파견된 카에타노 추기경의 심문을 받았지만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는 1518년 11월 9일에 반포된 대사에 대한 교회 입장과 1520년 6월 15일에 공포된(교황교서)에 불복하여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받았다.

 

루터 문제는 이제 정치문제로 번져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어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전쟁의 발발로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루터는 반종교적 개혁 저술 활동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152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독일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기 위해 국회를 열었지만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반기를 들고 일어나므로 1529년에 그리스도교계는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많은 회담과 충돌을 거쳐 루터가 사망한 뒤에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일차적 타결을 보았으나 다시 충돌이 일어나 '30년 전쟁' 끝에 '베스트팔리아 평화회담' 에서 종교분쟁은 일단락 되었다.

1570년에 이르러 독일 북부 지방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는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나 그외의 유럽 지역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2. 유럽대륙 종교개혁 : 스위스에서는 츠빈글리가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취리히에서 교회 설교가로 활동하면서

1519년부터 루터의 개혁정신에 관심을 갖고기 시작하여 1523년에 시의회의 지지를 받아 그의 교회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는 성당안에 있는 성화상의 제거, 수도원의 페쇄, 국가의 교회 성직록 관리, 국가 혼인제도의 신설, 교회전례와 강복의 페지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1524년 12여명의 성주들이 가톨릭 동맹을 맺고 항의하여 취리히 시의회는 일단 개혁운동을 정지하였으나 1525년부터 츠빈글리는 개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신.구교의 종교전쟁(카펠리 전쟁)이 일어나 1531년에 츠빈글리는 전사하였고,

취리히와 남부 독일에 미치던 영향력도 점차로 약화되어 갔으며 칼빈파로 흡수되었다.

 

한편 1524년에 츠빈글리가 가톨릭 동맹에 굴복하자 그의 일부 과격한 추종자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신앙에 의한 의화'라는 개혁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신앙을 받을 수 있는 성인(成人)이 되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아의 세례를 금지하고 성인의 재세례를 주장하였다.

 

1525년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의 집회를 금지하고, 이들을 박해 추방하였다.  

 

추방된 재세례파는 서북부 독일과 네델란드로 자리를 옮겨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교회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다가 1535년에 뮌스터에서 지도자들이 처형 됨으로써 재세례파가 건설하려는 그리스도 왕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3. 칼빈의 종교개혁 : 제네바에서는 1534년 초에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으로 <기독교 강요>(1536년)를 저술한 칼빈이 시의회 지지를 받고 교회개혁에 착수하였다. 

그의 과격한 신자생활의 혁신은 시민들의 반발을 받았으니, 칼빈은 가혹한 처벌로 대응하므로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제거되었고, 제네바는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사상은 프랑스에 들어가 '갈리아 신앙 고백서' 가 작성 되었고 여기에 정치적 개입으로 위그너 전쟁(1562-1598년)이 발발하여 이는 '낭트 칙령'으로 칼빈파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네델란드에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칼빈교는 성장하여 북부 지방에서는 국교가 되어 개혁교회로 오늘날 까지 남아있다. 영국과 스코틀란드에도 들어왔다.

당시에 제해권을 장악한 네델란드와 영국은 식민지 건설과 함께 칼빈 사상을 쉽게 해외에 확대할 수 있었다.  

  

4. 영국의 종교개혁 : 헨리 8세(1509-1547)는 본래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칠성사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을 때에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미 교황 율리오 2세에게 관면을 받고 과부가 된  형수인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결혼하였지만, 뒷날엔 볼랜과의 사랑에 빠져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하였다.

 

결국 교황 글레멘스 7세와의 이혼문제에 대한 절충이 결렬되자 헨리 8세는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여 의회로 하여금 영국왕의 영국 교회의 수위권을 인정하도록 조처하였고, 영국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수위권에 굴복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로써 영국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분리되었다.

 

1533년부터 로마 교회에 충실한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고 수도원을 페쇄하엿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6개 신앙 조항'을 선포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준수하였다.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1547-1553년)는 10세의 어린 왕이었기 때문에 외삼촌 에드워드 세이 모어가 섭정을 하면서 칼빈 사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여 교회개혁에 착수하였다.

1547년에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가 거부되고 '6개 신앙 조항'이 파기되었다.

 

*1548년에는 성직자의 독신제도가 페지되었고 1553년에는 영국 교회의 '42개 신앙 조항'이 반포되었다. 이제 영국의 성공회가 탄생 하기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사망한 뒤에 카타리나의 소생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매우 환상적 가톨릭 신자였다. 그가 등극하게된 것은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자행된 섭정 독재 정치를 종식하고 전통적 튜더 왕가의 계승을 의회와 국민이 갈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는 이를 오해하여 국민이 여왕의 가톨릭 신앙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우기 그는 1554년에 스페인의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 함으로써 영국의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켜 의회와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아 점차로 국민 신망을 잃었다.

 

그래서 메리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잔인한 보복행위를 감행하였다. 아울러 프로탄트 지도자들을 화형에 처하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결국 1558년에 메리는 사망하였고 이로써 영국에서의 가톨릭 부활의 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되었다.

 

* 메리를 계승한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볼랜의 딸이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헨리 8세의 결혼을 단죄한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가톨릭 신앙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박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자베드의 치하에서 영국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영국 성공회의 교계제도를 설정하였다. 

*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황 비오 5세가 1570년에 엘리자베드 여왕을 파문 하였을 때에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영국 성공회는 대륙 어느 개신교 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대륙의 개신 교도가 박해로 피난하게 될 때에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상 한국 가톨릭 대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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