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뻥튀기 노부부의 유쾌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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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04-09 ㅣ No.4745

 

 

 

여기 40년 벙튀기 장사로 5남매를 키우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뻥튀기를 파는 부부가 있습니다.

정오성 할아버지(70세)와 이경숙 할머니(68세).

이들은 4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부부로,

같은 직장에 몸담은 동료로 늘 함께 해왔습니다.

부부는 매일 아침 집에서 일터인 양수리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 첫차를 탑니다.

한겨울 혹독한 추위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장터 구석, 비닐 한 장으로 덮어 놓은 자리.

이 곳이 노부부의 40년 직장입니다.

때는 12월, 아직 동이 트려면 두어 시간 남았는데,

몸 녹일 불도 없어 무척 춥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익숙한 움직임으로 비닐을 걷어 내고 뻥튀기 기계를

펼치는 동안 할아버지가 슬쩍 몸을 뺍니다.

물론 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할 할머니가 아니죠.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여기 있으면 뭘해. 아직 손님도 없는데...."

"어디 가려는데요?"

"오줌 누러 가."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아침마다 서둘러 어디론가 사라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오줌 누러 간다며

거짓말을 하고 할아버지가 가는 곳은 백발백중 근처

다방입니다.

아마 지금쯤 할아버지는 커피를 마시며 다방 주인과

한창 수다를 떨고 있을 겁니다.

누구는 춥지 않습니까?

할머니도 고생하는데 할아버지만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불평은 커녕 할아버지의

거짓말에 매일 속아넘어가는 척해 줍니다.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린 지도 10년째.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할아버지의 병이 더 심해질까

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한테 미안해서 다방에 간다는 말 대신, 괜히

오줌 누러 간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

겠습니까.

그래서 동이 트기 전까지만이라도 할아버지가 따뜻한

다방에 계시는 편이 할머니 마음을 더 편하게 합니다.

할머니의 예상대로 역시나 오늘도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할아버지.

그런데 갑자기 다방으로 할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옵니다.

물론 전화를 건 사람은 할머니 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할머니가 거짓말을 할 차례입니다.

"뻥튀기 영감 거기 계시죠? 지금 사람들이 뻥튀기

사러 엄청 많이 와서 기다린다고 그러세요."

할머니의 전화에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할아버지.

그러나 할아버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침 8시에 뻥튀기를 사려고 손님이 줄 서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추운데서 혼자 서 있을 할머니가 안쓰러워

얼른 그 곁으로 돌아갑니다.

역시나 그 많다던 손님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안 보입니다. 다만 그 동안 뻥튀기 기계를 뜨겁게

달궈 놓고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만이

그를 반갑게 맞이할 뿐입니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은 할아버지.

이제 할아버지가 그만의 특별 권한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 순간은 뻥튀기회사의 가장 엄숙한 시간

이기도 합니다.

 

"뻥이요!"

할아버지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뻥튀기 기계에 연기

가 모락모락 나자 손님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40년 동업자답게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노부부.

돈받는 할머니와 뻥튀기를 건네주는 할아버지의

손놀림은 거짓말처럼 빨라집니다.

손님이 뜸한 늦은 오후.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일찍 자리를

걷습니다. 갑자기 더 추워진 날씨에 할아버지의

중풍이 덧날까 걱정하는 할머니의 고집 때문입

니다.

모처럼 조퇴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뻥튀기 부부.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양수리,

그저 흐르는 물살만 보고 있어도 때묻은 가슴 씻어

내기 좋은 곳.

이 강과 맞닿은 산기슭에 노부부의 작은 보금자리

가 있습니다. 부부의 단촐한 저녁 밥상.

그런데 아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중풍으로 밥을 제대로 못 드시는 할아버지가 밥풀

을 여기저기 흘리기 때문입니다.

참다못한 할머니가 드디어 전쟁을 선포합니다.

수저에 놓인 음식의 반을 흘리는 할아버지에게

상에 바짝 다가앉아 드시라고 신경질을 낸 겁니다.

할아버지기 가만 있을 리 없지요.

화가 나서 밥상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다 보니 일어서려다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맙니다. 왠지 위태로운 광경.

그러나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갑자기 깔깔 웃어

댑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시치미떼고 다시

꿋꿋하게 식사을 합니다.

그러다 아무래도 쑥스러운 듯 슬며시 할머니를 보

면서 웃는 할아버지.

 

문득 사랑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늙어 가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납니다.

이들 부부는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랬기에 서로 몸은 각각이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오며 한 번도 넉넉하게 살아 본 적이 없지만

이처럼 웃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다방 간다는 거짓말,

손님이 많다는 거짓말을 서로 눈감아 주듯이 말입

니다.

더도 덜도 말고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한평생 살다

돌아가는 것,

그것이 늘 함께 이 길을 걸어온 노부부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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